춤, 현장
시적 자아가 감지하고 관찰하는 내면의 흐름과 외부의 변화를 하나의 이야기로 꿰어서 연주하는 연가곡집은 본래 그 자체가 수행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가사가 지닌 뉘앙스, 텍스트와 음악이 대응하는 긴밀한 관계를 악보까지 거의 외울 정도로 파악하고 있는 청중이 아닌 이상, 성악가의 제한된 퍼포먼스만으로 다양한 심상을 떠올리며 감상하기란 쉽지 않은 노릇이다.
이번 대관령겨울음악제의 메인 콘서트 중 마지막 프로그램인 〈겨울. 나그네〉(2월 15~16일, 평창 알펜시아 콘서트홀)는 ‘음악체험극’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연가곡집 연주의 수행성을 본격화한 시도라고 볼 수 있었다. 합당한 이유 있는 새로운 시도라면 거침이 없는 손열음 예술감독의 구상 아래, 비범한 성악가의 개인 재량에만 맡겨졌던 수행성은 여러 예술가의 협업으로 시스템화 되었다.
바리톤 조재경의 강건한 가창은 텍스트를 명료하게 전달하는 본연의 역할에 충실했고, 노래를 나눠 맡은 도르트문트 소년 합창단원 두 명의 여린 음성은 나그네의 상처 입은 마음 속 가장 순수한 부분을 끄집어내었다. 거절당한 연인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칠 때에는 여성 낭독자의 목소리가 대신하기도 했다. 가창자들이 보여주는 소년과 사내라는 극단적 이미지 사이에서 그것을 모두 포섭하고 매개하는 중심역할이 바로 김설진의 퍼포먼스인데, 이번 〈겨울. 나그네〉가 주제로 잡았다 할 수 있는 ‘한 사내의 심정적 추락’은 김설진의 연출과 연기로써 그 생명을 얻는다.
대관령겨울음악제 음악체험극 〈겨울. 나그네〉 ⓒ대관령겨울음악제 |
여러 그림이 걸린 고풍스런 유럽식 저택의 이층에서부터 가파른 계단을 구르듯 내려오는 김설진의 첫 등장은 그의 전매특허라 할 수 있겠다. 삶과 죽음의 아슬아슬한 경계에 놓인 남자의 위태로운 내면이 단정적으로 드러나는 그 아크로바틱 연기는 그가 연기자로서의 겸업을 신고했던 이명세 감독의 단편영화 〈그대 없이는 못 살아〉(2017)에서 보여주었던 것과 같고, 무대 장치 또한 2015년 내한한 피핑 톰 무용단의 〈아 루에(À Louer)〉의 그것과 쉽게 연동된다. 김설진의 출연작을 어지간히 보았던 사람이라면 그가 자신이 구축해온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소진시키는 것을 우려할 수도 있으나, 한편으로는 적재적소에 놓이기만 하면 그만큼 구속될 수도 없고 구속되지도 않는 방랑자의 모습을 체화시킬 이가 없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걸려있던 그림 중 가장 유명하고 또 의미심장한 대구가 되는 것은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의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1818)일 텐데, 산의 정상에서 등을 돌린 채 아래를 내려다보는 남자의 당당한 풍채는 세상과의 투쟁에 홀로 맞서는 고독한, 그러나 어느 정도 승리를 담보하고 있는 자아로서 인용되어 왔다. 저택의 이층에 걸린 이 그림과, 실내를 벗어나지 못한 채 피아노와 마룻바닥을 전전하는 김설진의 모습이 뚜렷하게 대비되면서 슬픔과 연민을 자아낸다. 여행을 떠나고 싶다고 해서 모두가 떠날 수 있는 것은 아닐 터. 방랑은 오히려 마음속에서 수천수만 번 일어나는 것이 아닌지. 그가 세 번째 곡 ‘얼어붙은 눈물(Gefror’ne Tränen)’과 네 번째 곡 ‘빙결(Erstarrung)’이 이어지는 동안 마룻바닥에 물을 한없이 따라 붓고 그 위에 드러누워 뒹굴 때 관객은 눈 덮인 벌판에서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속으로 삼키는 시 속의 사내를 두 눈으로 마주하면서 같은 심정에 빠진다.
연가곡집이 중반을 넘어서며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는 열두 번째 곡 ‘외로움(Einsamkeit)’과 열세 번째 곡 ‘소식(Die Post)’에서는 극단의 고독이 불러일으킨 환상과 열망이 그로 하여금 문을 열고 밖에서부터 쏟아져 들어오는 형형색색의 빛을 향해 금방이라도 달려 나갈 것처럼 환희에 차게 만든다. 그러나 곧 이어지는 열네 번째 곡 ‘백발(Der greise Kopf)’과 열다섯 번째 곡 ‘까마귀(Die Krähe)’에서 조로증(早老症)에 걸린 것처럼 일그러진 얼굴과 날개를 달고 날아오르지만 힘없이 추락하고 마는 악보들의 모습을 연출해 조금도 변한 것 없는 절망적인 현실을 일깨운다. 김설진은 이 음악체험극에서 말년에 매독에 걸려 방에 갇힌 채 치료받아야 했던 작곡가의 분신으로서 가장 핵심적인 정서를 구현한 셈이다.
겨울철 레저로서 스키에 대한 광풍도, 올림픽의 열기도 사라져 조용한 평창에서 펼쳐진 이틀간의 〈겨울. 나그네〉는 관객이 이곳까지 오는 길에도 나름의 상념에 잠기게 했겠지만, 공연을 보고 떠나는 길에는 사무치는 쓸쓸함까지 곱씹도록 선사해주었다. 인공적이기는 하나 설원이 옆에 펼쳐져 있고, 도심과는 차원이 다른 매서운 찬바람이 휘돌아 나가니 그야말로 음악을 ‘체험’할 수 있는 조건이 반절은 마련된 셈이었다. 순수음악에 얹어진 김설진의 협업은 다소간 식상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그의 개성적인 면모가 맥락에 맞는 다른 장르와 만나 새로운 의미망을 구성할 때에는 여전히 유효한 매력을 가짐을 확인시켜 주었다.
방희망
2013년 제1회 한국춤비평가협회 춤비평신인상을 통해 춤비평가로 등단했다. 현장 비평가로 다양한 춤 공연에 대한 비평작업을 하고 있으며, 한국춤비평가협회 정회원, <춤웹진>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