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 현장
(사)한국현대무용협회가 주최하는 국제현대무용제(MODAFE)가 5월 16일부터 27일까지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및 소극장, 마로니에 공원 일대에서 열렸다. 올해로 37회째를 맞은 모다페는 지루한 삶, 지친 일상을 깨워줄 움직임, 삶 속에 숨겨진 몸의 리듬을 찾자는 의미에서 ‘Cheer, your dance, your life’라는 주제로 진행됐다. 영국, 네덜란드, 미국, 노르웨이, 한국 등 5개국 26개 단체, 136명의 아티스트가 참여한 공연을 비롯해 작가와의 대화, 춤과 대중이 만나는 지점을 토론한 모다페 포럼, 마로니에 공원 일대에서 펼쳐진 모다페 오프 스테이지 등 이 마련되었다.
올해 모다페는 해외초청작 수를 줄이는 대신 개·폐막작에 힘을 실어 내실을 기했다. Gecko(게코)와 NDT2(네덜란드댄스시어터)의 개·폐막 공연소식은 개최 전부터 많은 관심을 모았다. 영국 피지컬시어터컴퍼니 게코가 선보인 〈The Wedding(결혼)〉은 사회에서 맺어지는 다종다양한 ‘계약’의 형태를 결혼에 빗대어 은유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남자, 여행용 트렁크가방에서 빠져나온 커플, 바쁘게 일하는 회사 직원들을 비롯한 다양한 인간 군상이 박진감 넘치는 장면전환으로 펼쳐졌다. 게코는 서로가 맺고 있는 관계의 모습을 여러 장면의 콜라주로 쉴 새 없이 제시하면서 (계약에 의한) 관계의 본질을 질문하고 있었다. 춤비평가 장광열은 “결혼이란 보편적 소재를 놀이적인 요소와 연극적인 장치를 적절하게 혼합해 표출해냈다”면서 “빠르게 변환되는 작은 공간을 활용한 움직임과 각기 다른 군상들이 마주한 결혼의 행태 등이 던지는 시각적인 연출은 또다른 댄스 시어터의 발현이었다”고 촌평했다.
전화기, 베개, 넥타이, 서류가방, 트렁크와 같은 소품들을 자유자재로 활용하고 회전무대, 액자식 무대로 볼거리를 만들었다. 재기발랄한 아이디어는 작품에 생기를 불어넣기 충분해 보였다. 피지컬시어터컴퍼니 특유의 혼합된 표현법도 특기할 만하다. 전문무용수들처럼 턴과 스텝이 민첩하지는 않지만 활발한 ‘움직임’으로 몰입을 이끌어냈고, 공기 중에 떠다니는 듯 혹은 재빠르게 집어삼킬 듯 자유자재로 ‘호흡’에 강약을 주어 속도를 조절했다. 13가지 언어를 이용한 ‘소리’와 출연자들의 ‘연기’가 녹아들어 전체적으로 무용과 연극이 맞닿은 피지컬시어터의 면모를 발휘했다. 그러나 출연자들이 중얼거리거나 불완전한 문장으로 내뱉는 13가지 언어가 의사전달이나 소통이 아닌 감정표현을 위한 단순한 ‘소리’라 할지라도 간혹 영어 대사에서 희미하지만 장면에 들어맞는 어떤 의미가 포착되곤 했다. 작은 의미라도 담겨 있다면 이를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 번역문을 제시하거나 장면에 쓰인 언어의 맥락을 소개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춤비평가 김예림은 “중반 이후 밀도가 떨어지면서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듯한 인상이 있지만 전반적으로 연극적 내용을 잘 전달했고 대중성을 갖췄다고 생각한다”고 평했다. 한편, 이스라엘 태생의 게코 예술감독 아미트 라하브(Amit Lahav)의 영향으로 작품 곳곳에 이스라엘의 감성이 묻어났는데 이에 대해 어느 무용인은 “요즘 유럽의 공연계의 경향이라면 어쩔 수 없지만 근 몇 년간 모다페의 개·폐막작이 이스라엘 출신 안무가들의 작품에 경도된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취향의 편중이 우려스럽다. 특히 이스라엘은 최근 팔레스타인 충돌문제도 있어서 소비에 주의를 기울였으면 하는데 모다페에서 그런 철학을 보여주었으면 한다”는 의견을 남겼다.
네덜란드댄스씨어터의 젊은 무용수 그룹 NDT2가 모다페의 폐막을 장식했다. NDT2를 대표하는 안무가 요한 잉게르(Johan Inger), 솔 레옹 & 폴 라이트풋(Sol León & Paul Lightfoot), 알렉산더 에크만(Alexander Ekman)의 각기 다른 색깔의 세 작품이 차례로 올랐다.
요한 잉게르의 〈I new then(나는 새로 그때)〉에서는 4명의 소녀와 5명의 소년이 싱어 송 라이터 밴 모리슨(Van Morrison)의 경쾌한 노래 ‘The Way Young Lovers do’, ‘Sweet Thing’, ‘I’ll Be Your Lover Too’, ‘Crazy Love’에 맞춰 장난스럽게 무대를 뛰어다녔다. 무대 뒤편에 가늘고 긴 여러 개의 강철 막대기로 심플한 북유럽 감각의 숲을 세웠고, 청춘남녀는 그 사이를 이리저리 자유분방하게 오갔다. 그들의 움직임은 자연스럽고 활기찼으며 강철 숲의 무겁고 차가운 느낌과 대조적으로 가볍고 따뜻한, 청춘의 이야기 그 자체였다. 솔 레옹과 폴 라이트풋의 〈Sad Case(슬픈 사례)〉에서는 멕시코 맘보 음악에 맞춘 빠른 움직임이 돋보였다. 비틀고 웅크리다가도 무한대로 몸을 확장시키고, 빠르고 정확한 턴을 하거나 과장된 표정을 짓는 등 움직임의 넓은 스펙트럼을 보여주어 무용수의 기량을 두드러지게 표현한 작품이었다. 알렉산더 에크만의 〈Cacti(선인장)〉에서 무용수들은 16개 판넬 위에서 인간 오케스트라가 되었다. 새롭게 편곡한 슈베르트의 ‘죽음과 소녀’에 맞춰 두드리고 박수치고 기합을 넣어 리듬감 넘치는 하모니를 만드는가 하면, 유머와 풍자가 가득한 움직임과 조형성을 강조한 포즈를 곳곳에 배치해 한시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
평단에서는 NDT2의 폭넓은 레퍼토리에 대해 고른 호평을 보였다. “전체적으로 예술적 완성도에서 편차가 있긴 했으나 한 컴퍼니에서 각기 다른 스타일의 작품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경쟁력을 갖췄다고 생각한다. NDT2는 컴퍼니의 운영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보여준 좋은 사례”라는 의견과 “젊은 무용수들로 구성된 NDT2의 특성상 소품 위주의 레퍼토리를 많이 보유하고 있는데 이번에 선보인 세 개 작품은 다양한 움직임을 골고루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라는 평이 있었다.
젊은 무용수들이 보여준 춤의 저력과 표현력에 대한 언급도 주목할 만하다. “NDT2 무용수들의 신체조건은 고르지 않은 편이다. 그럼에도 진정성 있는 움직임을 보여주니 모두가 아름다워 보였고, 하나의 호흡으로 춤을 추니 작품의 완성도가 높아지는 것을 느꼈다. 좋은 무용수에 대한 기준을 폭넓게 생각하는 기회가 됐다”는 의견은 마네킹같이 아름다운 젊은 무용수들이 생명력 없는 춤을 추는 것과 견주어 국내 춤계에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올해 모다페에서는 개·폐막작 외에도 2편의 해외초청작을 만날 수 있었다. 노르웨이의 안무가 벨린다 브라자(Belinda Braza)는 생존을 위해 발버둥치는 현대사회의 디스토피아를 이야기했다. 작품 〈Survival(생존)〉은 어두운 공간, 귀를 자극하는 전자음악 속에서 다소 정제되지 않은 거친 움직임과 강렬하고 단호한 목소리를 이용해 부정적이고 암울한 세상을 생생하게 그렸다. 미국 리리우드버리 댄스컴퍼니(Ririe-Woodbury Dance Company)의 안무가 츠베타 카사보바(Tzveta Kassabova)가 선보인 〈The Opposite of Killing(살인의 반대)〉은 사라져버린 친구로 인해 생겨난 분노와 슬픔, 외로움과 이해 같은 갖가지 감정들의 변화를 안정적인 현대무용의 어법으로 담아냈다.
올해 모다페에 오른 두 가지의 국제 협업작품은 공동창작의 좋은 예를 보여주었다. 한국 안무가 박나훈, 미국의 ODC/Dance Company가 보여준 〈긴 숨(One Long Breath)〉과 한국 안무가 김경신, 영국의 딕슨 엠비아이(Dickson MBI), 인도의 사주 하리(Saju Hari)가 참여한 〈Ordinary Stranger〉는 2년 이상 서로를 오가며 쌍방향의 충실한 창작과정을 거쳤다. 특히 〈Ordinary Stranger〉는 한국과 영국 양국의 지원을 받아 내년에 1시간 풀타임의 완성작을 예정하고 있어 기대를 모은다.
국내초청작으로는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과 소극장에서 각각 6개 작품이 공연되었다. 먼저 대극장에서 펼쳐진 세 가지의 작품은 사회이슈를 춤으로 풀어내 주목받았다. 김영미댄스프로젝트 김영미의 〈페르소나 II〉는 최근 일어난 미투운동에서 비쳐진 개인들의 이중적인 페르소나를 그렸고, 툇마루무용단 이동하의 〈golconde〉는 초현실주의작가 르네 마그리트의 동명 그림에서 영감 받아 물질만능시대 현대인의 극대화된 욕망을 작품에 담았다. 밀물현대무용단 이해준은 〈트라우마 3.0〉을 통해 세월호 등 충격적인 사건으로 인한 집단 트라우마, 사회와 구성원 사이에 내재한 대립과 갈등의 관계를 10명 무용수들의 다양한 그룹핑, 빠른 에너지 흐름과 정적인 움직임을 대조시켜 펼쳐냈다.
대극장 무대에 오른 또다른 세 가지의 작품은 각각 명료한 주제의식을 담아 눈길을 끌었다. The Park Dance 박근태는 〈장례식의 첫째날〉에서 상주와 장례를 찾아온 손님들이 갖는 슬픔과 혼돈, 다양한 감정들을 묵직한 흐름으로 전개하였고, Project S 정석순은 ‘모두 이루어진다’는 의미를 가진 주문 〈아수라 발발타〉를 통해 어두운 현실 속에서도 희망이 있기에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의 모습을 표현했다. 시나브로 가슴에 안지형은 전통연희의 구성과 소재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해탈〉을 선보였다. 안동 하회별신굿탈놀이 중 네 번째 마당 〈파계승〉에 등장하는 네 명의 캐릭터 이매, 초랭이, 부네, 중을 등장시켜 중이 타락하는 장면을 초랭이가 눈치 없이 놀리고, 이매는 순수하게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며 ‘춤이나 추고 갈란다’면서 춤을 통해 해탈하는 과정을 재기 넘치는 장면으로 구성했다. 특히 무용수들이 서로 지탱하여 만들어낸 조형적인 몸의 조합과 바라춤을 변형한 후반부의 장면이 흥미로웠다. 군무의 동작 규모와 동선에 따른 무대 여백을 감안할 때 지난해 소극장보다 이번 대극장에서의 공연이 〈해탈〉에 더 적합한 것으로 보였다.
이밖에 Roh Dance Project 노정식의 〈Bromance〉, 김영진의 〈어스름〉, NONAME SOSU 최영현의 〈Silentium〉, 정진우의 〈Flowing Water〉, 탄츠테아터원스 오재원·김원·문성연·한상률·박준형의 〈시간에 대한 명상〉, 정재우의 〈개꿈〉 등 총 6개 작품이 소극장 무대에 올랐다.
국내작과 관련하여 어느 평론가는 “관객에게 큰 박수를 받은 이동하의 〈golconde〉와 정석순의 〈아수라 발발타〉는 영국의 호페쉬 섹터가 쓰는 동작들을 추종한 듯하다. 호페쉬 섹터를 오마주한다는 명기 없이 그들의 움직임 어법을 가져오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작품을 만들 때 창작자는 윤리의식과 책임감을 갖고 주의할 필요가 있다”는 일침을 가했다.
올해 모다페의 전체적인 인상과 향후 방향에 관해 무용인과 비평가들의 여러 의견이 제시된다. 먼저 국내초청작들은 모두 25분 남짓으로 시간 길이와 작품 규모에서 소품으로 분류될 수 있었는데, 이와 관련해 “해외작들과 국내작들을 비교해보면 대체로 모다페는 (국내작들에 대해서는) 기울어진 운동장으로서 한계를 거듭해온 것으로 생각된다. 국내작을 통 크게 발굴하는 기획이 요청된다”, “국내작은 소품 위주거나 알려진 무용가들의 작품으로 구성됐다. 안정적인 기획은 다른 한편으로 충분히 예측 가능하다는 점에서 축제에 대한 호기심을 떨어뜨리는 역효과를 낳았다. 다소 논란을 일으키더라도 문제작, 실험작을 발굴해 현대무용을 이끄는 축제가 되길 바란다”는 지적이 있었다.
나아가 국내 최장수 국제 현대무용 축제로서 세계 조류를 반영하고 프로그램의 다양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제언이 뒤따랐다. “모다페는 최근 개·폐막 작품에서 일정 수준이상을 유지해 신뢰를 주고 있다. 젊은 안무가들을 찾아내고자 하는 시도는 고무적이나 독창적인 해외단체의 작품을 보완하는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 “유럽에 편중된 작품 선정과 매체 융복합적인 작품이 전무하다는 점은 재고되어야 한다. 4차 산업혁명이나 인공지능 혁명과 연관된 작품이 한 점이라도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다양한 국가, 독특한 성향의 해외단체를 선보여 국제 춤축제라는 명성에 맞게 규모를 늘렸으면 한다”는 의견이다.
폐막행사로 열린 모다페 오프 스테이지(Modafe Off Stage, M.O.S.)는 올해 더욱 풍성해졌다. 푸르른 5월의 주말, 마로니에공원 일대를 가득 채운 모스의 다양한 춤 프로그램은 누구나 참여하고 함께 즐길 수 있는 열린 축제의 장이었다. 춤에 대한 열정과 의지로 의기투합한 시민단체의 7가지 춤판 ‘나도 댄서다!’가 활기차게 열렸고, 류장현과 친구들, 멜랑콜리 댄스컴퍼니, 콜렉티브 에이, 댑댄스프로젝트가 참여한 ‘릴레이 마로니에 퍼포먼스’에서는 각 단체의 짧은 공연 후 시민과 함께 간단한 몸풀기 워크샵도 진행됐다. 안무가 밝넝쿨은 사주명리학으로 몸을 이해하고 자신에게 필요한 춤을 처방받는 프로그램 ‘하늘과 땅과 아프니까 사람이다’를 열었다. 음양오행에 근거한 다섯 가지의 에너지(화·수·목·금·토) 가운데 과다한 것은 덜어내고 부족한 것은 보충할 수 있는 자신만의 춤 동작을 처방받고, 움직임을 따라해 보는 독특하고 흥미로운 워크숍으로 참여자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무용가 최보결과 함께하는 ‘100인의 마로니에댄스’는 남녀노소 누구나 손잡고 걷고 춤추며 행복을 나누고 힐링을 얻는 시간으로 마련됐다.
이밖에도 모다페 폐막일에는 ‘춤예술, 일상으로 만나다’를 주제로 포럼이 열렸다.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김채현 교수, 최보결의 춤의학교 최보결 대표가 발제자로 참여하여 춤예술을 일상과 접목시킨 커뮤니티댄스를 설명하고 현장의 사례를 소개했다. 영국의 현대아랍문화축제인 슈빡(The Festival Shubbak)의 억하드 디에만(Eckhard Thiemann) 예술감독의 발제는 현대춤 조류를 소개하는 측면에서도 미흡했고, 주제와 관련한 춤동향은 영국의 어느 한 단체를 제외하곤 사실상 전무한 편이어서 아쉬움을 크게 남겼다.
한국춤비평가협회가 발행하는 월간 〈춤웹진〉에서 무용 전문기자로 활동 중이다. 창작과 수용 과정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가치에 주목하여 무용인 인터뷰를 포함해 춤 현장을 취재한 글을 쓴다. 현재 한예종에서 무용이론 강의를 병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