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 현장
태초에 문명이 발생하기 전 인간은 자연과 어떻게 교감했을까?
제주의 온갖 돌들이 오름을 보듬고 늘어서 있는 제주돌문화공원은 언제 오더라도 자연이 그대로 살아 숨 쉰다. 기괴한 형상의 돌들이 제주의 바람과 안개 그리고 찬란한 햇살과 만나면 그 광채는 각양각색으로 변한다.
“가장 순수하고 솔직한 몸짓”을 표방한 즉흥춤. 몇 년 전부터 제주돌문화공원과 즉흥의 궁합은 그래서 늘 호기심의 대상이다. '생태 즉흥'을 표방한 제주돌문화공원에서 열린 제주국제즉흥춤축제(5월 30일)는 올해로 세 번째이지만 매해 춤추는 공간과 아티스트들이 바뀐다. 그 때문인지 꽤 익숙한 돌의 형상과 그 주변은 즉흥춤 공연 때마다 시시각각으로 변한다. 댄서들이 춤추고 연주하면 정지되어 있던 돌들이 살아 춤추고, 그 주변 자연은 숨결이 바뀐다.
때론 움직이는 동체로, 때론 정지된 지체와 만나는 돌과의 대화, 나무와 풀들을 둘러싼 무언의 몸짓, 하늘연못 속에서 정지와 멈춤을 반복하는 댄서들의 육체는 카메라 앵글 속에서도 강렬하다. 느릿느릿하면서도 선명한 댄서들의 몸짓과 다양한 음악과의 조우는 공원 관람객에서 공연 관객들로 변신한 사람들에게 각기 다른 감흥과 상념들을 남긴다.
제주의 돌탑을 배경으로 춤 춘 스페인의 Luda Vazquez Madrid와 일본 무용수 Nobuyoshi Asai. 이들의 움직임은 마치 우주 가운데에서 무중력 상태의 몸짓을 보는 것 같았다. 느리면서도 가벼운 두 사람의 몸 이야기는 검은 현무암 돌덩이를 인생의 축소판으로 변신시켰다.
그린 컬러가 완연한 큰 나무 아래에서 춤춘 Hisashi Watanabe(일본)는 김효숙(가야금)의 가야금 연주에 맞춰 온몸의 촉각과 균형감각으로 주변을 감동시켰다. 그가 만들어내는 아크로바틱한 즉흥적 움직임은 앞의 댄서들이 풀어낸 것과는 확실하게 다른 매력을 선사했다. 불가능할 것 같은 형태를 조율해내는 그의 신체는 인간에 대한 경외감까지 들게 한다. 강혜련댄스프로젝트의 네 명 댄서와 한 명 연주자 역시 숲속 길 나무에 빨려 들어가는 듯한 몸의 변주로 서로가 서로에게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제주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이 모인 나무꽃의 무대는 서양과 동양의 악기와 소리 그리고 춤을 공유했다. 긴 천을 휘두르며 상생을 기원하는 할망도리(신과 인간의 다리)를 주제로 “천상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를 이어지게 하는 다리”를 표현했다.
공연의 마지막은 하늘 연못.
기타리스트 Mike Nord, 은숙의 소리, 콘트라베이시스트 박수현, 하민경의 타악이 만들어내는 즉흥 연주와 15명 댄서들의 춤은 물이 하늘이고 하늘이 물인 ‘하늘연못’을 ‘예술’로 적셨다. 그들의 뒤로 보이는 제주의 하늘과 오름도 어느새 함께 춤추고 노래하고 있었다.
해가 지고 밤이 찾아온 제주돌문화공원 오백장군갤러리 소극장. 조명 빛과 만난 즉흥공연은 한낮 제주돌문화공원에서의 춤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신체와 신체가 만나면서 빚어내는 접촉즉흥 공연은 댄서들의 순발력이 만들어내는 즉흥성과 우연성만으로도 관객들을 흥분시켰다.
제주돌문화공원에서 펼쳐진 즉흥춤 공연이 제주의 자연 생태를 배경으로 했다면 6월 2일 해질녘에 열린 서귀포국제무용제는 또 달랐다.
태풍으로 지붕이 날아간 서귀포의 오래된 옛 영화관(서귀포관광극장) 건물이 그대로 보존된, 세월의 흐름을 보듬은 공간에서의 춤은 더 육감적이고 때론 더 고혹적이었다. 관객들의 면면은 즉흥춤 공연 때와는 달랐지만 춤과 자연, 그리고 공간이 함께 어우러진 풍광은 기존 춤 공연장과는 완연하게 달랐다.
중국 Lin Jia Xi의
그 중에서도 Makoto Matshima와 Mike Nord가 협연한 공연은 최고였다. 그들의 무대는 흡입력이 대단했다. ‘교감’이라는 단어가 막 연상되던 순간 마코토의 손짓과 표정은 관객뿐만이 아닌 사물들을 끌어들이고 있었다. 자연의 소리가 즉흥으로 들어온 것이다. 하늘을 날고 있던 새들이 저 시선 멀리에 앉아 Makoto와 교감하며 노래하고 있었다.
육지와 세계 여러 나라의 아티스트들이 참여하는 국제적인 공연은 제주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에게도 큰 자극이 된다. 다른 지역에 비해 활동과 지원이 부족한 제주에서 몇 년 사이 춤을 대중적으로 한걸음 다다갈 수 있도록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나무꽃의 저력도 나를 놀라게 했다.
서귀포국제무용제에서 제주에 거주하는 무용가 박연술과 한정수의 춤은 동서양의 라이브 연주를 곁들여 해질녘의 제주를 아름답게 장식했다. 제주돌문화공원에서의 즉흥 공연과는 다르게 매 공연마다 새로운 형식과 내용으로 공연을 만들어 내는 창의성이 더욱 빛났다.
새로 생겨나는 공연은 이들 제주의 토박이 예술가들에게도 그들의 잠재된 예술성을 끄집어내는 통로가 되고 있었다. 무용의 불모지나 다름없는 제주에서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편성된 이같은 국제 규모의 공연들은 앞으로 국제도시로서의 제주의 경쟁력을 키우는 자양분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