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 현장
극단 자갈치 마당극 50주년 기념 공연이자, 민족음악인 최태현 선생의 우리음악 50년 기념 헌정 마당극인 〈신새벽 술을 토하고 없는 길을 떠나다〉가 올여름 7월 14일 낮 신명천지소극장(부산 부곡동)에서 극단 자갈치와 민족미학연구소 주관으로 펼쳐졌다. 이 작품은 1996년 5월 17일 경주 분황사 앞 황룡사지 야외무대에서 ‘원효문예대제전’의 일환으로 처음 연행되었던 것으로, 앞서 지난 6월 27~29일 사흘간 신명천지 소극장에서 공연되었다. 당시 3일간의 공연이 매진되어 미처 보지 못한 관객들을 위하여 다시 판을 벌인 것이다.
홍순연 대표(극단 자갈치)는 마당극 운동 50주년이 되는 해를 맞이하여 “마당극이며, 운동이며, 반백 년의 세월 속에 없는 길을 찾아 떠나오신 선생님, 선후배님들께 바치는 감사의 인사이며 앞으로 반백 년의 길은 어떠한 길일지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보는 공연이고자 하는 마음에 28년 만에 새롭게 꾸며 올렸다”고 한다. 총연출 채희완 민족미학연구소 소장은 28년 전 서울 두레마당에서 올릴 때 쓴 연출 이야기를 통해 당시의 마음 떨림을 표현하였다. “원효 스님의 말씀과 행적을 더듬더듬, 더듬어가면서... 스스로 몸을 낮추시고 떨거지 광대길을 너울, 춤추며 가시는 춤꾼의 뒷모습을 아련히 그려보았다... 스스로 민중으로 살아가는 초라한 뒷모습에 우리는 광대의 길, 오늘 이 땅의 진정한 예술가상을 그려보았다. 무애가무행 - 바닥의 것이 거룩함을 일깨우는 다함 없는 구도의 길, 작품을 이루어가는 과정은 그 자체가 서툰 발길로 신새벽에 떠나는 배움의 길이었다.” 이번 작품은 천여 년 전 원효 스님의 무애가무행, 마당극의 정신과 원리, 진정한 예술가상을 한마당에 모아 새롭게 변용, 생성한 고도의 상징성을 지닌 작품이다.
극단 자갈치 〈신새벽 술을 토하고 없는 길을 떠나다〉 ⓒ극단 자갈치 |
프롤로그는 ‘신새벽 무애가무행(無碍歌舞行)’이다. 화엄경의 일중일체다즉일(一中一切多卽一)이다. 하나 속에 일체가, 일체 속에 하나가 있다. 하나(원효의 무애가무행)이면서 일체(이후 극 전개)를 상징적인 춤과 노래로 표현한 노래굿이다. 범종 소리와 물소리가 잔잔히 울리는 가운데 어둠 속에 춤꾼들이 자리잡고, 서로 등을 지고, 몸을 엮고, 바닥을 뒹군다. 어둠은 무명이다. 무명의 중생이 분별심에 사로잡혀 번민 속에 허덕인다. 사성제(四聖諦)의 고집(괴로움과 집착)이다. 춤꾼 한 명이 물구나무서기를 하고 주위로 춤꾼들이 모여 손을 뻗어 탑을 만든다. 탑은 서원이다. 서원은 득도이다. 원효 스님은 당나라로 유학가고자 하였다. 그러나 도중에 동굴 속에서 깨달음을 얻는다. 유학 대신 중생교화를 위한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것이 물구나무서기로 형상화되었다.
이어서 ‘관세음보살’(작곡 최태현, 작사 채희완) 노래에 맞춰 춤꾼들은 반가부좌상을 하기도 하고 함께 어디론가 향한다. 원효 스님이 민중들 속에서 나무아미타불을 염송하며, 함께 춤추었던 무애가무행을 암시한다. 뇌성(雷聲)과 함께 탈꾼들이 등장한다. 앞선 장면이 무애가무행의 암시라면, 이어지는 장면은 무애가무행의 실천이다. 원효 스님의 무애가무행을 17, 18세기로 가져와 보면, 민중과 더불어 탈춤을 추고 삶의 애환과 기쁨을 나누며, 그들과 함께 열반으로 나아갔을 것이다. ‘산다는 거’(작곡 최태현, 작사 채희완)에 맞춰 춤꾼들은 부처님 손자세 모양인 수인(手印)을 하며 퇴장하고, 탈꾼들이 춤을 춘다.
처음에는 느린 장단으로 춤춘다. 삶의 괴로움이다. 석가모니는 생로병사의 괴로움을 보고 출가하셨다. 괴로움을 겪는 이는 거기에서 벗어나길 원한다. 그리하여 탈꾼들은 어디론가 향하는 몸짓을 한다. 장단이 점차 빨라진다. 판소리에서는 곡조와 상황이 조화를 이루고, 때로는 곡조와 상황의 부조화를 이룬다. 이처럼 노랫말은 삶과 죽음이 모두 괴롭다고 하지만, 춤은 빠른 장단에 힘찬 몸짓으로 나아간다. 노랫말과 몸짓이 다른 방향으로 달려가면서 묘한 균형을 이룬다. 모순된 것의 일치이다. 마당극의 미적 원리이자 시인 김지하의 ‘흰 그늘의 미학’적 표현이다.
극단 자갈치 〈신새벽 술을 토하고 없는 길을 떠나다〉 ⓒ극단 자갈치 |
첫째 마당은 ‘선재(정승환 역)를 찾아서’이다. 곽암의 〈십우도〉(十牛圖) 중 심우(尋牛)와 견적(見跡)이다. 이 마당의 사건 전개 양상은 신도회장(홍순연 역)의 등장을 경계로 두 장면으로 나뉜다. 첫 장면은 ‘찾기(심우)’이고 두 번째 장면은 ‘점안식 준비(견적)’이다. 황 처사(서원오 역)의 자전거 타기는 바퀴 굴리기 즉 극의 시작이다. 공양주(이혜영 역)와 스님(정승천 역)이 등장하여 선재를 찾는다. 소(牛) 부인(박은주 역)은 소 주인(유용문 역)을, 소 주인은 소를 찾는다. 찾는 대상은 제각각 다르지만, 모두 다 삶의 소중한 것들이다. 소는 진리의 표상이다. 불가에서는 진리가 먼 곳에 있지 않다. 일상에서 접하는 소중한 것들이 모두 진리이다. 그래서 심우이다. 신도회장의 등장으로 시작된 점안식 소식 얘기가 끝난 다음, 황 처사가 등장한다. 황 처사는 소 울음소리를 듣고는 선재의 위치를 알아낸다. 소 발자국을 본 것이다. 그래서 견적이다.
인물들은 보살과 중생으로 배치되어 있다. 공양주와 스님, 황 처사는 보살이다. 공양주는 생명 모심(잉태)과 키움(선재 돌봄)과 떠받듦(황 처사의 저녁 공양)의 보살이다. 고시생(손재서 역), 미스터 리(전성호 역), 소 주인, 소 부인 등이 등장하여 대화를 나눌 때 한쪽에서 가만히 그 얘기를 들으며 다양한 몸짓을 한다. 얘기를 들으니 관세음보살이다. 다양한 몸짓은 부처님의 수인이다. 공양주는 천수보살이다. 스님은 ‘불이’(不二)의 보살이다. 스님은 절집도 사람 사는 곳이라고 말하며, 소 주인이 와서 고시생, 미스터 리와 함께 떠드는 것을 시끌벅적하니 사람 사는 곳 같아 좋다고 한다. 사찰은 진계, 사람 사는 곳은 속계이다. 진계와 속계를 나누는 것은 분별지다. 그러나 스님은 그러한 분별지를 뛰어넘고 있다. 유마경에 나온 ‘불이’다. 원효 스님의 ‘일심’이다. 불이와 일심은 진속일여(眞俗一如)다.
황 처사는 천안보살이다. 선재가 어디 있는지를 안다. 어디 있는지를 아는 것은 선재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아픔을 지니고 있는지를 아는 것과 같다. 공양주는 황 처사에게 상을 차려 높이 들어 바친다. ‘거안제미’(擧案齊眉)이다. 거안제미(밥상을 들어 눈썹에 맞추다)는 모심이다. 즉 하심(下心)이다. 보살은 모심의 대상이자 모심의 주체이다. 황 처사와 공양주는 서로 모시면서 모심을 받는 보살이다. 황 처사는 장애의 몸짓을 벗어나 자유자재의 춤을 춘다. 얽매임에서 벗어나 해탈로 나아간다. 황 처사는 자유자재한 존재인 보살이다. 이에 반해 학승(이명우 역)과 신도회장, 소 주인, 소 부인, 고시생, 미스터 리는 중생이다. 중생은 무명으로 인한 분별심을 지닌 존재이다. 학승과 신도회장에게 사찰은 깨끗하고, 조용한 곳이어야 한다. 고시생, 미스터 리, 소 주인, 소 부인처럼 세속의 때를 묻혀와서는 안 되는 곳이다.
원효 스님의 일심은 공 사상이다. 반야심경에는 ‘제법공상(諸法空相)은 불구부정(不垢不淨)’-모든 법의 모양은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다-이라고 했다. 더러움과 깨끗함을 분별할 수 없다. 학승과 신도회장은 분별하는 중생이다. 또한 중생은 삼독 즉 탐진치(貪瞋癡)에 물든 존재이다. 소 주인은 소를, 소 부인은 소 주인을 찾는다. 찾는 과정에서 절 사람들이 선재를 찾는 것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자기들의 욕망에만 신경쓴다. 그리고 사찰을 찾는 사람들이 마을에 피해를 준다고 성낸다. 삼독 중 ‘탐’과 ‘진’에 집착하는 중생이다. 고시생은 검사 지망생이다. 연줄 찾아 출세하기를 바라는 헛된 욕망을 갖고 있다. 미스터 리는 황 처사와 스님이 선재를 찾으려고 아랫마실로 내려간 걸 두고 심심해서 놀러간 거 아니냐고 말한다. 삼독 중 ‘치’에 빠진 중생이다.
재담은 비장과 해학의 얽힘이다. 진지함과 가벼움, 애잔함과 웃음이 각자의 몫을 하면서 둘은 통합되어 있다. 절 식구들이 사라진 선재를 찾는 것은 애잔함과 슬픔과 안타까움이 배어 있는 절박한 일이다. 이러한 선재 찾기의 비장함과 소 주인, 소 부인, 고시생, 미스터 리의 익살스러움이 교차 공존하고 있다. 또한 그들은 대구와 운율 등 전통 탈춤의 표현 방식들을 활용하고, 유행가 가사를 가져와서 웃음을 유발하여 판을 출렁이게 한다. 판소리로 보면 긴장과 이완의 반복이다. 또한 고시생의 “마당극합니더”라는 말이 관객으로 하여금 이곳이 극중 장소이자 공연 장소임을 느끼게 한다. 극중 몰입의 차단이다. 그리고 소 부인은 관객들을 향해 질문을 던짐으로써 그들을 극중으로 끌어들인다. 관객과 배우, 경계를 일순간 허물어뜨린다. 경계 무너뜨리기는 원효의 일심과도 통한다.
극단 자갈치 〈신새벽 술을 토하고 없는 길을 떠나다〉 ⓒ극단 자갈치 |
둘째 마당은 ‘나는 없다’이다. 금강경의 ‘약보살 유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 즉비보살’(若菩薩 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 卽非菩薩)이다. ‘비옵니다’(작곡 최태현, 작사 채희완)의 노래에 맞춰 아이들(김선이, 김여진, 박소희, 궁다빈, 이제형 역)이 절로 소풍을 온다. 수행의 공간인 사찰이 아이들의 소풍 장소이다. 수행과 생활이 둘이 아닌 하나다. 엄지(김선이 역)는 선재에게 함께 보물찾기를 하자고 한다. 엄마인 신도회장은 선재와 엄지를 분별하나 어린아이인 엄지는 자신과 선재를 분별하지 않는다. 어린아이야말로 일심의 화신이다. 타종 소리와 함께 점안식 거행을 알리는 방송이 들려온다. 곧이어 등장한 고시생, 미스터 리, 스님, 학승이 재담을 주고받는다. 곽암 선사의 십우도 중 인우구망(人牛具忘),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원효 스님의 원융회통(圓融會通) 등을 말한다. 여기서는 미스터 리도 무애가무행을 말하고, 운동과 비운동이 둘이 아닌 하나임을 얘기한다. 해골물 마시고 토하는 것이나 술 먹고 토하는 것이나 다 토하는 것이라 한다. 이러한 대화가 금강경의 한 구절을 연상케 한다. ‘만약 보살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얽매이면 보살이 아니다.’ 앞에서는 중생의 모습이 도드라졌던 미스터 리와 고시생이 여기서는 보살이다. 수행승과 세속인의 구별이 없어진다. 열반경의 ‘일체중생(一切衆生) 실유불성(悉有佛性)’이다. 중생이 보살이다. 분별상이 사라진다. 그래서 금강경의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 즉견여래(卽見如來)’이다. 모든 상이 상이 아님을 보게 되면 즉시 여래를 보게 된다. 신도회장이 나타나 미륵불상에 점안해야 할 큰스님이 나오지 않는다고 걱정한다. 학승은 “깨달음의 뜻도 크시지만 중생제도는 언제 누가 하라는 겁니까?”라고 깨달음과 중생제도를 분별하는 큰스님의 처사에 불만을 드러낸다. 이 순간에는 학승 또한 보살이다. 곧이어 신도회장의 칭찬과 권유 속에 점안하겠다고 나선다. 다시 상에 집착하고 있는 중생이다. 이처럼 중생과 보살은 한 존재 안에서도 끊임없이 변화하며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중생과 보살은 넘나든다. 제법무아(諸法無我), 제행무상(諸行無常)이다.
극단 자갈치 〈신새벽 술을 토하고 없는 길을 떠나다〉 ⓒ극단 자갈치 |
셋째 마당은 ‘산다는 거’이다. 십우도의 ‘견우’(見牛)이다. ‘우리 어머니 계신 곳’(작곡 최태현, 작사 채희완)의 노래가 들리고, 보물찾기하는 아이들이 등장한다. 아이들이 찾은 보물은 호로병박, 사진, 선재의 일기장이다. 아이들은 그것들을 통해 선재가 엄마와 헤어져 절에서 살고, 공양주 보살을 엄마보다 더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어 등장하는 또 다른 아이가 소가 폭포수 밑에서 물장구친다고 말한다. 때묻지 않은 청정한 마음을 지닌 아이들이기에 선재의 소망과 소를 발견할 수 있다. 문자 그대로의 의미인 ‘견우’, 즉 소를 봤다. 스님은 아이들에게 숨바꼭질하며 선재를 찾자고 한다. 선재를 찾고자 하는 마음에 집착하지 않으면서 마음을 내는 것이다. 금강경의 ‘응무소주(應無所住) 이생기심(以生起心)’-응하여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는 것-이다. 아이들은 스님에게 무애가무행에 대해 가르쳐달라 한다. 거리에서 춤추었다고 하니 아이들은 요즘 스트릿댄스 같은 것이냐고 하면서 안으로 집중되는 진중함을 밖으로의 유쾌함으로 전환시킨다. 이어 스님과 아이들이 함께 ’무애가무행‘을 진지하면서도 유쾌한 몸짓으로 풀어낸다. 발산에서 수렴으로의 회귀이다. 스님은 무애가무를 통해 원효 스님이 열반이 먼 곳이 아닌 궁중과 기와집, 저잣거리이고, 남녀노소 모두가 부처임을 가르쳤다고 한다. 임제 선사의 ‘수처작주(隨處作主) 입처개진(立處皆眞)’-어디를 가든지 그곳에서 주인이 되면 서 있는 그곳이 곧 진리가 되리라-이다. 아이들과 스님은 ‘살고지고 아미타불’(작곡 최태현, 작사 채희완) 노래를 부르며, 함께 ‘무애가무’를 춘다. 스님의 “아무 데도 걸림 없는 사람은 죽고 사는 데서 한길로 벗어나도다-일체무애인(一切無碍人) 일도출생사(一道出生死)”라는 외침은 원효 스님의 춤이 수행의 방편임을 알려준다. 아이가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고 말하자, 스님은 “뜻을 알고 춤추는 것도 그리 춤추는 것이요, 춤추다가 뜻을 아는 것도 그리 춤추는 것일지니”라고 답한다. 앎과 수행, 원효 스님의 춤과 민중의 춤이 서로 다르지 않다. 그래서 일심(一心)의 춤이다. 원효 스님의 무애의 깨우침이 춤을 통해 민중으로 나아가고, 민중의 춤이 다시 원효 스님의 깨달음으로 이어진다. 그러기에 ‘자타일시성불도’(自他一時成佛道)-너와 내가 동시에 깨달음을 이룬다의 회통(會通)의 춤이다.
아이들이 학예제에서 했던 율동과 선무도를 점안식 현장에서 축하 무대로 보여준다. 축하 무대가 시작되자 마당극의 관객은 축하 무대의 관객으로 변용된다. 들뢰즈식 표현으로 관객들이 마당극에서 이탈하여 점안식으로 재배치된 것이다. 또 하나의 현장성을 지니면서, 중층 구조를 이룬다. ‘봉우리’(김민기 작사, 작곡) 노래에 맞춰 아이들이 율동을 시작한다. 노랫말에는 고된 일상에 지친 민중의 삶이 담겨 있다. 천수보살상을 만드는 아이들의 율동이 그들을 위로하는 듯하다. 선무도는 자신의 본래면목을 관하는 위빠사나 수행법의 하나이다. 본래면목은 불성이다. 불성을 깨닫는 순간 삶의 고뇌로부터 해탈할 수 있다. 아이들은 석탑을 만든다. 스님은 “누가 탑을 들어올릴 수 있을까요” 질문을 던진다. 관객들은 그 순간 극 속에 더욱 몰입한다. 실내 마당극은 관객들의 몰입을 더욱 강화시킨다. 아이들은 물구나무서기 탑을 만든다. 물구나무서기는 발상의 전환이자 사고의 전환이다. 귀족불교에서 민중불교로의 나아감이다. 또한 이는 천상의 거룩함과 바닥의 더러움이란 분별지의 무명 상태가 바닥의 거룩함이란 일심으로 바뀌었음을 상징한다. 반야심경의 ‘원리전도몽상’(遠離顚倒夢想)-뒤바뀐 헛된 생각으로부터 벗어남-이다. 물구나무서기를 거꾸로 보면 허공에 발을 딛고 두 손으로 지구를 번쩍 들어올린 모양이다. 허공, 즉 없는 길에서 새로운 길을 만드니, 무에서 생성으로 나아감이다. 무는 공이다. 공은 끊임없이 새로운 존재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창조의 원천이다. 스님은 허공에 탑을 쌓아 올렸고, 지구도, 나아가 삼라만상의 우주까지 들어올렸다고 말한다. 원효 스님의 무애가무행(무에서 생성으로의 여정)이 이제 수행의 길, 중생 교화의 길을 넘어 예토(穢土)를 정토(淨土)로, 세속을 열반으로 만드는 세상 변혁의 길이 된다. 나아가 지구와 우주를 들어올렸으니 후천개벽이다. 즉 오늘날 전쟁, 생태 위기 등의 전 인류적, 전 지구적 위기 속에 새로운 대동 세상, 생명 존중의 세상을 꿈꾸고 실현하기 위한 개벽의 가르침이다. 인간과 자연, 인간과 비인간을 구별하는 이성중심적 사고(분별적 사고, 이원론적 사고)가 오늘날 위기의 한 원인이라고 한다면, 원효 스님의 무애, 일심, 화쟁, 회통은 그러한 위기를 돌파해 낼 수 있는 개벽 사상이다. 실내 마당극은 야외와 달리 메시지에 대한 집중성을 높인다. 스님의 묻고 답하는 말을 통해 관객들은 극의 메시지를 저마다 해석하고 그것을 마음에 품고는 일상으로 돌아가게 된다. 극을 통한 새로운 공동체 의식을 갖게 된다.
뇌성이 터지고, 아이들과 스님은 미륵불상 위에 올라간 선재를 본다. 소 주인은 달려들어 소를, 소 부인은 소주인을 찾았다고 말한다. 모두가 찾고자 하는 것을 한순간, 한 장소에서 발견한다. 십우도의 ‘견우’(見牛)이다. 각자의 진리를 발견한 것이다. 선재가 점안한다. 점안은 무명 세상에 진리의 빛을 던지는 거룩한 행위이다. 선재는 엄마 잃은 어린아이, 고뇌를 안은 중생이다. 덕이 높은 스님이 점안하는 것이 아니라 바닥인 중생이 점안한다. 중생이 부처이다. 원효의 일심(一心)이다. 뒤이어 등장한 공양주는 점안이라 말하며 합장하고, 고시생, 미스터 리, 신도회장은 선재의 행동을 사고친 것이라 여긴다. 점안(거룩함)과 사고(불결함)가 다르지 않다. 수운의 ‘불연기연’(不然其然)이다. 원효의 ‘화쟁’(和諍)이다. 선재는 불상에서 떨어진다. 선재의 다른 여정이 기다린다.
극단 자갈치 〈신새벽 술을 토하고 없는 길을 떠나다〉 ⓒ극단 자갈치 |
넷째 마당은 ‘없는 길 떠나다’이다. 십우도의 ‘입전수수’(入廛垂手)이다. 황 처사와 선재가 등장하여 대화를 나눈다. 화엄경에 선재가 선지식을 만나 진리를 구하는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선재는 미륵불상에 올라간 것이 없는 길 찾기 위해서이고, 불상이 자기 집이라고 말한다. 선재에게는 출세간이 세간이다. 황 처사는 집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집이 없는 것도 아니라고 대답한다. ‘있다’와 ‘없다’를 분별하지 않는다. 황 처사야말로 일심의 부처이다. 선재는 없는 길 떠나, 엄마도 찾고 사이클 선수가 되고자 한다. 없는 길은 임제 선사의 ‘살불살조’(殺佛殺祖)-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인다-이다. 자등명(自燈明) 법등명(法燈明)이다. 타자에 의존하지 않는 자유자재한 깨달음의 추구이다. 엄마는 ‘진리’이다. 사이클은 ‘법륜’이다.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후 옛 동료였던 다섯 수행자를 만나 처음으로 법을 전하는 초전법륜(初轉法輪)과 닿아 있다. 떠남은 진리 구도의 길이자 중생교화의 길이다. 상구보리(上求菩提)-위로 깨달음을 추구하다-이자 하화중생(下化衆生)-아래로 중생을 교화한다-이다. 연등을 든 공양주가 ‘없는 길 떠나다’(작곡 최태현, 작사 채희완)를 부르며 한 바퀴 돌고, 퇴장한다. 선재가 자전거를 타고 황 처사가 이를 바라본다. 원효 스님의 무애가무행이다. 연등(법등) 즉 깨달음과 자전거 타기(법륜 굴리기)가 다르지 않다. 무애가무행은 수행의 길이자 중생제도(衆生濟度)의 길이다. 십우도의 ‘입전수수’-가게에 들어가 손을 드리우다-이다. 중생 교화를 위해 저잣거리로 나아간다. 연등을 들고 배우들이 등장하여 관객들에게 인사한다. 커튼콜이다. 연등을 든 배우들의 인사와 모든 관객들과 함께하는 사진 촬영이 예사롭지 않다. 회향(廻向)-돌려서 향하다-이다. 자신이 닦은 선근과 공덕과 깨달음을 중생들과 함께 나눈다. 원효 스님의 무애가무행에 담긴 이곳(차안·此岸)에서, 중생(민중)들과 열반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뜻을 관객들과 함께 나누고자 한다. 회향은 끝이 아닌 시작이다. 원효 스님의 가르침도, 마당극도 계속 이어지기를 바란다.
극단 자갈치 〈신새벽 술을 토하고 없는 길을 떠나다〉 ⓒ극단 자갈치 |
이번 작품에서 마당극과 불교가 ‘무애가무행’을 통해 만났다. 들뢰즈는 차이가 변용을 낳고, 변용이 생성을 이룬다고 하였다. 이에 반해 마당은 차이마저 안은 만남과 어울림을 통해 새로운 생성을 만든다. 원효 스님의 ‘화쟁’이다. 마당극은 한과 신명, 비장과 골계, 배우와 관객, 갈등과 화해, 발산과 수렴, 집중과 확산 등 서로 모순된 것이 어우러져 있다. 각자가 자기의 역할을 하면서 통합되어 있다. 이는 불교의 공 사상과 닿아 있다.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이다. 색이 공이요, 공이 색이다. 화엄경에서 말하는 불수자성수연성(不守自性隨然成)이다. 고정된 자성을 지니지 않고 12연기에 의해 공이 다양한 색으로 표출된다. 마당극의 원리 또한 공이다. 마당이냐 실내냐 현장이냐 무대냐, 공동체적 유대성이 강한 관객이냐 약한 관객이냐 등 즉 조건(연기)에 따라 마당극은 다양하게 나타난다. 마당과 현장에서는 발산과 확산, 감정 표출 등이 강하게 드러나는 반면, 실내와 무대에서는 수렴과 집중, 감정 절제 등이 도드라진다. 그렇다고 해서 상반된 것이 제거되어 사라지진 않는다. 단지 그 강도가 약할 뿐이다. 마당극의 변화와 발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주변의 연기(緣起: 원인과 조건)를 어떻게 만들어가느냐가 중요하다. 불교와 마당극, 종교와 예술의 만남을 계기로 마당극의 원리를 다시금 곱씹어보게 되고, 앞으로의 마당극이 지향해야 할 방향이 ‘없는 길을 향해 나아감’임을 되새기게 된다. 고도의 상징성을 지닌 이번 작품은 그 의미가 일의적이지 않고 다의적이다. 공(空)이다. 불교적 사유가 낯선 사람들은 작품을 이해하기 어려워했다. 법성게(法性偈)의 우보익생만허공(雨寶益生滿虛空), 중생수기득이익(衆生隨器得利益)-비 같은 보배로운 진리가 온 허공을 가득 채울 것이다. 그러면 중생들은 자기의 그릇에 따라 깨달음의 이익을 얻어가리라-이다. 공연을 본 사람들은 각자의 근기에 따라 그 의미를 해석하고, 감동받았을 것이다. 회향(廻向)
서성준
국문학을 전공하고 탈춤패 활동을 통해 수영야류, 고성오광대 등 영남 지역 탈춤을 전수하였다. 극단 활동에서 마당굿 운동을 펼쳤다. 현재 민족미학연구소 이사와 극단 자갈치 이사. 창작탈춤패 지기금지의 악사로서 생명문화 운동에 힘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