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 현장
2017 대구아시아무용축제(DACDF)
동아시아 춤의 성찬, 썰렁한 객석
권옥희_춤비평가
대구문화예술회관(관장 최현묵)이 주최 주관한 ‘대구아시아 무용축제’(10월 11-12 일, 대구문화예술회관 팔공홀).
“3개국 춤의 현재를 묻다”. 대구문화예술회관에서 발행하는 기관지 ‘대구문화’에 실린 ‘대구아시아 무용축제’ 관련 기사의 제목이다. 홍콩시현대무용단과 일본의 니가타시에 상주하는 현대무용단 ‘류토피아’ 그리고 대구시립현대무용의 작품을 한 무대에서 볼 수 있는, 꽤 흥미로운 기획이었으나 서울과 대구를 대표(?)한다는 무용단들의 무대는 아시아 세 도시에 상주하는 현대무용단의 교류공연이라는 의미와 충돌, 무게가 실리지 못한 축제로 그쳤다.
극장은 썰렁했고 관객의 반응 또한 심드렁했다. 9월과 10월 연이어 열린 ‘대구춤 페스티벌’ ‘대구동아시아 춤 축제’ ‘대구국제무용제’와 별반 다르지 않은 같은 내용의 프로그램에 대한 관객의 냉담한 반응, 당연했다. 고르지 않은 단체 선정과 작품의 질. 작품에 관계없이 거의 15분 길이의 작품을 여럿 한 무대에 올려 작품을 나열하는 것. 대구에서 열리는 무용축제의 특징이다. 극장을 찾는 관객의 수준을 무시한 처사다. 재고해봐야 한다.
‘시립현대무용단’이 상주하고 있는 대구문화예술회관이 아닌가. 문화예술회관만의 차별화된 프로그램이 필요한 이유이다. 아시아 세 도시에 상주하는 현대무용단의 작품을 한 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다는 좋은 기획의도에도 불구하고 늘 해오던 형식을 복사하듯 올린 춤 무대, 실망스러웠다. 3개국의 현대무용 교류라는 데 집중, 더 치밀한 기획이 이루어졌어야 했다.
개막작으로 무대에 오른 홍콩시현대무용단의 〈Amidst the Wind〉와 폐막작이었던 일본 현대무용단 ‘노이즘1-류토피아 레지던셜 댄스컴퍼니’의 〈NINA-materialize sacrifice〉, 그리고 대구시립무용단의 〈볼레로, 꽃, 코끼리를 보았다〉를 본다.
10월 11일, 개막작으로 무대에 오른 37년 역사의 홍콩시현대무용단(CCDC)의 〈Amidst the wind〉(예술감독 윌리 차오Willy Tsao). 홍콩이 중국 본토로 반환된 후 지난 20년간 Willy Tsao와 Helen Lai, Sang Jijia, Noel Pong, Dominic Wong 다섯 안무가의 작품 중 가장 인상적인 춤을 발췌, 14장의 이미지로 풀어놓은 작품은 춤의 홍수였다. 더구나 제목만 있는, 어떤 안무가의 작품을 보고 있는지 확인할 수 없는 팸플릿, 유감이었다.
검정색의 무대, 배경 막에 난 문을 통해 나온 14명의 무용수가 도열한 채, 웃는 것으로 시작하는 〈Escerpt from of colour fugue〉. 남녀 무용수의 듀오에 이어 10여명의 군무진의 춤, 또 다시 솔로, 듀오 군무로 이어지는 무대는 유쾌함으로 때로는 붉은 색 의상이 주는 강렬한 에너지로 종횡무진 무대를 누빈다.
“3개국 춤의 현재를 묻다”. 대구문화예술회관에서 발행하는 기관지 ‘대구문화’에 실린 ‘대구아시아 무용축제’ 관련 기사의 제목이다. 홍콩시현대무용단과 일본의 니가타시에 상주하는 현대무용단 ‘류토피아’ 그리고 대구시립현대무용의 작품을 한 무대에서 볼 수 있는, 꽤 흥미로운 기획이었으나 서울과 대구를 대표(?)한다는 무용단들의 무대는 아시아 세 도시에 상주하는 현대무용단의 교류공연이라는 의미와 충돌, 무게가 실리지 못한 축제로 그쳤다.
극장은 썰렁했고 관객의 반응 또한 심드렁했다. 9월과 10월 연이어 열린 ‘대구춤 페스티벌’ ‘대구동아시아 춤 축제’ ‘대구국제무용제’와 별반 다르지 않은 같은 내용의 프로그램에 대한 관객의 냉담한 반응, 당연했다. 고르지 않은 단체 선정과 작품의 질. 작품에 관계없이 거의 15분 길이의 작품을 여럿 한 무대에 올려 작품을 나열하는 것. 대구에서 열리는 무용축제의 특징이다. 극장을 찾는 관객의 수준을 무시한 처사다. 재고해봐야 한다.
‘시립현대무용단’이 상주하고 있는 대구문화예술회관이 아닌가. 문화예술회관만의 차별화된 프로그램이 필요한 이유이다. 아시아 세 도시에 상주하는 현대무용단의 작품을 한 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다는 좋은 기획의도에도 불구하고 늘 해오던 형식을 복사하듯 올린 춤 무대, 실망스러웠다. 3개국의 현대무용 교류라는 데 집중, 더 치밀한 기획이 이루어졌어야 했다.
개막작으로 무대에 오른 홍콩시현대무용단의 〈Amidst the Wind〉와 폐막작이었던 일본 현대무용단 ‘노이즘1-류토피아 레지던셜 댄스컴퍼니’의 〈NINA-materialize sacrifice〉, 그리고 대구시립무용단의 〈볼레로, 꽃, 코끼리를 보았다〉를 본다.
10월 11일, 개막작으로 무대에 오른 37년 역사의 홍콩시현대무용단(CCDC)의 〈Amidst the wind〉(예술감독 윌리 차오Willy Tsao). 홍콩이 중국 본토로 반환된 후 지난 20년간 Willy Tsao와 Helen Lai, Sang Jijia, Noel Pong, Dominic Wong 다섯 안무가의 작품 중 가장 인상적인 춤을 발췌, 14장의 이미지로 풀어놓은 작품은 춤의 홍수였다. 더구나 제목만 있는, 어떤 안무가의 작품을 보고 있는지 확인할 수 없는 팸플릿, 유감이었다.
검정색의 무대, 배경 막에 난 문을 통해 나온 14명의 무용수가 도열한 채, 웃는 것으로 시작하는 〈Escerpt from of colour fugue〉. 남녀 무용수의 듀오에 이어 10여명의 군무진의 춤, 또 다시 솔로, 듀오 군무로 이어지는 무대는 유쾌함으로 때로는 붉은 색 의상이 주는 강렬한 에너지로 종횡무진 무대를 누빈다.
우리나라 현대 춤과 닮은 춤 동작, 빠른 변환과정을 보여주는 춤은 단순하지만 이상하게 편안함을 준다. 평상복을 입은 세 명의 무용수가 추는 〈Excerpt from As if To Nothing〉. 여자 한명과 두 명의 남자무용수가 그려내는 갈등은 격렬하지도 세련되지도 감각적이지도 않은 춤이지만 우리 현대 춤에서 볼 수 없는 솔직하고 자연스러운 움직임으로 시선을 눈을 잡아두는 작품이었다.
그런가하면 홍콩의 색이 잘 드러난 〈Excerpt from in Search of the Grand View Garden〉. 파편화된 청조(淸朝)의 정조(情調)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이었다. 예술성을 탑재한 ‘홍콩’스러움. 독특했다. 전막 작품이 궁금했다. 바닥을 끄는 길이의 중국과 유럽풍이 섞인 디자인의 과장된 드레스를 입은 남녀가 연과 등, 부채 등의 소품을 들고 나른한 표정으로 느리게 무대를 걷는 춤. 가늘고 높은 음으로 쨍쨍 울리는 중국 전통 현악기(비파나 고쟁인 듯)가 내는 소리. 드레스 앞자락을 헤치자 드러나는 검정 레오타드와 짧은 팬츠. 20세기 초 수영복 같은 디자인의 민소매와 짧은 바지를 입고 서로 손을 잡고 원을 만들어 돌다가 이내 손을 놓고 팔을 들어 춤을 추며 원을 그리는 춤.
영화(榮華)로웠던 시간을 돌아보는 듯한 춤은 지극히 홍콩스러운 이색적인 작품이었다. 세기말 유럽의 문화가 섞여드는 독특한 청조의 인상, 중국(홍콩)의 정체성이 서서히 무너지는 것을 다소 퇴폐적인 나른한 정서로 아름답게 그려낸 춤, 인상적이었다.
홍콩인들만이 가지고 있는 정서. 일본과 한국도 마찬가지다. 누구도 아닌 자신들만이 그려낼 수 있는 땅의 독특한 기운과 정서에 안무자의 철학과 개성을 녹여낸 독자적인 작품은 곧 세계적인 작품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무대.
이어지는 〈... Blind chance 1,2〉 벽을 두드리는 동작 등의 전달이 미숙한 조명으로 그 의도가 잘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단순한 조명아래에서도 무용수의 자연스럽고 유려한 춤은 빛났다. 다소 거칠어 보이나 일부러 꾸미지 않아 억지가 없는 움직임이 이들 춤의 특징인 듯. 초록색 발레 튀튀의상에 운동화를 신은 남녀무용수가 그려내는 〈... Three Millennia 1,2〉. 군인들의 움직임을 연상시키는 각진 동작과 무대를 가로지르며 끊임없는 도약과 치렁치렁한 프릴이 달린 치마를 입은 남자무용수의 솔로. 차를 마시며 끊임없이 대화를 하는 〈... she says, He talks-Leaving & Living 1,2〉 에서의 남자무용수의 유려한 춤, 인상적이었다.
홍콩 안무자들의 작품에서 해방된 자의 여유로움을 본다. 섬세하고 치밀하게 춤을 조각하기 보다는 자연스럽고 유려한 움직임을 끌어내는데 신경을 쓴 작품이 많았다. 반면 의상과 조명의 설계(무대 환경 탓일 수도) 에 있어서는 세밀하게 신경을 기울이지 않아 춤이 날 것 그대로 무대에 드러나 보이는 등, 다소 거칠지만 자연스럽고 유려한 춤의 흐름이 한국과 일본의 춤과 다른 점이었다.
10월 19일, 대구시립무용단의 〈볼레로, 꽃, 코끼리를 보았다〉. 예술감독 홍승엽의 작품 중 인상적인 몇 장을 연결한 무대. 춤에 보이던 특유의 팽팽한 긴장미를 볼 수 없었던 무대. 같은 춤을 춘다고 그 춤이 항상 같은 것은 아닌 것이다.
통나무를 쪼개는 것으로 시작되는 ‘볼레로’ 여자무용수의 듀오, 움직임의 정교함은 여전하나 처음 작품에서 추던 그 춤의 에너지가 아니다. 이어 이어지는 ‘꽃’, 그리고 ‘코끼리를 보았다’ 또한 마찬가지. 홍승엽 감독 특유의 섬세하게 분절되는 동작아 주는 선명함. 그 서늘한 에너지가 보이지 않는다.
‘호랑이 콧등...’의 한 장을 가져온 ‘꽃’, 7명의 무용수들이 추는 춤. 몇 해가 지난 작품인데도 세련된 의상과 움직임, 홍승엽이 가지고 있는 세련된 감각이다. 회색의 짧은 반바지에 같은 색의 민소매. 침착한 움직임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모든 움직임의 정수가 어디로 집약될지.
아름다운 사유의 형태, 철제로 된 물체를 두드리는 것 같은 소리가 들리면서 엉겨있던 무용수들이 풀어지며 펼쳐지는 11명의 군무. 철저하게 계산된 형태와 움직임에서 고집스러운 춤의 정신, 소리를 움직임으로 어떻게 보여줄 수 있는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코끼리를 보았다〉의 2,3,4장.
세 부분으로 나눠진 무대, 양 쪽으로는 오래된 카펫색의 바닥재 위에 듬성듬성 놓인 벽돌. 오래된 사유, 습관으로 해석해도 무방할 듯. 무용수들이 가운데 부분을 오케스트라 박스 쪽으로 말아 무대 가운데를 비워낸다. 비워진 사유의 틀, 무용수들이 런웨이를 걷듯, 당당하고 아름다운 걸음으로 들어온다. 양 옆에 놓여있던 바닥재를 마저 걷히며 옆으로 밀린다. 섬광 같이 반복적으로 번쩍이는 조명아래 6명의 여자무용수가 춤. 무대를 돌아다니는 발뒤꿈치 내내 들려있다.
몇 달 전 같은 무대에서 ‘코끼리를 보았다’ 2장(?)을 본 적이 있다. 그 때 본 그 서늘하게 아름다웠던 춤의 에너지가 없다. 극히 절제되고 정제된 빈틈없이 움직이던 춤(몸)에서 발산되던 그 ‘서늘’한 아름다운 기운, 흔적도 없다. 어렵다. 귀신을 부리는 것이 나을 듯.
‘꽃’이 추어지기 전 무대의 연결을 위해 배치한 〈아Q〉. 안무자 홍승엽 감독의 재능을 다시 확인한다. 검정색 의상 등에 붉은 색 꽃 한 송이가 꽂힌 남자와 같이 추는 검정색 의상의 두 남자가 보여주는 춤. 남자의 등 뒤에 꽂힌(꽂은) 꽃. 다른 두 남자에 의해 들어 올렸다 내려지는 자신의 몸(위치), 강제로 피우게 되는 담배에서 피어오르는 연기, 여기에 흐르는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부르는 나훈아의 〈갈무리〉, “내가 왜 이런지 몰라, 도대체 왜 이런지 몰라...” 허를 찌르는 위트, 최고다.
자리에서 멀리 벗어난 이가 무대에 남아있는 흔적을 파악해내는 지혜와 무대에 사는 자가 그 열망의 흔적을 마침내 다 지우려는 집착이 동일한 것으로 추어진다. 예민하게 파악하는 자는 예민한 것을 지우며, 예민하게 지우는 자는 예민하게 집착한다. 이 집착과 집착되는 예민한 것들은 해방의 장애일 뿐만 아니라 그 지표가 된다. 무심하게 무대에 툭 던져놓은 〈아Q〉, 답답한 무대 위로 재치 있게 날았다.
설렁한 객석, 안타까웠다. 예술감독과 무대에 선 무용단원들이 받을 대접이 아니었다. 복잡하고 미묘한 대구 춤의 정치(정서). 어쨌든 프로무용수들이 가져야할 무대에서의 바람직한 자세와 춤(몸)의 훈련은 홍승엽 감독이 대구시립무용단에 남겨놓은 훌륭한 성과이다. 그의 다음 행보를 기대한다.
10월 22일 폐막작으로 무대에 오른 일본의 ‘노이즘1-류토피아 레지던셜 댄스컴퍼니’(예술감독 가나모리 조)의 〈NINA-materialize sacrifice〉.
나무문을 크게 여닫는 듯한 소리, 사람의 숨소리, 무대에서 들리는 모든 소리가 기괴하고 거칠다. 무대 위에 부조처럼 앉거나 서 있는 무용수들, 조명이 아웃된 뒤 다시 켜지자 무용수들의 숫자가 더해진 다른 구조의 형태. 턴 아웃된 발, 펴진 무릎, 발레 동작, 좀 낡았다.
베이지색 레오타드를 입은 여자 무용수와 검정색 의상의 남자들. 생명이 없는 인형, 어떤 희생물을 상징하는 듯. 얌전하고 조용하고 쉽다. 남자들에 의해서만 눕고 앉고 이동한다. 조종당하는 삶. 얌전함은 복종의 표현이지만, 굴종의 반대편에 있는 자기 극복과 자기희생의 길을 걸어가는 또 다른 복종의 길이기도.
여자 무용수의 몸을 납작하게 누르는 남자들. 납작하게 눌린 침묵으로 모든 고통을 안아 들이는 방법. 고통을 주시하는 일은 끝없이 칼날처럼 얇아지는 납작한 침묵의 춤에 이르고, 마침내 그 고통으로부터 상처의 남은 더께를 걷어내는 여자의 거부와 반항. 권력의 전복이 일어나고 위치가 바뀐, 바닥에 납작하게 엎드린 남자들. 드디어 의자를 차지한 여자 인형, 다리를 벌리고 처음의 남자처럼 허리를 곧추세우고 앉는다. 일본 특유의 정서. 다른 나라 무용수들은 흉내 내지 못할 묘한 정서다.
무용수의 위치 변화와 전환과정을 노출시키지 않는 조명의 역할, 인형처럼 보이는 여성무 용수들의 움직임이 정교하고 정확하다. 무대 한 가운데 놓인 의자, 남자가 다리를 벌리고 허리를 반듯하게 세워 앉은 자세에서 여지없이 드러나는 정서. 발레동작을 그대로 차용한 안무와 ‘부토’의 기괴한 정서가 한 무대에 있는 묘하게 섞인다. 서정적인 움직임은 아니라 극도의 형식미가 주는 아름다움이 있다. 아름다움의 골자는 강인함의 서정이기도. 치밀하게 설계한 안무, 좀 낡았으나 아직 훌륭하다.
안무자의 철학과 현재 일본의 현대무용 경향을 확인할 수 없었던 점에서 12년 전의(2005년) 작품은 살짝 아쉬웠다. 하지만 무용수들의 춤 기량과 무대에서의 열정 등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다. 가나모리 조 감독의 최근작품이 궁금해졌다.
작품을 통해 본 세 도시 무용단원들의 춤 기량은 비교적 고르고 뛰어났다. 잘 훈련된 무용수들의 춤(몸)은 작품에 따라 무한하게 빛을 발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런 무용수들이 추는 춤.
예컨대 세 도시의 무용단들에게 이틀씩 무대를 안배하는 것. 하여 안무자의 춤 철학이 잘 녹아있는 예술성이 높은 작품 하나, 대중적으로 인정받은 작품이나 무용단이 상주하고 있는 도시의 특성이 잘 보여주는 작품 등 무용단의 레퍼토리 중 가장 대표적인 작품을 이틀에 걸쳐 보여주었다면 어땠을까.
각 무용단이 추구하고 있는 정체성과 안무자의 춤 철학, 더불어 각 나라 세 도시가 표방하고 있는 서로 다른 춤의 특성 등을 한 눈에 비교해 볼 수 있는 의미 있는, 내실 있는 춤 축제의 향연이 되었을 것이다. ‘3개국 춤의 현재’를 묻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 대답까지 확인할 수 있는 근사한 춤 축제, 좋지 아니한가.
권옥희
문학과 무용학을 전공했다. 자유로운 춤, 거짓말 같은 참말로 춤이 춤으로 진실(춤적 진실)을 말하는 춤을 좋아한다. 스스로 자유로워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는 춤을 만드는 춤작가와 무용수들을 존경한다. 대구, 부산 공연을 많이 보고 있다.
문학과 무용학을 전공했다. 자유로운 춤, 거짓말 같은 참말로 춤이 춤으로 진실(춤적 진실)을 말하는 춤을 좋아한다. 스스로 자유로워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는 춤을 만드는 춤작가와 무용수들을 존경한다. 대구, 부산 공연을 많이 보고 있다.
2017. 11.
사진제공_견석기/대구문화예술회관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