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 현장
웨인 맥그리거. 영국 컨템포러리댄스의 크리에이티브 엔진이라 불리우는 그는 과학과 뉴미디어,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매개로 움직임 언어를 증폭시키는 안무가다. 초기 3부작 〈Sulphur 16〉 〈Aeon〉 〈53 Bytes〉에서부터 그는 과학과의 결합에 남다른 예민함을 갖고 있었다. 지금은 낯설지 않은 가상현실(VR)이나 디지털영상의 활용, 인터넷을 이용한 위치기반의 춤 공연이 세기 말 당시에는 보다 혁신적이고 실험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마련이었다.
테크놀로지를 수용한 그의 작업은 이후에도 활발히 전개되었다. 2012년 런던의 바비칸센터에서 선보인 〈rain room〉은 끊임없이 비가 내리는 어두운 방 안에서 무용수들(혹은 관객들)이 움직임에 따라 비를 컨트롤하는 현대판 모세(Moses) 체험으로 춤-기술, 창작자-관객의 인터랙션을 성공적으로 구현한 작업이었다. 그에게 테크놀로지란 창작의 과정에서부터 예기치 않은 도출결과에 이르기까지 긴밀히 연계돼있는, 안무의 동반자와 다름없었다.
5월 25-26일, LG아트센터에 오른 웨인 맥그리거의 〈아토모스(Atomos)〉는 사물을 구성하는 최소단위인 ‘원자’(atom)의 구조에서 영감을 받아 신체의 움직임을 탐구하는 작품이다. ‘어떻게 하면 우리의 몸을 원자화할 수 있을까’라는 호기심에서 시작된 〈아토모스〉는 흥미롭게도 1980년대 SF 영화 〈블레이드 러너〉를 레퍼런스로 삼았다고 한다.
'더 이상 나눌 수 없다'는 아토모스의 뜻처럼 영화를 1,200개의 프레임으로 세밀하게 나누어 컬러와 추상적인 움직임의 형태들을 추출했고, 이렇게 얻어진 이미지들에 인공지능(AI)을 동원해 안무의 어휘를 확장시켰다. 거기에 3D 디지털 영상, 웨어러블 테크놀로지[1] 과학, 앰비언트 뮤직[2]과 픽셀로 구현된 무대세트 등 여러 개의 요소들이 움직임과 유기적으로 결합되었다.
〈아토모스〉은 관객의 이해를 돕는데 친절하지 않다. 작품이 말하려는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할 수 있도록 내러티브나 구체적인 묘사, 설명을 제시하지 않는다.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시퀀스의 연결, 끊임없이 변주를 거듭하는 움직임의 콜라주가 모호하기 그지없다. 여러 편의 전작에서도 보여주었듯 웨인 맥그리거가 추구하는 고도의 추상성은 관객 스스로 다차원적이고 주체적인 감상을 통해 작품 자체를 유희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아토모스〉에서 느껴지는 전체적인 이미지는 하나의 / 응집된 / 가둬진 / 어두운 것에서부터 여러 개의 / 흩어진 / 자유로운 / 밝은 것으로의 확장이다. 그 중심에서 가장 강렬한 빛을 발하는 것이라면, 단연 인터미션 없이 진행되는 70분의 시간 동안 끊임없이 움직이는 무용수의 몸일 것이다.
무대 위 9명의 무용수들은 조화롭게 응축되기도, 격렬하게 충돌하기도 하면서 서로의 에너지를 조율하거나 교환하고, 때로는 각각 흩어져 독자적인 움직임 에너지를 발산하기도 한다. 맥그리거 특유의 날카로운 몸의 라인과 빠른 속도감이 완화된 듯하지만, 여전히 단위동작은 날렵하고 예리하다. 이때 관절을 많이 이용하고, 뒤틀며 뻗어나가고, 리프팅과 동시에 회전하는 고난도 움직임이 쉴 새 없이 전개된다. 훈련된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운동감각적 에너지, 움직임과 정서 간의 상응관계를 희석시킨 순수한 신체성의 발현이야말로 작품의 백미로 꼽힐 만하다.
작품의 중반부, 관객들은 3D 안경을 착용하고 공연을 관람한다. 천장에서 내려오는 7대의 모니터에 과학과 자연, 성장과 파괴를 소재로 한 3D 그래픽 영상이 투영된다. 황혼, 도시의 정경, 스모그를 내뿜는 전력발전소, 어떤 알고리즘을 내포하고 있을지 모르는 디지털 숫자들과 사각 도형의 무한 증식, 한 마리의 개미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하나의 커다란 구를 이루는 영상 등이다. 입체영상이 그 자체로 새로운 감각을 도출한다거나 획기적이지는 않지만, 강렬한 색감과 기하학적인 이미지가 무용수들의 움직임과 융합되어 기묘한 분위기를 연출했다고 볼 수 있다.
웨어러블 테크놀로지를 이용해 무용수들의 생체정보를 수집·분석하여 3D 프린팅으로 제작된 의상은 각 무용수들의 움직임에 최적화된 디지털 스킨이라고 한다. 공연에서는 무용수에 걸맞는 컬러블록으로 조합한 레오타드 변형 의상 정도로 보일 뿐, 테크놀로지의 기능은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다채로운 색감으로 변주되는 조명에서 움직임을 극대화시켰던 여러 장면, 최소 단위의 픽셀을 확대시켜놓은 듯한 웜톤의 무대 배경과 조화롭게 하나 되는 후반부의 장면에서 의상의 역할이 적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아토모스〉는 단순히 테크놀로지의 나열이나 피상적인 활용에 그치지 않고 창작 과정에서부터 움직임과의 유기적인 관계를 심도 깊게 탐구한다. 그 결과 테크놀로지를 매개로 춤의 외연을 넓히는 동시에 궁극적으로 신체성을 춤의 핵심 문제로 내세우며 역동적인 에너지와 미적 감흥을 도출시킨다. 오늘날 기술과 결합한 다수의 춤 공연이 무엇을 중시해야 하는가에 대해, 이 작품은 하나의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1] Wearable Technology. 컴퓨터를 옷에 부착하거나 신체에 부착 또는 분산시킨다는 의도에서 시작된 기술. 몸의 일부처럼 지니고 다닐 수 있어 언제 어디서나 사용자와 소통할 수 있다. 구글의 구글 글래스(Google Glass), 삼성전자의 갤럭시 기어(Galaxy Gear), 나이키의 퓨얼밴드(Fuel Band), 애플의 아이워치(i-Watch) 등이 대표적이다.
[2] Ambient Music. 의식적인 음악 감상에 목적을 두지 않고, 환경의 일부로서 자연스럽게 청취하게 되는 음악. ‘Ambient’(주변의, 둘러싼)라는 뜻처럼 공간감을 조성하는 특징이다. 멜로디, 리듬 등 음악의 전통적인 요소를 배제하는 경우가 많으며 바람, 파도 등 자연의 소리를 넣기도 한다.
한국춤비평가협회가 발행하는 월간 〈춤웹진〉에서 무용 전문기자로 활동 중이다. 창작과 수용 과정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가치에 주목하여 무용인 인터뷰를 포함해 춤 현장을 취재한 글을 쓴다. 현재 한예종에서 무용이론 강의를 병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