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 현장
한국콘텐츠진흥원이 ‘예술과 기술의 만남’을 주제로 해외 우수 융복합 공연을 초청하는 시리즈의 두 번째 무대가 열렸다. 1월 18일부터 22일까지 공연장 셀스테이지에서 소개된 블랑카 리 컴퍼니의 〈로봇〉이 그 주인공이다. 블랑카 리는 1998년 서울세계무용축제(SIDance)에서〈미노타우루스의 꿈〉을 선보인 후 근 20년만의 내한이다.
외국에서는 로봇이나 인공지능을 활용한 공연이 더러 제작된다고 하지만 국내에서는 그 사례가 거의 전무하다시피하고(기술 개발 등 여러 문제가 따르겠지만 아마도 제작비용 문제가 가장 큰 장벽일 것이다) 블랑카 리의 이 작품은 이미 2013년 초연 이래 전 세계 60개 이상 도시의 투어를 거쳤다고 하니 이렇게 로봇을 활용한 본격 무용 공연의 국내 소개는 좀 늦은 감이 있다.
평자가 관람한 18일의 개막공연은 강추위 속 늦은 저녁 시간에도 가족단위 관람객이 북적였다. 만 7세 이상 관람 가능에 무료 공연이었던 터라 보조석을 최대한 준비하고도 장내가 혼잡하여 공연 시작이 15분 가까이 지연되기도 했다.
제목이 〈로봇〉 자체인 것은 인간 무용수 출연진보다 로봇 출연진이 수적으로 월등히 앞선 데서부터 짐작할 수 있다. 일단 음악은 전적으로 로봇들에게 맡겨졌는데, 일본의 ‘메이와 덴키’가 만들어 낸 여러 대의 ‘덴키 로봇’은 일본 민요풍 가락과 리듬이 프로그래밍된 음악을 연주했다. ‘덴키 로봇’은 스탠드 형의 기본 몸에 바람개비, 인형, 북 등 전통적 놀이도구를 부품처럼 접붙여 실험실에서 막 조립을 마치고 나온 듯한 모습을 지녀 앞에서 춤추는 무용수들과 ‘나오 로봇’들이 지닌 유선형 몸매와 시각적 대비를 골고루 이루었다.
프랑스 알데바란 사에서 개발한 키 61cm의 ‘나오(NAO)’는 귀여운 표정, 깔끔하게 마감된 외관을 지닌 로봇으로 관객들의 탄성을 자아냈다. 그 움직임이 태블릿 PC로 조작된다는 점을 사전에 인지하고 보는 입장에서는 사람이 직접 손을 놀려 움직이는 정교한 마리오네트와 원리가 그다지 다를 것 없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판에서 하나씩 부품을 떼어 본드를 붙여가며 조립해서 만든 로봇 장난감이 스스로 움직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을 해본 부모 세대의 눈으로 보아도, 걸음마를 배우는 아기처럼 뒹굴다 다시 일어나는 ‘나오’의 모습은 분명 매력적이다.
로봇을 활용한 공연 중에 필자에게 아직도 신선한 충격으로 남아있는 것은 작년 리우 패럴림픽 개막식에서 장애인 스노보더 에이미 퍼디가 산업용 관절로봇 쿠카(KUKA)와 함께 선보인 듀엣이다. 이것에 비하면 〈로봇〉 공연은 전위적이라기보다 전통적인 서커스, 쇼에 가까운 분위기였다. 상쾌하고 심리적 안정감을 주는 하늘빛 푸른색을 주조로 알록달록 총천연색으로 펼치는 시각 요소, 무용수들이 뒤집어쓰고 나온 고전적인 깡통 로봇의 비주얼 등은 주디 갈란트의 영화 〈오즈의 마법사〉(1939)처럼 동화 같고 친근했다.
블랑카 리의 〈로봇〉에서는 로봇이나 인공지능을 소재로 한 영화들이 필경 맞이하게 되는 인간과 로봇 사이 감정적 갈등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덴키 로봇이나 깡통 로봇에 비해 나오의 외관은 전혀 위화감을 느끼지 못하도록 진화한 형태라는 것이 한 무대 위에서 고스란히 보이면서도, 통통 튀는 무용수의 유연한 관절에 비해 나오의 짧은 팔다리로 선보일 수 있는 동작이란 한계가 있다는 것이 처음부터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선물처럼 상자에서 꺼내 소개시키는 어린 로봇은 선진 기술이 집약된 장난감으로서 어른과 아이 모두의 판타지를 충족시키고, 공연은 그저 인류와 로봇 모두 행복하게 어울려 놀 수 있는 유토피아를 선보일 뿐이다.
그래서 각종 보도 자료를 통해 배포된, 블랑카 리가 이 작품을 통해 인간성의 가치와 본질에 대한 메시지를 던지고 싶었다는 의견은 무대 위에 선보이는 것에 비해 과한 느낌이 있었다. 우리가 부러운 것은 동시대의 뜨거운 이슈를 공연의 소재로 채택하여 흐름을 선도하는 안목을 지닌 안무가가 있다는 것, 그리고 분명 민간단체의 재원과 역량만으로는 도저히 성사가 불가능해 보이는 이 프로젝트 뒤에 있었을 프랑스 정부 차원의 지원이다.
이번 공연을 주관한 한국콘텐츠진흥원은 1월 18일 관객과의 대화 외에도 20일 ‘로봇의 시작’, 22일 ‘메이와 덴키의 메카니컬 오케스트라’라는 주제의 기술 워크샵을 함께 꾸려 로봇이 주가 되어 생소한 이 작품을 소개하는데 정성을 들였다.
다만 <로봇>이 공연된 셀스테이지가 객석의 단차가 작아 시야가 충분히 확보되지 않는 곳이라, 전면부에 배치된 키 작은 나오의 움직임이 앞 몇 줄을 제외하고는 제대로 감상하기 어려웠다는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자리가 부족하여 보조석까지 배치하느라 더욱 그랬을 수도 있지만, 무용 공연을 올리기에는 이곳 무대는 특히 앞쪽이 시야의 사각지대인 것처럼 보였다. 주최 측이 공연을 기획하고 수입하는 외에 현장에서 구현하는데도 좀 더 전문적인 시각으로 진행해주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