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 현장
경남 영산 영축산 아래 놀이마당에서는 2월 29일 ~ 3월 3일 사이 제63회 3·1 민속문화제〉가 열렸습니다. 국가무형문화유산 쇠머리대기와 큰줄당기기(문화유산 명칭으로는 ‘줄다리기’)가 해마다 3·1절 행사와 함께 열립니다. 농경의례의 민속놀이가 3·1운동과 연관되어 주민 스스로의 고을 축전으로 열리는 일은 드문 일입니다. 이 영산지역은 민족적 의기가 서린 곳으로 주민들의 민족의식이 향토 세시풍속과 연관하여 연면히 줄기차다는 것을 일러줍니다. 이 영산 고을은 3·1운동 당시 경남지역에서 어느 지역보다 먼저 일어났음을 영산 사람들의 속깊은 긍지로 여기고 있는 것이지요.
마당극 〈강쟁이 다리쟁이〉, 마당극 〈영축산 들배지기 한 판〉 포스터 |
이러한 배경의 현대 민속축전 행사에 마당극 〈강쟁이 다리쟁이〉와 마당극 〈영축산 들배지기 한 판〉이 초대되었습니다. 마당극 〈강쟁이 다리쟁이〉는 1984년 서울의 놀이패 한두레가 창녕 성당에서, 그리고 문예회관 소극장에서 올리고 나서 대구와 광주를 순회 공연한 탈춤마당극입니다. 내용인즉, 1984년 전국을 휩쓴 물난리 가운데 줄당기기로 유명한 경남 영산고을의 수해참사를 놓고 ‘천재지변’이라 강변하는 나리들에 맞서서 수해 재난 주민들이 피해보상운동을 벌이며 겪는 갈등 현장을 탈판으로 엮어낸 것이지요. 여기에는 한두레의 춤과 한국무용연구회 회원들의 춤이 중심부를 이끌면서 김용배의 국립국악원 타악사들의 연주로 극적 긴밀감을 더해주었습니다. 또 무엇보다 80년대 민중미술을 이끌어낸 오윤 화백의 나리탈들이 민중표현의 묘미를 한층 더해준 당대 현장탈마당극이었습니다. 부산의 극단 자갈치가 마련한 마당극 〈영축산 들배지기 한 판〉은, 임진왜란 때 영산 현감이던 전제 장군의 가짜 충절비패와 영산 창녕지역의 민중수호신인 문호장 서낭당패의 한 판 겨루기를 내용으로 합니다. 왜적을 물리치는데 혁혁한 공로를 추인받지 못하고 부하의 칼에 죽임을 당한 전제 장군의 충절을 역사적으로 재인하여 1982년도에 세운 전제 장군 호국 충절비는 두구두고 주민의 원성을 샀습니다. 역사의 재해석으로 장군으로 재칭송받게 된 현감은 당시 통치자의 몇 십대 조상입니다. 줄당기기의 보유자이신 조성국 선생님이 살아계실 때는 영산 현장에서는 한 두 차례일 뿐 터놓고 제대로 놀아보지 못한 이른바 찍힌 마당극이었습니다.
3월 2일 영산놀이미당에서 아침 11시에 〈강쟁이 다리쟁이〉가 꽃샘 추위 속에서 놀아졌습니다. 이튿날 3일 아침 8시부터는 줄당기기보유자이셨던 조성국 선생 추념식이 흉상 제막과 함께 거행되었습니다.
이어 이의 축하공연으로 〈영축산 들배지기〉가 조성국 선생 시비 앞 자연스레 형성된 원형마당에서 올려졌습니다. 이 두 마당극 공연은 3·1문화제 주최측과 사전 공동 기획된 초청 공연이었습니다.
공연을 앞두고 마당굿운동 50주년 기념 행사 ‘한겨레 민족예술 한마당’의 선포 선언 낭독이 있었습니다. 선언 낭독은 현 한국민족극협회의 손재오 이사장이 하였습니다. 2024 마당극운동 50주년 기념 행사의 첫 마당을 여는 의례로서 고사굿의 축문처럼 마당판의 품격을 갖춘 소리목과 사설이었어요. 다음은 선포식 선언문의 본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민속문화유산과 전통예술에 빛나는 이곳 영산에서 탈춤, 마당극, 풍물굿 등 마당굿운동 50주년을 맞이하여 〈한겨레 민족예술 대동한마당〉 축전의 첫 포문을 엽니다.
마당굿은 탈춤을 비롯한 전통사회의 마당판 민중연희를 총칭하기도 하고, 가까이는 1970년대, 80년대 대학가에서 일기 시작한 탈춤부흥운동과 민중문화운동의 민중매체를 상징적으로 일컫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마당굿의 개념 안에는 선두주자였던 창작탈춤과 마당극을 비롯하여, 풍물굿, 무굿, 민요, 판소리, 이야기꾼(강담사), 음유시, 노래굿, 시나위, 줄타기, 유랑연예, 전통무예 등 문화운동성을 지닌 전통연희뿐만아니라 노래운동, 민화운동, 민중미술운동, 민족음악운동, 민족영화운동, 민족극운동, 민중교육극운동 등 민중민족문화운동의 활용매체들도 포괄하는 광범위한 민중표현매체의 이념적 총칭이기도 합니다.
• 이 땅의 마당굿운동은 올해로 반 백년 전 대학가에서 일기 시작한 ‘민속극부흥운동’으로부터 말문을 엽니다.
탈춤을 비롯하여 두레굿, 풍물굿, 무속굿 등 민속극부흥운동은 대학의 청년문화를 전변시켰고, 지식인 사회에서 새로운 민중문화운동을 일으키면서 농촌문화운동, 노동문화운동, 빈민문화운동으로 번져나갔습니다. 범민중문화운동으로 확충되면서는 민족의 현실과제인 민주화운동과 민중생존권쟁취운동, 민족통일운동으로도 나아가 민중 주체의 민족문예부흥운동의 중심갈래로 위상을 잡았습니다.
• 1974년 2월 서울지역 대학 탈춤패 출신을 중심으로 채희완, 김순진, 강철구, 이애주, 장선우 등이 민족문화연구모임 ‘한두레’를 결성하고, 이종구, 김민기, 채희완, 이애주, 임진택, 김석민, 김구한, 김영동 등이 3월에 창작탈춤 〈소리굿 아구〉와 그해 6월 이애주, 채희완, 김민기, 김영동 등을 중심으로 〈창작춤극 땅끝〉을 공연함으로써 그 민족예술 대장정의 첫 발을 내디뎠습니다.
그리고 그것의 전초로서 1973년 12월 서울제일교회에서 김지하 원작(〈진오귀〉),임진택 연출, 채희완 안무의 농촌계몽 마당극 〈청산별곡〉이 공연되었습니다. 그 마당극의 중심부인 도깨비마당(수해귀, 외곡화폐귀, 소농귀)는 창작탈춤의 원본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한편 민족문화운동의 시초로는 1963년 가을 “한국적 민주주의 장례식〉이라는 대학시위와 함께 실내판을 벌인 조동일 원작의 〈원귀 마당쇠〉를 꼽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 그 이후 1970-80년대 유신정권과 군사정권 아래에서 노동·농민·빈민 등 민중운동과 민주화운동 현장에서 마당극으로, 민족춤, 풍물굿, 노래굿, 그림굿으로, 민족음악, 민족영화 등으로 확산되었습니다.
• 1988년 봄에는 전국의 놀이패와 극단 등 20여 마당극, 마당굿패가 서울에 모여 두 달간 ‘제1회 민족극한마당’을 개최하고, 그 여세를 몰아 그해 겨울에는 〈전국민족극운동협의회〉를 결성하였습니다.
1994년에는 그간의 축적된 힘으로 전국 각 광대들이 전북 고부와 정읍에 모여 한 달간 합숙한 끝에 마당극 20년, 동학 100주년 기념으로 2월 26~27일 〈고부봉기 역사맞이굿〉을 역사의 현장에서 펼치면서 그 중심부로 〈칼노래 칼춤〉을 공연함으로써 마당굿운동의 새 지평을 열었습니다.
그 이후 전국민족극운동협의회는 매해 전역을 집중 돌면서 〈민족극한마당〉을 펼쳐왔고, 최근에는 ‘(사)한국민족극협회’로 전환하여 20여 공연단체가 마당극으로, 마당굿으로 지난해에 ‘제37회 대한민국마당극페스티벌’로 이름을 바꾸어 개최하였습니다.
• 이제 2024년에는 마당굿운동 50주년을 맞아 전국 곳곳에서 〈한겨레 민족예술대동한마당〉 축전을 광대하게 펼치게 되었습니다.
이 축전의 열림판으로 이 땅의 최남단 제주도에서 봄기운이 생동하는 입춘을 맞아 ‘제주 입춘굿 놀이’와 함께 ‘한겨레 마당굿 광대한마당 뒷풀이’로 몸을 풀었습니다.
이어 3월1일부터 3일까지 이곳 경남 영산에 ‘3·1 민속문화제와 함께 하면서 마당극 〈강쟁이 다리쟁이〉와 〈영축산 빗돌말이 들배지기 한판〉을 공연함으로써 본격적인 포문을 연 것입니다.
특별히 여기에는 농사꾼이자 줄꾼이며 술꾼으로 자처하시고 이땅의 젊은 놀이패와 광대, 문화패의 동지이자 스승으로서 민예총의 초대 공동의장이셨던 조성국 선생의 30주년 추념식과 흉상 제막식과 더불어 한다는 데에 남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 우리 마당굿운동 50주년을 기획하고 준비하면 다음의 몇 가지를 다짐하였습니다.
첫째, 70-80년대 대학탈춤의 열기를 일으킨 은빛세대로서 탈춤 재부흥운동에 다시 나서는 동시에 여러 민중연희 양식의 성취들을 엮어 마당굿운동 50주년 기념 축전의 여러 행사를 진행한다는 것입니다. 연극, 춤, 음악, 미술, 영상, 총체연행 등 장르 확산과 아울러 민중전통연희의 창조적 계승과 현시대의 민중언로로서 그 임무를 수행한다는 의미입니다.
갈수록 악화되고 있는 반문명적 기후위기, 코로나19 등 역병 창궐, 빈부격차 등 사회 불평등, 민주화 후퇴 및 반민족통일 세력의 대두 등 역경을 물리치는 이 시대의 벽사진경과 해원상생의 씻김마당을 펼치자는 것입니다.
이는 민족적 생명력의 원천을 회복하는 오늘 이땅의 새로운 세시풍속의 축전이 될 것입니다.
• 둘째, 우리가 마련하는 축전 한마당은 신, 자연, 인간, 역사가 혼융된 집단신명의 열광 속에서 관중과 더불어 역사적, 예술적, 미적 체험 마당이 될 것입니다. 그것은 21세기 새로운 문명으로 개벽코자 열망하는 이땅 민초들의 생명평화운동, 민중토대 민족예술운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이땅의 어렵게 사는 이들마다 거룩한 삶이고 이땅의 그늘진 구석구석마다 새세상, 민중개벽의 풍류정임을 확인하는 새 신명천지 세상 맘판을 예비코자 합니다. 이 판의 중심 출연진은 30-40년 구력을 지닌 대학탈반 출신, 민족연극반 출신, 풍물굿패 출신 등 은빛세대 민족예능인과 창작탈춤을 시도하고 있는 전국의 극단과 놀이패 등의 신생 놀이꾼들의 연합체가 나설 것입니다.
다음의 몇 가지 행사들이 이같은 취지와 의미를 더욱 분명히 살려나갈 것입니다.
• 마당굿운동의 확장된 개념대로 제주입춘굿놀이, 3·1 민속문화제와 같이 전통민속축전과 함께 하고, 일본군위안부해원상생한마당, 진주탈춤한마당, 영호남 못난이 소리춤대회 같이 지역단위의 축전과도 함께 판을 열 것입니다.
• 50년간의 역대 마당극과 민족극의 대표작을 가려내고 이를 엮어서 다시 선보일 것입니다.
• 그동안 뜻을 모두어온 민족춤계열과 민족풍물굿 한마당도 따로 또 함께 예정되어 있습니다.
• 여기에 마당굿운동 50년 간의 성취를 기록하고 정리하는 학술행사와 함께 대학시절 탈꾼들의 회고담을 모은 『탈춤과 나』의 출판도 진행하고 있습니다.
• 그리고는 강화도 마니산이나 지리산 노고단 중 한 곳에서 〈제11회 민족통일 장승굿〉을 거행하여 50주년 기념 축전을 총결산하고 이로써 향후 새로운 50년 마당굿 운동을 예비할 것입니다.
이상과 같이 〈마당굿운동 50주년 기념 ‘한겨레 마당굿 축전’〉을 선포합니다.
채희완
부산대 명예교수, 〈(사)민족미학연구소〉 소장, 〈부마항쟁기념사업회〉 이사, 〈창작탈춤패 지기금지〉 대표를 맡고 있다. 저서로 『공동체의 춤 신명의 춤』, 『한국의 민중극』(엮음), 『탈춤』, 『한국춤의 정신은 무엇인가』(엮음), 『춤 탈 마당 몸 미학 공부집』(엮음), 『지극한 기운이 이곳에 이르렀으니』 등을 펴냈고, 그밖에 춤, 탈춤, 마당극, 민족미학에 관련된 논문과 춤 비평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