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 현장
이즈음 세계 발레계의 새로운 흐름 중 하나는 현대무용 계열의 안무가들을 객원 안무가로 초빙하는 발레 컴퍼니의 비중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전막 작품 제작에 대한 재정적인 부담이 가중되고 있는 것이 가장 큰 원인이지만, 관객들의 기호를 반영한 다양한 컨템포러리 발레 작품을 보유하고자 하는 컴퍼니의 의지가 적극적으로 작용한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이다.
우리나라의 직업무용단들의 경우 외부에서 안무가를 초빙하는 예는 극히 드물다. 전문 무용단이나 동문 무용단의 경우도 대부분 예술감독이나 대표자 자신의 안무 작품을 공연하지 외부에 문호를 개방하는 경우는 금기시 되었다. 개인 무용단은 그렇다하더라도 공공 직업무용단의 경우도 마치 예술감독이나 단장의 사유물이란 인식이 팽배했기 때문인지 좋은 작품을 확보하고 훌륭한 안무가를 영입해 경쟁력 있는 레퍼토리를 확보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책임자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러나 이즈음 들어 국립무용단이 국내외 현대무용 안무가를 객원 안무가로 초빙하고, 국립발레단이 현대무용 전공 안무가를 창작발레의 조안무로 참여시키는 것에서도 보듯 앞으로는 우리나라에서도 직업무용단을 중심으로 객원 안무가들의 초빙 빈도가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 3월 광주시립발레단의 새로운 수장이 된 신순주 예술감독은 부임 후 연일 새로운 행보를 보여주고 있다. 지난 9월에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으로 만들어진 세 개의 작품을 모아 해설을 곁들인 트리플 빌 기획 프로그램을 선보인데 이어 이번에는 두 명의 객원 안무가를 초빙해 만든 새 작품으로 짜여진 ‘모던발레’ 공연을 선보였다.
10월 21-22일 광주문화예술회관 대극장 무대에 오른 광주시립발레단 제115회 정기공연(필자 22일 공연 관람)은 외국의 직업무용단(프랑스의 엠마누엘 갓 무용단)에서 무용수로 활동하고 있는 현대무용가 김판선을 객원 안무가로 초빙해 만든 신작과 광주시립발레단이 소재한 전남 지역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기존 작품을 발레단의 레퍼토리로 새롭게 구성한 작품을 함께 선보였다는 점에서 춤계의 관심을 모았다.
이 같은 작업 과정은 60여 년의 전통을 가진 국립발레단이나 30년의 전통을 가진 유니버설발레단에서도 시도하지 않았던 제작 형태인데다 광주시립발레단의 여러 여건(재정이나 단원들의 경험 등)을 고려한 선택이란 점에서 긍정적인 시도로 보여졌다.
또한 객원 안무가들과 광주시립발레단은 이들 작품을 새롭게 안무하거나 재구성하면서 스타급의 객원 무용수들을 외부로부터 조인시켜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고 광주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홍보와 마케팅에도 활용하는 재치를 보여주었다.
1부에 선보인 초연작 <불안한 축 (Unstable Axis)>(안무 김판선)은 40분이란 적지 않은 길이의 작품이었다.
모던발레 레퍼토리를 보유하고 있지도 않고 이런 스타일의 작업을 해본 경험이 거의 전무한 단원들에게 현대무용의 움직임을 적용한 김판선의 안무는 여러 가지 면에서 쉽지 않은 도전으로 예상되었다.
이 작품은 발레 동작 중에서 신체 축(Axis of the Body)의 부위 중 독립적인 가능성을 찾아가며 축에 엇나감과 뒤틀림을 사운드와 오브제를 활용, 신체적인 움직임으로 극대화시킨 작품이다.
안무가는 강렬한 사운드와 강한 비트의 음향적인 요소를 강조한 음악 구성을 통해 움직임과의 매칭을 보여주었다. 댄서들의 몸과 무대 주변에 마이크를 배치한 탓인지 무용수들이 무대 바닥이나 또 다른 댄서들과 몸을 밀착시킬 때마다 제각각의 사운드가 만들어지고 그것은 그것 자체로 음악이 되었다.
안무가는 빠르고 강렬한 에너지를 동반한 군무와 2인무나 4인무 6인무 등에서의 정적인 흐름을 조합한 움직임 구성으로 템포를 조율하면서, 때로는 발레 무용수들이 비교적 편안하게 할 수 있는 동작들을 접합시키는 영리함을 보여주었다.
컨템포러리 발레 작품에서 보여지는 음표를 춤으로 치환하는 음악과 움직임의 조화, 무용수들이 만들어내는 발레의 정형을 비켜가는 앙상블의 묘미를 만끽하지 못한 아쉬움은 있었지만 단원들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폭발적인 에너지나 군무에서의 조형적인 아름다움은 음미할 만했다.
2부 <천학의 비상>은 <흑두루미의 꿈>이란 제목으로 김하정이 안무한 작품을 광주시립발레단의 발레 마스터인 플로린 브린두사(Florin Brindusa)가 재안무한 것으로 학들이 도래하는 순천만에 다리를 다친 채 남겨져 외톨이가 된 한 마리의 흑두루미를 주인공으로 고향을 향한 그리움과 꿈, 사랑과 이별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플로린은 스토리텔링보다는 두 마리 흑두루미의 사랑을 중심으로 춤으로 풀어냈다. 최정수가 작곡한 현대음악과 국악기가 어우러진 창작음악을 사용한 이 작품은 전체적인 구성과 안무 등에서 더 많은 공력을 필요로 해보였다.
그러나 주인공역을 맡은 신송현과 윤전일의 안정된 기량을 바탕으로 한 감성적인 2인무는 컨템포러리발레를 보는 재미를 한껏 더해줄 정도로 빼어났다.
두 달 여 동안 광주시립발레단 단원들과 작업한 안무가 김판선은 “작업 과정에서 관객과의 소통을 가장 염두에 두었다. 광주시립발레단 창단 이후 처음으로 모던 발레를 공연한 만큼 관객들과 단원들 모두에게 쉬운 작업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이번 작품은 내 것을 표한하면서 관객의 입장에서 바라볼 수 있는 길을 찾기 위해 고민했다”라며 발레 무용수를 염두에 둔 컨템포러리 작업임을 간접적으로 암시했다.
광주시립무용단은 1부 <불안한 축(Unstable Axis)>에서는 댄싱9을 통해 이름이 알려진 현대무용수 ‘안남근’(現 LDP단원)을, 2부 <천학의 비상>에서는 댄싱9 시즌 2,3 우승자인 윤전일(前 국립발레단 주역 무용수)을 게스트 무용수로 초청 주인공 역을 맡겼다.
광주시립발레단 신순주 예술감독은 “광주시립발레단 창단 39년 만에 처음으로 모던발레 작품만으로 정기공연을 치렀다. 분명히 새로운 도전이다. 실험적이고 새로운 도전을 통해 광주시립발레단의 존재감을 증명함과 동시에 광주시민들에게 더 넓은 발레의 장을 제공하려 했다. 특히 모던발레는 난해하다는 선입견을 갖고 있는 관객도 가벼운 마음으로 감상할 수 있도록 작품 속에 인간의 감정을 담아내 달라고 주문했다”고 말했다.
이번 공연을 통해 광주시립발레단은 클래식 발레 외에 다른 스타일의 작품을 소화해 낼 수 있는 가능성을 확실히 보여주었으나 일부 단원들의 경우 안무가가 요구하는 움직임을 제대로 소화하기에는 체격이나 기량, 체력적인 면에서 문제점을 보이는 등 향후 광주시립발레단이 메이저 발레단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어떤 과제가 남겨져있는지도 함께 보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