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 현장
한국문화예술위원회와 주한영국문화원은 10월 14일 예술가의 집에서 “무용 창작의 생태계: 안무가, 프로듀서, 그리고 극장”을 주제로 <한·영 댄스토크>를 개최했다. 영국과 한국의 극장, 컴퍼니 관계자, 안무가 등이 참여한 이날 행사는 한·영 춤 창작 생태계의 주요 현황을 공유하고, 발전적인 춤 창작 생태계를 만들기 위한 과제에 대해 의견을 나누는 자리였다. 현장에서 논의된 내용을 간추렸다. (편집자 주)
한·영 댄스토크 패널
무용 전용 극장 더 플레이스(The Place) 프로듀서 엘리 비드햄(Ellie Beedham)
아크람 칸 컴퍼니(Akram Khan Company) 프로듀서 파룩 초드리(Farooq Chaudhry)
제임스 커즌즈(James Cousins) 컴퍼니 안무가 제임스 커즌즈 (James Cousins)
국립현대무용단 사무국장 정순민
문화예술기획 이오공감 프로듀서 김서령
진행 영국문화원 2017-18 시즌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최석규 감독
영국 측 연사의 토크 및 질문
1부는 영국 측 연사인 엘리 비드햄, 파룩 초드리 그리고 제임스 커즌즈가 각각 준비해온 토크로 구성되었다. 엘리 비드햄은 현재 본인이 프로듀서를 맡고 있는 영국 런던의 무용 전용 극장 더 플레이스의 레퍼토리를 비롯하여 아티스트 육성 사업, 장소특정적(site-specific) 공연, 타 극장 및 페스티벌과의 협업과 리서치 프로젝트, 레지던시 프로그램 등을 소개하였다.
파룩 초드리는 아크람 칸 컴퍼니의 비즈니스 모델이라는 주제를 두고 직접 무용단을 창단했던 과정, 함께 무용단을 이끌 동료들을 모색하면서 마주했던 과제들에 대해 이야기하였고, 아크람 칸 컴퍼니의 독립적 수익 구조에 대해 (Independent Model) 시각자료를 통해 자세히 설명하였다.
마지막으로 제임스 커즌즈는 프로듀서로 활동 중인 앞선 두 연사와는 달리, 현재 무용수로서 그리고 안무가로서 활동하고 있는 본인의 경험을 활용, 최근 무용 학교를 졸업한 아티스트로서 어떤 경로들을 통해(2013 영국문화원 에든버러 쇼케이스, 더 플레이스의 Associate Artist, 매튜 본 감독의 <백조의 호수> 세계 투어 합류 등) 프로 무용수 그리고 안무가로서 이 자리에 오를 수 있었는지에 대해 이야기 했다.
패널 토의
최석규 감독이 진행을 맡은 2부 패널 토의는 관객들의 질문에 대해 양국 연사들이 대답하고, 또 논점과 관련된 주제들을 직접 제시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신진 아티스트들을 위한 지원 사업, 제도
최석규 감독: 우리나라 무용계에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창작산실’ 제도로 대표되는 신진 아티스트 지원 및 육성하는 프로그램이 있는데, 영국 무용계에도 그러한 등용문들이 있는지? 어떤 식으로 무용수들이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도록 지원을 해주는가?
엘리: 무용단, 혹은 페스티벌들이 영국 내외적으로 새로운 아티스트들을 지원해주는 제도에 대한 공식적인 합의는 없지만 한 작품을 두고 영국 내의 무용단 및 극장끼리 협력 관계를 맺어 지속적으로 아티스트가 작품을 개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더 플레이스에서 리서치 작업 및 프리 프로덕션을 마친 아티스트가 새들러스 웰(Sadler’s Well)극장에서 쇼케이스를, 그리고 사우스뱅크(South Bank)극장에서 더 큰 규모의, 조금 더 다듬어진 형태의 공연을 올린다던가 하는. 각 극장의 관계자들끼리 항상 소통하고 있기에 가능한 결과물이다.
제임스: 아티스트의 입장에서 이야기하자면 가능한 한 많은 극장과 무용단의 관계자들과 교류하고, 끊임없이 아티스트 본인과 작품에 관한 정보를 노출시키는 기회를 많이 만들어 가야 한다. 모든 극장들의 프로그램을 살펴보면, 다 개별적으로 다른 예술관과 취향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아티스트로서 본인의 스타일에 맞는 극장과 프로듀서를 잘 선택하고 나름에 맞는 전략을 세우라고 조언하고 싶다.
파룩: 한국이든, 영국이든 무용계 안에서의 인사들과의 협업 네트워크 그리고 신뢰를 쌓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본다. 내가 이 네트워크 안에서 무엇을 얻어갈 수 있을 지도 중요하지만 그 이전에 내가 이 관계에서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지를 파악해야하는 양방향적인 프로세스이다. 또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점은, 한국과 영국의 신진 아티스트 지원 모델은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예술계 네트워크든, 아티스트 육성 제도이든 모든 시스템은 문화 특정적이라고 생각한다.
무용을 관람하는 관객의 수가 적다는 것이 무용계의 성장을 방해한다고 생각하는가?
파룩: 핑계라고 생각한다. 서울은 지금 1000만 명이 사는 도시이다. (런던은 860만 명이다) 예술가들이 계속 창작 활동을 해낸다면 당연히 관객은 늘어난다. 논란이 될 만한 발언일 수도 있겠지만, 아시아 국가에서 계급과 나이로 인해 서열이 정해지는 수직적 문화가 혹시 예술의 질적, 양적 성장을 방해하지 않고 있는지 되돌아보아야 한다.
정순민: 한국 무용계가 폭넓은 관객층을 갖추기에는 그 역사가 너무 짧았다. 한국에서 전통 무용이 아닌, 신무용이 처음으로 극장에서 올려진 시기는 1921년에서 30년 사이로 추정된다. 한국에서 그 이전에는 극장 시스템도 없었고, 공연료를 내고 공연을 본다는 개념 자체도 없었다. 지난 50년 사이에 전국에 250개 극장이 급속하게 지어졌고 그 극장들 중에서도 75%는 뮤지컬, 콘서트, 연극 등 무용보다는 조금 더 대중적으로 여겨지는 장르의 공연들이 올라가고 있다. 아티스트, 관객, 관련 학과, 공연장... 외양으로 보기에는 모든 제도를 갖추었던 것처럼 보이지만 영국과 비교하기에는 한국의 무용계는 일반 대중들이 무용 공연에 대한 취향을 키우고 관련 지식을 길러내기엔 그 역사가 너무 짧았다.
순수예술로서의 무용이 가져야할 대중성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관객 저변의 확대를 위해 각각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가?
제임스: 훨씬 더 상업적이고 관객들이 접근하기 쉬운 다른 장르들에 비해 무용은 확실히 더 변두리에 위치해 있는 것이 맞다. 그 사실을 인정하더라도 새로운 관객들이 무용 공연을 찾아올 수 있는 문을 닫아둘 수 는 없다.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 가 세운 기록이 보여주듯이, 무용도 대중성을 가진 상품이 될 수 있다. 이는 다른 성공적인 프로덕션의 예들도 또한 말해주고 있다. 한번 공연을 찾은 관객들은 다시 문을 두드릴 수도 있다.
엘리: 확실히 지금 이 논제는 공연 기획자, 마케터의 입장에서 ‘우리 공연을 보러오세요!’ 라고 홍보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동시대의 관객들이 어떤 식으로 예술을 소비하는 지에 대한 고민이 있어야 한다. 더 플레이스는 다음 달에 텔레비전 및 온라인 채널을 오픈하여 현재 공연이 올라가는 프로덕션을 생중계하고, 지난 공연들의 녹화본을 보여주기도 할 예정이다. 이 외에 작품들을 소개하고 장기적으로 관객층을 이끌어 모을 수 있는 아티스트 토크를 비롯한 다양한 활동들, 다른 장르와의 크로스 오버 프로덕션 등을 활발히 기획 중에 있다. 대영 박물관, 도서관 등에서 진행되는 장소특정적 공연들도 일반 무용 공연과는 다른 층의 관객들에게 보여진다는 점에서 새로운 관객 개발과 관객 저변의 확대를 위한 노력이다.
파룩: 대중성은 우리들이 살고 있는 세계에 조금 더 민감하게 귀기울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럭저럭 괜찮은(good) 공연을 보면 관객들은 ‘괜찮다’고 말하고 넘어갈 것이다. 훌룡한(great)공연을 보면 관객들은 ‘저건 내 이야기잖아!’ 라고 외칠 것이다.
정순민: 대중성에는 정말 한가지의 해답이 없는 것 같다. 가장 대중적인 매체인 TV를 보는 사람들의 연령층, 성별, 직업, 계층을 파악한다고 해서 대중성을 갖춘 작품을 만들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나만이 표현할 수 있는 이야기가 많은 사람들이 경청할 수 있는 방식으로 표현되는 지의 여부가 대중성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현재 창작하고 있는 작품의 어떤 지점이 동시대 사람들과 접점을 가지고 다가갈지 창작자들의 입장에서 고민할 때, 공연의 결과가 성공적인 경우가 많다. 대중성이라는 너무 큰 주제를 두고 고민하기 보다는 창작 중에 있는 작품 자체와 관객이 만나는 지점을 고민해보라고 조언하고 싶다.
프로듀서 육성 사업, 혹은 프로듀서와 안무가, 혹은 무용수가 서로 교류하고 협업을 기획할 수 있는 시스템이 영국에 있는가?
엘리: 영국의 몇몇 대학의 석,박사 과정에서 프로듀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이는 정말 예외적인 경우라고 생각하고, 사실은 프로듀서 일을 배운다는 것은 이론과 실무를 함께 습득하는 직업 교육의 형태로 이루어진다.
파룩: 기업가형, 예술가형, 관리자형 프로듀서 등 프로듀서는 정말 사람의 성격마다 공연을 기획하고 실무를 집행하는 스타일이 다르기에 사실 프로듀서 교육이 가능할지 잘 모르겠다.
최석규: 그렇다면 파룩은 아크람 칸 컴퍼니의 프로듀서로서 아크람 칸과 어떻게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창작 활동을 꾸준히, 혁신적으로 해나갈 수 있는 관계를 유지했나?
파룩: 나와 아크람 칸의 관계는 정말 결혼 생활에 비유할 수 있을 정도로 오래되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무엇을 위해 함께 고생하며 창작 작업을 하는 지를 명확히 해두어야 한다. 아크람과 의견 충돌이 있을 때마다 혹은 작업을 하다 지칠 때마다 나는 이렇게 말한다. “I’m not serving you, I’m serving the art (나는 네가 아닌 예술을 위해서 일한다.)” 표현하고자 하는 예술이 있기 때문에 아티스트가 있고, 프로듀서가 있고 또 행정가가 있고 관리자가 있는 것이다. 공동의 목표가 확실해지면 아티스트-프로듀서간의 관계에서 서로 물러날 때와 목소리를 높여야 할 때가 명확해진다. 한편, 아예 돌아서야 할 때도 있다. 서로의 커리어의 미래를 위해 정말 프로듀서-아티스트 간의 관계를 끝내야 할 때를 알고 제대로 마무리 지을 줄 아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질문자는 민간단체의 대표로서 7명의 무용수와 함께 성장하는 단계에 있다. 예술은 경제적 상황에 정말 민감하다. 한국 같은 경우 최근 몇 년간 세월호, 메르스 때문에 많은 공연들이 취소되었고 많은 예술가들이 큰 타격을 입었다. 국립단체가 아닌 민간단체를 운영하다 보니 이러한 사회, 경제 상황에 더욱 민감할 수밖에 없는데 각각의 연사분들이 어려운 위기를 타개해나가셨던 경험과 그 방법이 궁금하다.
제임스: 영국 무용계도 크게 다르지 않다. 나를 포함한 영국의 예술가들도 영국문화예술위원회(Arts Council England)의 지원금, 민간 후원, 온라인 크라우드 펀딩과 같이 운영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다각도로 노력하고 있다.
엘리: 더 플레이스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무용 전공자가 아니었기에 오히려 조금 더 색다르게 접근할 수 있었다. 민간 후원, 레지던시 사업, 교육 사업, 투어 등 다양한 수입원들을 생각해낼 수 있었다.
파룩: 공공 지원금, 혹은 민간 기업의 후원을 받는 경우에도 항상 그 돈의 ‘가치’에 대해 고민해 보아야 한다. 예전에 도로 건설 업체에서 아크람 칸 컴퍼니에서 협업을 제안하는 편지를 보내온 적이 있다. 우리 쪽 담당자들 모두가 ‘무용단이 도로 건설 업체가 무슨 관련이 있냐’고 의아해 했지만 나는 오히려 그 편지를 읽고 무언가 있으리라고 직감했다. 바로 그 회사에 전화를 걸었고, 우리에게 제안서를 보내온 사람들의 말을 들었다. 그들은 길을 만들어 사람들을 여행하게 하고, 우리는 공연이라는 매체로 관객들을 여행하게 한다는 이야기였다. 이렇게 그들과 우리의 가치들에서 교집합을 발견했고, 결국 그들은 그 후 3년간 아크람 칸 컴퍼니를 후원해주었다.
김서령: 공연 기획자로서 활동하면서도 가장 어려운 지점은 무용을 하고 있는 창작자들이 공생하기 힘든 시스템에 있다고 본다. 이전에 엘리가 언급했던, 극장 간의 네트워크를 통해 하나의 아티스트가 작업을 개발할 수 있는 케이스가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독립적으로 작품을 제작하는 무용 극장이 한국 무용계에는 없다. 레지던시를 할 공간도 몇 안되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해서 제한된 지원금을 위해 수많은 프로듀서와 안무가들이 신청하지만 필요 요건은 참 까다롭다. 창작 여건이 마땅치 않은 상황에서 항상 신작을 선보이기를 요구받고 있다. 공생이 가능한 기관, 극장 간의 협력이 더 활발히 이루어지면 좋지 않을까.
최석규: 이러한 상황에서, 지금 안무가의 창작 활동과 성장을 지원하는 기관으로서의 서울무용센터에 대한 기대가 굉장히 크다. 이 자리에 참석해주신 최재훈 서울무용센터 매니저님께서 서울무용센터의 비전과 발전 방향을 공유해주시길 부탁드린다.
최재훈: 무용 비전공자로서, 눈치를 보아야할 기관도 협회도 사람도 없는 것이 나의 강점이라고 생각한다. 비전공자이기에 무용에 대한 나름의 공부를 철저히 했고 또 무용계의 현실을 객관적으로 보려고 한다. 무용과 졸업생도 많고, 무용 관련 축제도 많은데 창작 생태계의 현실은 왜 이렇게 힘들까? 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다. 예고-예대-무용단 시스템이 굳혀져있고, 무용수들은 출신에 따라 정해진 라인을 타야하고 안무가로서 독립하기 힘든 시스템,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술 지원금 사업 제도가 더해져 생태계의 혼탁함에 일조했다고 생각한다. 장기적이고 공정한 지원 시스템이 없으니 신진 안무가들이 중견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말 무용의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안무는 무엇이고, 안무에 대한 연구와 창작을 도울 수 있는 기관으로서 성장하는 것이 서울 무용센터의 비전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