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은 음악이 반이다.
무용과 음악의 관계는 나라마다 조금씩 다르다. 중국은 경극의 구성요소로만 인식되던 무용이 독립된 장르로 분화된 것이 20세기 전반기다. 이때 최승희가 큰 역할을 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일본에선 가부키나 노래의 반주로만 쓰이던 샤미센이 악기로서 독립된 게 1963년이다. 굳이 햇수를 집어서 이야기 하는 것은 이때 처음으로 샤미센 연주로만 만들어진 레코드가 발매되었는데 당시 대단한 충격을 주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우리나라에도 이렇게 춤과 음악의 분화를 보여주는 게 바로 시나위로 흔히 통칭하는 기악곡이다. 시나위엔 기악과 춤이 씨줄 날줄처럼 엮인 흔적이 남아 있다.
모던테이블은 우리나라 현대무용계에서 평단과 대중의 주목을 동시에 받는 드문 팀이다. 구성요소로서 국악을 이용한 작업이 적지 않았지만 6월 5일 금요일 저녁에 국립국악원 풍류사랑방에 올려진 ‘속도’처럼 음악도 하나의 독립된 장르였다는 사실을 확인할 만큼 비중이 커진 것은 처음이었다. 국립국악원 민속악단 단장으로 안정되고 단단한 소리를 들려주던 김영길의 아쟁이 김재덕의 모던테이블에 화두 하나를 던진 셈이었다. 김재덕을 영민한 안무가로 기억하는 것은 그가 <다크니스 품바> 이후로 2011 <킥 KICK> <그래… 하지만 (RE : OK… BUT)>에 이르기까지 춤과 음악에 보여줬던 카리스마 덕분이었다. 그가 고안해낸 움직임이 더욱 빛났던 이유가 움직임에 내재한 음악을 해방하는데 굳이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없었던 점이다. 그가 작곡한 음악은 그대로 훌륭한 무대 음악으로 쓰였다. 거칠다고 생각되었지만 잃는 것 보다는 얻는 게 더 많은 선택이었다.
<킥 KICK>에서 판소리가 주요 요소로 쓰였지만, 판소리의 매력을 온전하게 느끼기 쉽지 않았다. 오히려 판소리가 해체 재구성된다는 인상이었다. 하지만 이번 김영길의 아쟁과 김재덕의 안무는 긴장감이 공연 내내 팽팽했다. 특히 공연 막바지에 이르러 호흡이 무뎌질 무렵 연주되기 시작한 김영길의 아쟁에 얹어진 김재덕의 독무는 손에 땀이 날 정도로 아슬아슬했다. 아쟁 시나위가 아쟁 산조처럼 들렸다 말다 하는데 리듬감이 그야말로 ‘속도’ 그 자체였다. 김백봉의 장구춤처럼 기술적인 이유로 녹음음악을 선호하는 경우도 있지만, 전통춤 무대는 시나위로 즉흥성이 도드라지는 생음악을 쓰는 게 일반적이다. 오랜 세월 전통춤 무대에서 인정받았던 민속악의 대가답게 김영길의 아쟁은 공연 내내 기운이 서려 있었다.
일상에선 속도와 속력이란 단어가 혼재되어 구분 없이 쓰인다. 아마 이번 공연을 기획할 때도 속도를 공연 제목으로 쓰면서 두 단어의 차이를 알고 선택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묘하게도 속도와 속력의 의미를 구분해야 할 공연이기도 했다. 양적인 개념인 속력에 방향성을 더한 것이 속도다. 그동안 모던테이블은 지칠 줄 모르는 속력으로 달려왔다. 관계에서 발견되는 소통의 여러 모습을 빠르거나 느리게 또는 느긋하게 표현하는데 초점을 맞추었었다. 일관적인 화두여서 그랬는지 공연이 비슷비슷하게 느껴진다는 지적에 김재덕은 철학자 후셀을 인용하며 ‘사과가 여기 있다. 그런데 뒤돌아보고 나서 다시 본 사과는 이전의 사과와 똑같은 사과인가?’라며 동일성이란 개념에 의문을 다시 던진 인터뷰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꽤 일리가 있었지만, 그가 안무한 다양한 작품들에서 일관적인 방향성을 읽어내는 것이 어려운 일임엔 분명했다.
김재덕이 싱가포르의 T.H.E 댄스컴퍼니와 <그래… 하지만! RE: OK… BUT!> 무대를 만들어서 올렸던 2013년 가을 공동안무가였던 퀵쉬분(KUIK Swee Boon)과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퀵쉬분은 싱가포르에서 현대무용을 주로하는 T.H.E 댄스컴퍼니의 예술 감독 및 안무를 담당하고 있다. 유럽 무대에서 주역 무용수로 활동했던 이력이 있어선지 그의 말에는 노련한 함의가 있었다. <다크니스 품바>를 통해 김재덕과 인연을 맺은 그는 김재덕의 안무는 강렬한 느낌을 주는 데다 아시아적인 느낌이 강하다면서, 특히 그의 뛰어난 작곡능력에 질투를 느낄 지경이라는 찬사를 늘어놓았다. 그가 김재덕과 5년 넘게 꾸준한 관계를 맺어오는 걸 지켜보면서 김재덕의 강렬한 에너지가 나이답지 않게 노련하게 보였던 것은 퀵쉬분 때문 아니었을까? 란 추측이 나름 합리적이라 생각되었다. 마찬가지로 한계도 분명하게 보였다. 여전히 소통의 문제가 가장 클 수밖에 없다.
이번 ‘속도’가 이전 공연의 연장선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처럼 보였던 데는 아마도 ‘방향성’의 결이 느껴졌기 때문인 듯 보였다. 그 전 공연의 방향성은 퀵쉬분의 이야기처럼 아시아적인 테두리 안에서 였다. 충돌을 통해 우연한 발견을 기대할 순 있지만 안무의 깊이가 차곡차곡 쌓이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 의미에서 역설적이게도 이번 공연은 우연성이 많이 덜어내어 졌다. 시나위에 내재한 음악의 무늬를 현대무용으로 어떻게 끄집어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에 좀 더 천착하게 되면서 김재덕은 자신의 기존 안무방식의 관행에 한 번쯤 의문을 던지지 않았을까 싶다. 공연이 끝난 뒤 김재덕은 <다크니스품바>와 <킥 KICK>에서 경험했던 터닝포인트를 이번 <속도>에서도 겪게 될 것 같다고 말을 한 적이 있다. 이번 무대를 통해 확실한 것은 이제 그의 작품에서도 음악이 발전적으로 분화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방식으로 꾸준히 이어간다면 이전처럼 카리스마 넘치는 무대 장악력은 덜하겠지만 모던테이블의 관객 장악력은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무대로 사용되었던 국립국악원의 풍류사랑방은 좁은 무대라서 안전을 위한 운영상의 원칙인지는 모르겠지만 화이트조명 이외의 구성을 본 적이 없다. 연주 공간으로서는 무난하지만, 무용수들 특히 현대 무용수들에게는 좀 답답해 보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