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무용예술학회 제20차 학술발표회가 4월 18일 토요일 이화여자대학교 LG컨벤션홀에서 있었다. 학술발표회 주제는 “춤과 철학”이다.
최근 한국에서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는 시점에서 이루어진 이번 학술발표회는 춤과 철학의 관계가 분리될 수 없다는 자명한 사실을 확인하게 하는 자리였다. 춤의 학술적 연구가 역사나 인물에 대한 탐구에서 벗어나 몸의 근원적 질문을 던지는 철학적 탐색을 시도하는 것은 학계를 넘어 현재 당면한 한국 무용계 전반의 문제들을 풀 수 있는 해법이 아닌가한다. 철학과 교육학 교수들이 바라보는 춤에 대한 철학은 새롭고 신선했다. 학제간의 융합이 이루어지는 최근의 동향은 두 학제 간에 시너지효과를 충분히 줄 수 있다.
춤과 철학을 넘어 춤과 건축, 춤과 의상, 춤과 사진, 춤과 영화 등 더 폭넓은 학제간의 융합과 학술발표회가 이루어져야 한다. 뿐만 아니라 글로벌한 시대에 세계 춤계가 같은 질문 속에서 춤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은 춤 발전을 위해 지극히 바람직한 현상이다. 동서의 연구자들이 난상토론을 하며 산적한 춤계의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국제적 학술대회는 앞으로도 절실히 필요하다. 학술발표를 성과로 바라보지 않고 내용을 진지하게 토론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으면 한다. 학술발표 후 난상토론은 시간을 정하지 않고 충분한 토의가 이루어져야 한다.
몸에 대한 철학적 물음은 결국 왜 춤을 추는지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던지게 하며 이러한 질문들은 역사와 인물을 폭넓게 이해할 수 있는 지름길이다. 편협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우주공간에 존재하는 나와 너 그리고 그 사이에서 창조되는 무한한 가능태가 살아있는 물질로 움직일 때 우리의 시각은 확장되고 이해의 폭은 무한대가 될 것이다.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이해가 아닌, 그 이면에 내재되어 있는 것들을 볼 수 있는 시각은 내면에 대한 끝없는 탐색과 물음 속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
발제는 임현식교수의 ‘루소가 본 피나 바우쉬의 예술세계’부터 시작했다. 교육학과의 임현식교수는 피나 바우쉬의 영화 <피나>를 보고 감명을 받아 논문을 쓰게 되었다고 했다. 논문은 교육의 사회화로부터 벗어 날 수 있는 힘은 ‘생각하는 힘’과 ‘미학적 힘’이라고 강조했다. 그 내면에는 루소가 말하는 ‘자율성’과 ‘양심’의 자기표현인데 이러한 살아있는 인간의 의지는 창조행위를 통해서 그 위력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인간 내면이 가진 존재의 힘, 즉 창조적 자기표현을 거침없이 할 수 있는 두려움 없는 행동은 바로 생각으로 비롯되는 ‘미학적 힘’ 때문이다. 이 미학적 힘은 감동을 끌어오고 잠든 영혼을 일깨우며 드넓은 우주를 편력하게 한다. 피나 바우쉬는 이러한 미학적 힘을 추동할 수 있는 깨어있는 무용가였으며 이런 미학적 힘은 나를 깨우고 움직이게 하며 창조하게 한다는 내용이었다.
우리가 인문학을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바로 생각하는 힘. 사회적 관습으로부터 과감하게 벗어나 자기에 대한 믿음과 확신으로 당당히 자기 생각을 표출할 수 있는 자유, 두려움 없이 세상과 마주할 수 있을 때, 예술가의 표현은 ‘순수’로 귀결된다. 한 치의 의심도 없는 나에 대한 믿음과 확신 속에서 예술가는 새로운 실험과 도전을 단행한다. 거기에는 생각하는 힘과 미학적 힘이 작용한다.
린다 칼드웰은 “춤 만들기는 곧 철학하기이다”라는 명제를 토대로 발제를 했다. 린다는 텍사스대 무용학 박사과정 코디네이터다.
그녀는 20세기를 살아오는 과정에서 변화된 춤의 환경 속에서 그녀 스스로가 어떻게 변화되고 수정되었는지에 대하여 언급했다. 린다의 춤에 대한 생각을 변화시킨 건 알윈 니콜라이, 소콜로우, 콜링우드, 랭거 등의 위대한 춤 철학자들이었으며 그들의 철학적 물음 속에서 그녀의 생각은 매번 변화되었다. 생각을 버리고 몸에 충실 하라는 알윈 니콜라이를 넘어, 춤 만들기의 결과보다는 과정의 탐색에 집중하라는 로버트 던을 비롯한 저드슨 댄스 무용수들, 그리고 몸과 정신의 분리를 거부하고 소메틱한 전인적인 춤을 넘어, 이제 춤은 새로운 공간적 관계성 속에서 리좀적 생각을 추구하는 변화의 과정 속으로 린다는 통과했다.
리좀적 사고는 감각의 세계이다. 이는 “처음도 없고 끝도 없다. 이는 항상 가운데, 사이에 , 간존재에, 막간에 있다”는 말로 정의된다. 춤 만들기를 철학하기로 실천하기 위해 새롭게 변화하는 방식으로 의미망을 만들어내는 무용가들은 세계의 의미 만들기에 참여하고 있다.
이 논문은 ‘노자’를 생각하게 한다. 들뢰즈의 기관 없는 신체는 영락없이 ‘노자’다. 앞도 없고 뒤도 없는 우주의 핵과 같은 ‘기’는 동서양이 공유하는 감각의 세계와 창조의 근원이다. 30개의 수레바퀴 살이 모여 바퀴가 돌아갈 수 있는 것은 중간에 허의 공간이 있기 때문이라는 노자 철학의 ‘허’는 린다의 논문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탱고를 추는 사람이 한 말이다. “너무 타이트하게 붙지마. 탱고는 우리 사이에 있는 삶과 함께 춤추는 것이야.” 자로 재고 사이를 맞추는 식의 고착된 구조로서 춤을 추는 것이 아니라 사이와 공간의 무한한 가능성 속에서 춤은 창조되고 추어진다는 이 리좀적 사고는 시대와 역사의 흐름 속에서 춤의 새로운 철학적 물음들을 생성할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서울대 철학과 교수 김상환의 “온몸의 춤, 온몸의 논리”는 김수영의 시학에서 무용학으로 변화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온몸으로 “스스로 도는” 팽이의 힘을 온몸의 춤으로 체화한 논문이었다. 발제문 전체가 몸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 있었다. 그것은 한계를 넘어 새로운 형태 변화의 시련을 극복하고 통과하는 과정에서 온몸에 의한 온몸의 이행을 경험하게 했다. 그는 공동체가 제약하는 정치적 자유와 개인의 절대적 자유의 불균형을 넘어서기 위한 전략으로 온몸에 의한 온몸의 이행은 무제약적인 내면적 자유 속에서 유한한 정치적 자유가 확장된 형태로 다시 탄생하게 만드는 실천적 의지와 같다고 했다. 우리의 몸은 자신이 도달한 한계를 넘어 새로운 형태변화의 시련을 통과해야 비로소 무한대의 혼돈을 통과할 수 있다.
이는 김말복 교수의 발제에서 나온 윌리엄 포사이드의 작품 <문제의 사건>에서 드러나는 ‘중력의 악령’과 적극적으로 씨름해 보고 ‘그것을 뛰어넘어 춤을 추고, 또 춤을 추며 저편으로 건너가는’ 그런 니체의 초인의식과 닮아 있다. 이는 자기를 넘어서는 용기이며 믿음이며 도약이다. 김수영의 시 <풀>에서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는 마지막 부분의 황홀경과 닮아 있다. 무한대의 혼돈과 모호성 속에서 새로운 창조는 이루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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