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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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비평계 공통적인 열악한 원고료 수준
사회자는 우선 각 장르의 비평환경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비평가 규모, 등단절차 상의 문제, 비평지면의 상황 등에 대해 각 장르의 특성과 상황을 이야기 하는 것으로 라운드테이블이 시작되었다. 연극평론가이자 동아방송예술대학의 초빙교수, 사진작가와 번역가로써 왕성한 활동을 하고 계시는 이태주선생님께서 지난 7-80년대 일간지에서 연극비평이 사라지기 시작할 때, 신문사를 찾아가 일간지에 연극평론이 실려야 한다는 것을 역설했던 사건으로 이야기를 풀어 나가셨다. 일간지가 가진 평론 전달의 속도와 관객에게 미치는 영향력을 고려할 때 일간지에서 연극비평이 사라진다는 것은 사회에서 연극에 대한 관심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고, 이것은 바로 연극관객의 감소로 이어질 위험이 예상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신문 역시 기업으로서 상업주의와 여러가지 편의성에 따를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공정한 평가를 제공하는 지면 역할을 스스로 포기한 적도 많았기 때문에 일간지에서 연극비평이 사라진 것은 많은 의미를 함축한다는 것을 알려주셨다. 연극비평계는 100여명의 비평가가 연극평론가협회를 통해 활동하고 있으며 서울연극제 기간에 연극평론 워크샾을 열어 비평가를 위한 교육과 등용문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연극평론계도 대학교수들이 활동을 하는 경우가 많으며 이론과 비평, 학계와 비평계가 인접분야로 밀접하게 연계되고 있다. 이는 비평활동이 주가 되기 보다는 교수의 역할에 하나 더 부과된 것처럼 비평을 약화시키게 되고 비평만을 업으로 삼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해 준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연극 비평계의 가장 큰 문제는 창작극이 점차 기운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이고, 이는 바로 평론계의 열기를 식히는 주된 원인이 되고 있음을 강조하셨다.
음악평론가 이석렬선생님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음악분야 현장평가위원으로의 활동을 바탕으로 음악평론계에 대한 문예위 지원금이 비평가의 원고료와 직접 연결된 것 보다는 평론과 관계된 서적발간에 300만원에서 700만원 이내에서 지원되고 있는 상황을 전해주셨다. 대부분 동인지와 원로들의 서적 발간에 선별적으로 지원이 되고 있으며 공연에 대한 지원에 비하면 평론가에 대한 열정을 복돋아 주고 평론활동의 사회적 인지도를 높이는 차원에서 볼 때 열악한 수준으로 볼 수 있다. 음악은 틀래식쪽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일간지에서 콩쿨과 관련된 기사에 지면을 꾸준히 할애하고 있으며 이는 기자들이 주로 활동하고 있는 편이다. 전문적인 평론가는 2-30분 정도 활동하고 있으며, 음악의 특성 상 애호가에서 평론가로 성장하는 경우가 많으며 칼럼니스트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저변도 상당히 넓다고 볼 수 있다. 전문적으로 평론을 하는 분들은 음악이론을 전공한 분들이 많으며 1년에 한번 평론상을 통해 공식적으로 등단의 기회가 주어지고 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에 합류한 국악평론가 윤중강 선생님은 현장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면서 직접 방송, 연출, 예술감독등의 일과 평론을 병행하는 본인의 상황을 소개한 후 비평활동의 주체의 문제 보다는 비평활동이 궁극적으로는 예술을 발전시키기 위한 활동이니 만큼 평론가로써의 축적된 안목과 판단을 가지고 보다 나은 공연과 창작물을 만드는 것도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역설했다. 85년 본인이 평론가로 데뷔한 이래 국악에서 평론가란 직업이 처음 생긴 것이나 마찬가지이고, 79년 KBS국악대상에서 공연자가 아닌 평론가로써 상을 받은 것이 처음이었다. 국악평론의 영역에 대해서도 과연 독립된 분야로써 가능한가에 대한 문제제기가 있어 왔지만 우리나라의 특수한 상황에서 형성된 평론의 분야라고 생각한다. 다른 평론가로는 5-10명의 국악 평론가가 활동하고 있으며 국악의 특성 상 전통음악분야가 중심을 이루고 무형문화재들이 중요한 공연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미 정통성이 확보된 공연이기 때문에 작품에 대해 논하기 보다는 연주자, 연행자에 대한 평론이 중심이 되고 있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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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이 활성화 되어야 공연계도 평단도 산다.
평론계의 이런 좋지 않은 상황은 평론작업의 전문성을 보장해주지 못하고 직업화할 수 없게 되는 가장 큰 원인임이 공통적으로 드러났다. 그래서 평론가들은 평론만으로는 먹고 살 수 없으며 그러다 보니 교수라는 안정된 직업을 주로 하고 전문적인 평론을 할 식견을 가진 사람들이 오히려 평론 활동을 주로 하기 어려운 상황인 것이다. 평론활동의 전문성에 대한 보호가 열악한 상황이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치열한 논쟁이 활성화 되지 않는 것으로 이어진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태주선생님께서 강조해 주셨는데 과거에 비해 현재의 공연계는 건강한 논쟁이 사라졌으며 바로 이런 상황은 관객과 극단, 양측을 자극하는 평론의 역할이 줄었음을 말해준다. 평론가가 극단과 다른 평론 입장에 논쟁을 제기하고 그것이 이슈화되어 관객에게 연극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연극의 사회적 의미와 위치에 대해 고민하게 만드는 것이 다시 활성화되어야 할 평론의 역할인 것이다. 그런 논쟁들이 건강하게 활성화 될 때 분야의 창작 활성화와 뿐 아니라 사회와 관객의 관심이 활성화 될 수 있다는 것을 역설하셨다. 교수와 여자 중심의 평론은 섬세하고 아카데믹한 측면은 강화될 수 있으나 자칫하면 평론이 가져야 할 강한 문제제기와 논쟁을 주도하는 측면에서는 약화될 위험이 많으며 거기에 평론가가 직업이 되지 못하는 상황까지 겹쳐 자연스럽게 문제제기 중심의 논쟁을 사라지게 만들고 있는 실정인 것이다.
일간지에서 평론가의 전문적인 평론이 사라진 후 사회 전반의 상업적, 오락 문화가 만연하는 풍조를 다시 돌아보게 할 지면이 사라진 것이나 마찬가지 이고, 우리사회의 문화가 어디로 가고 있는 지에 대해 평론가들이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는 상황은 사회 전체로 보아도 바람직하지 못한 상황으로 보인다. 무용의 경우도 대부분의 평론가들이 잡지라는 매체를 운영하고 있음으로 인해 무용가들과 광고주와 고객의 관계로 밀착되어 있기 쉽고 이것이 바로 객관적인 평론의 입지를 위협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역으로 무용가들이 운영하고 있는 잡지들은 평론가를 키우고 고용한다는 개념으로 활용하고 있는 상황 역시 평론가의 독립과 고유의 기능을 훼손할 우려가 높은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건강한 논쟁을 던지고, 공연자와 평론가, 평론가와 평론가, 관객과 평론가의 왕성하고 자유로운 토론의 장이 열리는 것은 쉽지 않아 보인다.
평가가와 창작현장, 어느 정도의 거리감이 필요한가?
평론가와 창작현장과의 관계뿐 아니라 ‘거리감의 문제’는 장르별 특성에 따라 여러 가지로 나타난다. 단순하게는 평론가가 창작현장 경험이 결핍되어 있는 것에 대한 우려에서부터 평론가가 기획, 제작, 창작에 직접 참여하는 것에 대한 우려까지 그 스펙트럼은 다양하다.
무용계에서 가장 흔한 담론 중 하나는 평론가들이 무용창작의 과정과 그 내용을 잘 모른 다는 것이다. 무용가들은 우리의 비평이 무용가들의 세계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비평이며, 그것이 무용가들에게 현실을 인정해 주지 않고 이상적인 것만을 강요하는 부담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와 관련된 문제에서 참여한 평론가들은 비평의 대상은 창작의 상황이나 조건이 아니라 작품 자체에 있기 때문에 비평가가 잘 알아야 하는 것은 결과물로써의 작품이라는 것에 의견을 모았다. 그것은 자칫 냉정해 보이는 지점일지는 몰라도 비평의 대상을 작품으로 규정하지 않는다면 비평이 내려야 할 미적 가치판단의 역할이 성실히 수행되기에 혼란스러운 지점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론 비평작업 안에는 해당 장르에 대한 창작과정과 관련된 깊이 있는 이해와 통찰이 포함되어 있어야 함은 물론이다. 한국춤비평가협회의 이순열 공동대표께서는 이 질문에 대해 하나의 작품이라는 것은 한 생명이 만들어 지듯이 배아에서부터 수정의 과정을 거쳐 어떻게 성장 발달하는 지에 대해 섬세하게 볼 줄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셨다. 무대에 올려진 것만으로는 그 전체를 다 아는 것은 무리가 있으며, 그 하나의 관점 만으로는 작품의 풍부한 생명성을 다 짚기는 어렵다는 말씀이셨다. 59년 한국에 자닛 사하르 발레단이 내한 했을 당시 선생님께서 봤던 무대 뒤 광경은 또 다른 시선으로 춤 공연을 바라 보았던 충격적인 미적 경험이었음을 설명하셨다. 당시 외국무용단의 방한공연이 흔치 않던 시절이었음에도 그 프랑스 무용단은 낯선 사람을 전혀 개의치 않고 자신의 작업에 열중하는 모습에서 공연보다 더 많은 감흥을 받았던 기억을 전달해 주셨다. 무대 뒤는 개방되어야 하며 리허설 과정도 공개되어 관객들이 공연에 대한 또 다른 체험을 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역설하였다. 전경이 생기기 까지 그 뒤에 보이지 않는 후경이 중요하다는 것을 아는 것은 작품을 바라볼 때 몹시 중요하다는 말씀이셨다.
또 무용을 안 해 본 사람들이 평론을 하는 것에 대한 문제는 오히려 무용을 했던 안 했던 간에 과연 춤에서 봐야 할 것을 볼 능력이 있느냐 아니냐가 더 중요한 문제라고 강조하셨다. 비평가의 역할이 보통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 그것을 잘 헤아려 볼 줄 아는 것에 있는 것이지 무용 경험이 있느냐 아니냐에 따른 문제는 아니라는 의견을 피력하셨다.
국악평론가 윤중강선생님께서는 비평의 궁극적 목표가 좋은 공연을 만드는 것에 일조하는 것이라고 할 때 본인은 그것을 자신의 창작활동으로 이어가는 것으로 비평의 내용을 현장화하는 활동에 대한 의견을 주셨다. 2000년대는 이미 비평을 원하는 시대라기 보다는 좋은 콘텐츠와 창의적인 공연물을 원하는 시대이다. 게다가 엄밀히 비평은 직업이 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수 많은 작품을 관람하고 비평한 경험에서 축적된 좋은 작품과 공연에 대한 견해를 창작에 바로 투여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는 것을 역설하였다. 무용계에서도 비평가들이 기획과 제작에 참여하는 모습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가 있으나 이는 비평가가 직업이 될 수 없다는 현실을 인정해야 하는 지점에서 받아들여 져야 하며, 그런 겸업이 딱히 부정적이라고 볼 수 만은 없는 지점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오히려 겸업의 상태가 문제가 아니라 그 활동이 공연계와 비평계를 더욱 활성화 시키고 올바른 자극 관계를 유지하느냐 아니냐의 문제로 짚어져야 할 것이다. 본인이 비평을 하는 내용과 다른 활동을 하는 내용이 이율배반적이거나 모순되는 활동을 하고 있거나, 비평가가 생성해내는 문제의식과 논쟁점을 위배하는 활동이라면 문제는 바로 그 지점에서 생겨나는 것이지 겸업이나 활동의 다양성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비평의 관점과 다른 활동의 관점이 연장선 상에서 통일되는 것이 중요하다.
연극, 음악, 국악 등 공연예술분야의 평론가들과 서로의 상황에 대해 공유하고 교류하는 시간은 많은 유익함을 주었다. 전반적으로 확인된 것은 비평의 사회적 역할이 많은 변화의 기로에 서있는 현실이었다. 비평가의 위상은 위축되었지만, 그것을 학계나 창작현장에서 대체해 내지 못하고 있으며 비평가는 허약한 생존기반 위에서 부유하고 있다. 사회는 보다 빠르고 소비중심의 문화에 대해서만 촉각을 세워가고 있으며 그에 대해 비평가의 동의만을 구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에게 필수영양소와 같이 필요한 것은 비평적 사고임을, 건전한 비판임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사회 상황에 따라 비평가의 존재는 유동적일 수 있으나 비평정신은 사라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사회가 비평가를 보호해 주고 있지 못할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