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대무용단이 송년기획으로 마련한 <춤이 말하다>(12월 19-25일,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는 렉처 퍼포먼스(Lecture Performance) 형식의 공연으로 무용가 6인이 출연해 몸과 춤, 삶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지난해에는 한국무용의 김운태, 발레의 김주원과 김지영, 현대무용의 이나현과 이선태, 스트리트 댄스의 디퍼와 안지석이 출연해 주로 본인들이 생각하는 춤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면, 올해 공연에서는 한국전통춤의 오철주, 현대무용의 차진엽과 김설진, 발레의 김용걸과 김지영, 스트리트 댄스의 디퍼가 출연해 춤 자체 보다는 좀 더 인간적인 이야기, 조금은 감추고픈 무용수들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작년에 이어 올해에도 출연한 김지영은 "지난해 준비과정은 힘들었지만 무대 위에서는 관객들과 소통하는 것이 재미있었다. 또 8일 공연 중 4일만 공연해서 아쉽기도 했고 그래서 이번에는 제대로 작업을 하고 싶은 생각에 다시 출연하게 되었다"고 털어놓았다. 디퍼는 "부담이 되어 거절할까 고민도 했었는데 저에게는 너무 좋은 기회이고 저를 발전시키는데 도움이 많이 되어서 출연했다"고 말했다.
극장 로비에는 공연 1시간 전부터 줄서서 기다리는 관객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은 1층은 지정석이지만 2, 3층은 자유석으로 운영되기 때문에 1층을 예매하지 못한 관객들이 조금이라도 좋은 자리에서 보기 위함일 것이다.
객석에 들어서면 무대 여기저기에 널려있는 연습복, 영양제, 물병, 토슈즈 등 무용수들의 가방에 들어있을 법한 소품들이 보인다. 공연은 6명의 무용수들이 모두 무대에 나와 각자의 소품을 챙기면서 시작된다.
가장 먼저 자신의 이야기를 꺼낸 무용수는 김지영. 무용수들에겐 어울리지 않는 마이크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어느 순간부터 무대에 오르기 전 긴장감에 생명이 단축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는 그녀는 우아한 발레 동작들을 하나 둘 무대 위에 선보이기 시작했다. 힘들어하면서도 본인이 계속 춤을 추는 이유를 설명하면서 “할 줄 아는 것이 이것 밖에 없더라고요”라고 이야기 할 때는 동화 속 주인공처럼만 보였던 발레리나가 인간적으로 느껴졌고, 그 이야기를 듣고 보는 그녀의 움직임이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디퍼는 “더욱더 고난이도의 움직임을 위해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았는데 부상 이후로는 좀 더 자신의 몸에 맞는 움직임을 연구하게 되었다“면서 한 쪽 팔에 깁스를 한 채로 눈을 뗄 수 없는 화려한 움직임을 선보였다.
와이셔츠 위에 연습용 풀치마를 입고 한국전통춤의 아름다움을 설명한 오철주는 매우 단아한 움직임을 보여줬고, 무대에 선 본인의 모습을 여자로 오해하고 분장실까지 찾아와 확인하고 간 한 관객과의 에피소드를 들려주기도 했다.
그 다음 무대에 오른 무용수는 현대무용가 차진엽. 먼저 가냘픈 몸으로 굉장히 파워풀한 움직임을 보여줬다. “과거에 괜한 자존심 때문에 여자로서는 소화하기 힘든 남성무용수들의 동작을 어떻게 해서든지 해보이려고 노력했고, 그래서 그런지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독한 여자로 생각한다”고 말문을 연 그녀는 처음 보여줬던 움직임과는 다른 매우 부드럽고 유연한 춤으로 여성스러움을 부각하며 대조적인 모습을 보였다.
김용걸은 훌륭한 무용수와 나이와의 관계에 대한 고민을 이야기하면서 “무용수의 나이가 춤의 아름다움과 무용수의 열정을 감출 수는 없다”고 결론내린다. 그는 모리스 베자르 안무의 솔로춤 <아레포>를 춘후 “파리오페라발레단 시절 승급 오디션에서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이 춤을 추었다”며 치열한 경쟁의 연속인 직업 발레단의 냉혹한 현실을 들려주기도 했다. 매일 아침 <돈키호테>의 ‘바질’ 역의 춤을 추면서 자신을 테스트한다는 김용걸은 바질의 솔로 바리에이션을 멋지게 보여주며 무용수로서의 건재를 과시했다.
마지막으로 등장한 현대무용의 김설진은 자신의 작은 키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예전에는 자신을 더 커보이게 하는 움직임을 만드는데 노력했는데 요즘에는 움직임의 본질적인 질감에 집중하고 있다”며 강약, 리듬 등을 바꿔가면서 같은 동작이 다르게 보이는 움직임을 보여줬다. 그리고 본인의 아팠었던 경험을 이야기 하면서 그 때 느꼈던 느낌을 그대로 춤으로 표현했고, 관객들은 그의 표정연기와 움직임에 빨려 들어갔다.
자신의 이야기를 곁들인 무용수들의 움직임은 매력적이었고, 대극장에서는 당연하게 보였던 무용수들의 테크닉컬한 움직임들이 소극장 무대에서는 한 동작, 한 동작 모두 특별하게 다가왔다.
저녁 모임으로 지인분들과 함께 공연을 보러 왔다는 박정례(59세)씨는 “정말 재미있게 봤다. 발레리나가 예쁘다는 생각은 했었는데 발레리노가 이렇게 멋있는 줄은 몰랐다. 가까이서 볼 수 있어서 정말 좋았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이상화(40세)씨는 “이해를 못할까봐 무용공연은 좀 겁이 났었는데, 이번 공연을 보면서 다른 무용공연도 볼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또 정찬영(42세)씨는 “소통을 중요시하는 공연 같았고, 무용을 전공하지 않은 우리 수준에 딱 맞는 공연이었다. 움직임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감동적이었다”고, 김은지(가명, 27세)씨는 “무용공연을 많이 보진 않았는데 진솔한 이야기도 많이 해주시고, 춤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보여서 굉장히 좋았다”며 소감을 밝혔다.
이번 무대는 관객의 입장에서는 재미있는 공연이었지만 무용수들의 입장에서는 어려운 공연이었을 수도 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가냘픈 몸으로 파워풀한 움직임을 보여줬던 차진엽은 "사실 지금은 예전과 같은 춤을 추진 않는데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예전에 췄던 춤을 다시 끄집어내는 것이 힘들었다. 10년 전 자신의 사진을 보는 것이 부끄럽듯 당시 유행했던 춤 스타일을 따라가고자 했던 내 모습이 불편했다. 무대에서 이야기 했던 남성의 춤, 여성의 춤으로 보기 보다는 차진엽이라는 무용수가 예전에는 저런 춤을 췄었는데 지금은 자신에게 맞는 춤을 찾아가는 과정으로 봐주셨으면 한다"라고 말했다.
김설진은 "굳이 알리고 싶지 않은 것들을 이야기 한다는 것이 힘들다. 또한 약 70회 정도 했던 작품의 일부분을 이 작품에서 하는 거라서 감정을 컨트롤 하기가 쉽지 않다. 공연이 끝나고 나면 진이 빠지고 자기 최면에 걸린 듯 아프기도 하다. 하지만 무대 위에서 대사를 한다는 것은 재미있는 경험인 것 같다"라며 출연 소감을 들려주었다.
이번 공연을 연출한 안애순 예술감독은 ‘무대 위에서 말하는 것을 어색해하는 무용수들을 위해 끊임없이 대화하고, 무용수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관객들에게 제대로 전달 될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했다.
국립현대무용단의 기획을 담당하고 있는 방형일은 “처음 기획단계에서는 일반 관객들의 호응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 못했다. 기획하다보니 말하는 무용수라는 렉처 퍼포먼스 형식이 가족과 함께 혹은 연인과 함께 볼 수 있는 공연, 현대무용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공연으로 인식되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일주일간 진행되는 이번 공연이 거의 매진인데 대해 그는 “작년에 평이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좋았다. 그 때 보셨던 분들이 다시 찾아주시기도 하고, 출연진들에 대한 팬덤도 작용한 것 같다”라고 답했다.
24일 공연을 본 춤비평가 방희망은 “무용수가 누가 나오느냐에 따라 다른 작품이 될 수 있는 포맷을 만들었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하나 주제의식의 측면에서는 무용수들 각자의 이야기가 탄탄한 구성력을 가지고 하나의 주제로 정리되지 못했다는 점에서는 아쉽다”라고 촌평했다.
25일 공연을 보았다는 춤비평가 장광열은 “춤에 대한 교육적인 역할과 함께 몸을 매개로 하는 무용예술가로서의 댄서에 대한 이면을 보여주고, 예술가와 관객이 인간적인 소통을 나눈다는 점에서 춤상품으로 성공한 기획공연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는 무대였다”며 향후 전개양식에서의 차별화된 컨셉트와 보다 세밀한 연출력의 보완 필요성을 지적했다.
1990년대 후반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해설이 있는 발레> 공연이 발레 관객층을 확대하는데 기여했다면 <춤이 말하다>는 무용 분야 전체의 관객층을 확대시키는 춤 상품으로 발전하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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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 마니아가 본 <춤이 말하다>
겸손한 100분간의 대화
노오란 포스터에 커다랗고 딱딱한 검은 글씨로 ‘춤이 말하다’라 쓰여 있고, 여섯 명의 이름이 곳곳에 나열되어 있다. 무용을 전공하거나, 관련계통에 있거나, 특정 무용수의 팬이 아니고서는 이름만을 보고 그 아티스트를 연관시키는 것은 일반 관객으로서 쉽지만은 않다.
이렇게 처음엔 국립현대무용단의 송년기획이라는 짧은 정보와 딱딱한 포스터만으로는 큰 호기심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하지만 100분의 역사적인(?) 시간을 보낸 뒤, 여섯 명의 이름은 한국무용, 현대무용, 발레, 비보이 등 각 장르의 브랜드가 된 것 마냥 정확하게 머릿속에 각인되었고 가슴속에 깊은 여운을 남겼다.
오철주, 차진엽, 김설진, 김용걸, 김지영, 디퍼는 사실 각 장르를 대표하는 유명 무용수들이며 선생님이고, 감독이다. 다가오면 90도로 인사를 해야만 할 것 같은 장인들이 관객들과 고통을 나누며 소통을 했다.
공연시작 전, 바닥에 널려진 무용수의 가방 속 소지품은 우리에게도 눈에 익은 연고와, 요가매트, 붕대와 물통이었다. 그리고 한껏 멋진 장면을 보여주다가도 조금은 눈가를 젖게 만드는 무대 뒤 그들의 이야기가 있었다. 또 그들들 자신만의 고독한 시간과 가슴 떨리는 순간들에 대한 이야기로 한 걸음, 한 걸음씩 관객들에게 다가왔다.
발레리노의 보기 민망한 타이츠를 열광으로 뒤바꾸고, 강하게만 보이던 현대무용의 몸부림을 아름다운 여성의 유혹으로 보이게 했다. 멋있게만 보이던 비보이의 춤을 보면서 혹여나 그가 다칠까 가족처럼 그의 건강을 걱정하는 관객들을 느꼈다.
100분 뒤, 이들이 있기에 무용은 더욱 발전되고 지속되어야 한다고 여기게 되었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역사적인 무대를 목격했음에 감사했다. 그리고 공연장을 나오며 다시 한 번 마주친 노오란 포스터, 고개를 낮추고 소통하려는 국립현대무용단의 겸손한 포스터 앞에서 나조차도 겸손해졌다. (글_장수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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