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공연예술센터가 마련한 2014 마로니에여름축제의 주제는 ‘여가혁신, 엉뚱상상으로 내 안의 원시인을 깨우고 내 안의 진짜 나를 만나다’였다. 축제 프로그램에 포함된 두 편의 춤공연 작품을 중심으로 현장을 스케치 했다.(편집자 주)
마로니에 축제에서 선보인 춤 장르의 공연은 〈Forget 츄-but I will archive you〉(여민하 윤상은 최승윤 공동창작, 8월12-13일,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와 안은미컴퍼니의 시민참여형예술프로젝트 〈Ok, Let’s talk about SEX〉(8월16-17일,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이렇게 두 편이었다. 두 편의 춤 공연은 제작 편수에서는 다른 장르보다 적은 편이었지만, 예술가의 입장과 보통 시민들의 입장 양쪽을 아우르면서 주제에 접근했다는 점에서는 부족함이 없었다.
여민하 윤상은 최승윤 〈Forget 츄〉
〈Forget 츄〉는 ‘제도권에서 주류 교육을 받고도 한국 공연예술의 잉여가 되었다’고 스스로를 소개한 여민하, 윤상은, 최승윤 세 사람이 자신들이 거쳐 온 클래식부터 컨템포러리까지의 모든 작업을 재연해보인 공연이었다.
초반에는 이번 시즌 국립현대무용단이 선보였던 <춤이 말하다>나 <우회공간>과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보통 관객이 무언(無言)의 춤 공연 한 편으로 무용가의 내면까지 속속들이 들여다보기란 어려운 일이고 안무가들도 표현의 한계를 느끼면서 발화(發話)하는 공연들이 늘어나는 추세이다.
이번 공연은 <춤이 말하다>에서 무용수들이 각자 자기 세계의 한계를 고백하며 매너리즘을 경계해야 하는 작업의 고단함을 가감없이 보여준 것과, <우회공간>에서 남정호, 이정희, 안신희 세 사람이 과거 공간사랑 소극장에서 올렸던 자신들의 작업을 회고하며 재연한 포맷과 겹치는 부분이 있었다.
대신 <춤이 말하다>나 <우회공간>이 각 분야의 ‘주류’로 이름을 남긴 출연자들의 ‘권위’를 통해 렉처 퍼포먼스의 성격을 굳혔던 것과 다르게 이번 〈Forget 츄〉는 스스로 공연예술계의 ‘잉여’라 밝힌 세 사람이 발레 쪽에 완전히 정착하지도 못하고 컨템포러리로 넘어오지도 못한 채 좌충우돌하는 현재 상황, 그 민낯을 드러내었다. 자신들의 위치를 바짝 낮춤으로써 표방하지 않은 ‘렉처’의 효과를 얻은 특이한 공연이었다.
공연이 재미있게 다가올 수 있었던 것은 여민하, 윤상은, 최승윤 세 사람의 개성이 대비되며 캐릭터화가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무용수로서 테크닉을 익히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해 오고, 다른 안무가들의 작업에 참여하면서 비로소 자신만의 예술성과 취향에 늦게 눈뜨게 된 사춘기 아닌 사춘기 여자들의 명랑만화는 유쾌한 톤으로 그려졌지만 제기하는 문제들은 만만치 않았다. 제도권 시스템에 최선을 다해 순응하는 것이 예술가로서의 자아 형성에 얼마만큼 도움을 주겠느냐는 회의감은 <와의와의와의과 같이>에서 결정적으로 드러났다.
2013년 4월에 이강일, 위성희, 장현준, 최승윤의 공동연출로 올라갔던 이 작품은 무대에서 세 사람이 삼각형을 이루고 서서 서로의 발을 보고 연쇄적으로 움직이는 방식으로 재연되었다. 동물적으로 즉각 반응하는 신체에 대한 의문도 있지만, “의심 없이 지속합니다.”, “이것이 무용입니까?”, “그냥 계속합니다” 등의 연타성 발화는 주체적인 예술가로서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인지 끊임없이 캐묻는다. 사실 던컨 이래 수많은 무용가들이 그 길을 따라 왔건만, 발레를 전공했던 이들에게는 새삼스러운 발상의 전환이었다는 뒤늦은 고백일 수 있다. 하지만, 만약 천상의 아름다움을 구현하는 것만이 무용가의 유일무이한 임무라고 생각하는 보수적인 관객이 객석에 있었다면 이 고민은 앞으로도 영원히 유효한 과제라는데 동감하지 않았을까.
한편 이들이 재연한 작품들이 이런 방식으로 다시 무대에 호출되지 않았더라면 언제 다시 빛을 볼지 모르는 채 흩어지는 창작물들이란 점도, 쏟아 붓는 땀과 공에 비해 알려지지 못하는 무수한 예술가들의 고통을 상기시켰다. 그런 면에서 어둠 속에 아이팟을 들고 그것을 보며 따라 춤추는 모습은 공연 전체를 통해 가장 상징적인 장면이라 할 수 있겠다.
불 꺼진 연습실에서 남몰래 밤늦게까지 춤을 추었다는 유명 발레리나의 일화가 떠오르기도 하고, 언젠가는 조명을 받으며 무대에 설 그 날에 대한 꿈으로 부푼 미래의 춤꾼들이 그려져서 애잔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외부의 엄격한 시선으로 완벽함을 재단하는 발레와 달리 자신의 최대한 자유로운 표현으로 만족감의 기준을 삼는 현대무용(노경애 안무 〈Mars〉)이 너그럽다 느껴져도, 무대에서 춤만 추어도 되는 무용수가 굳이 일부러 관객에게 다가가 질문을 던지면서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 맞닥뜨리며 때론 예민한 감수성에 상처 입을 각오를 해야 하는 〈Production〉(Xavier le roy, Marten Spangberg 안무)의 경우처럼 역시 호락호락한 것만은 아니라는 직시 또한 현실적이다.
이렇게 방황하는 현재에 대한 ‘썰’을 풀어놓는 것은 마로니에 여름축제의 일환으로 올려진 점에서는 어울리는 포맷이라고 생각하지만, 공연을 지속시키기 위해 그 방황까지 연장해야 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축제를 통해 한바탕 풀었으니 차후 이 공연을 어떤 형태로 진화시킬지가 더 중요할 것이다.
안은미컴퍼니 〈Ok, Let’s talk about sex!〉
안은미컴퍼니는 그간 <조상님께 바치는 댄스>,<사심 없는 땐쓰>,<아저씨를 위한 무책임한 땐쓰>, <스펙타큘러 팔팔 땐쓰> 등을 통해 일반 시민들, 무용 비전공자들이 참여하는 작품들을 전개해 온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어떤 방식이든 안은미컴퍼니가 무대 위까지 시민들을, 그것도 여러 번 이끌고 올라갔다는 것은 나름의 친화력과 매력을 증명해 온 셈이다.
이번 공연은 ‘어른들을 위한 몸 놀이 공장 3.3.5.5’라는 제목으로 5월말 경부터 일반인 참가자 모집공고를 내었는데, 공고가 올라간 후 일주일 만에 선착순 인원 80명이 마감되었으나 모집 후 공연 주제가 성(性)이고 무대에서 자신의 성 이야기를 직접 몸으로 풀어내야 한다는 발표에 포기하는 지원자들이 늘어나면서 결국 남은 50여명이 출연하게 되었다고 한다.
공연은 그 참가자들이 돌아가며 모두 발언하고 퍼포먼스를 펼치는 상당히 긴 전반부 다음에 안은미컴퍼니 단원들이 나체가 되어 자유로운 타잔처럼 무대 위를 뛰어다닌 짧은 장면으로 가름하고, 출연자들이 꿈꾸는 성에 대한 환상이 그려지며 한바탕 난장, 파티(올초의 <스펙타큘러 팔팔땐스>에서는 스티로폴 가루들의 향연이었다면, 이번엔 각티슈에서 뽑아낸 화장지들의 향연이었다)로 마무리하는 형식이었다. 이전 안은미컴퍼니의 공연들에 비해 확연히 지배적인 일반 시민들의 출연 분량도 그렇거니와, 주제나 퍼포먼스 면에서 과감함을 이끌어낸 것은 확실히 괄목할 만한 성과이다.
10주간의 워크샵은 일차적으로 성에 대한 이야기를 무대 위에서 과감하게 꺼내도록 만든다는 데 목표를 둔 것 같다. 안은미컴퍼니의 이전 공연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일반 시민들의 출연분량을 길게 두어 모든 참가자들이 각자 발언하는 시간을 배치한 것은 긍정적으로 해석하면 발언의 내용에 어떠한 제재도 가하지 않고 맡겨 존중했다는 뜻일 수도 있지만, 왜곡된 성문화가 이런 모습으로 달라졌으면 좋겠다는 구체적인 이상(理想)을 공유하지 못한 채로 무조건 끌어내기만 한 측면도 있었다. 분방한 표현들이 속 시원했다기보다 난삽하여 심란해지기도 했다.
공연의 부제인 ‘어른들을 위한 몸 놀이 공장 3355’, 거기서 그 ‘몸 놀이’는 제대로 이루어진 것인가. 비밀스럽게 이루어지는 몸짓을 오픈하고 소박하게 그룹을 지어 연극적인 장면으로 꾸미거나, 신체의 일부를 장난처럼 다루며 ‘성인들은 다들 이렇게 논다더라’는 식의 부풀려진 이미지 속에 허우적거리는 무대 위 결과물을 놓고 보았을 때, 안은미컴퍼니가 시도한 ‘성에 대한 자유로운 담론’은 역설적으로 우리 사회가 얼마나 ‘성 산업’이 제시하는 이미지들에 지배되어 있는지 그대로 노출하였다. 남성 성기 중심, 삽입과 피스톤 운동 중심의 화제와 이미지들은 그만큼 우리에게 몸 전체를 성 유희의 소재로 삼을 수 있는 상상력이 빈곤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출연자들의 일부는 각자의 콤플렉스나 치부를 당당하게 노출하는 것이 그 고민으로부터 구원받는 유일한 해법인 것처럼 강박적으로 발언하고 행동했는데, 안은미컴퍼니나 관객 모두 심리치료사도 상담자도 구원자도 될 수 없다는 점에서 공연의 방향이 그렇게 설정된 것은 위험하면서 안타까운 점이었다.
몸의 움직임을 오랫동안 탐구해 오고 잘 쓸 줄 아는 전문가인 안무가와 단원들에게 기대하는 바는 다른 게 아니다. 어떤 형태를 지녔든 살아 움직이는 그 자체로 아름다운 몸(사이즈가 77이던, 여드름 흉터로 드러내기 부끄럽던 간에)을 우리가 애정할 수 있도록, 몸 자체에 대한 얘기로 집중하도록 조근조근 이끌어주었으면 어땠을까.
‘감춘다’는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하는 퍼포먼스들이 정작 신체 자체를 함부로 다루고 도구화한다는 느낌을 줄곧 받았다. 감정을 주고받는 통로로서의 몸에 대한 세밀하고 애정 어린 관심은 부족해 보였다. 완벽히 아름답진 않아도 사랑을 표현하고 받는데 하등의 부족함이 없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신체의 모든 부분을 테마로 잡아, 주도면밀하게 그것을 성의 기쁨을 나눌 통로로 삼는 동작을 만드는 탐구 과정을 전문춤꾼들과 참가자들이 함께 보여주었더라면, 우리는 몸에 대한 존중과 경외감에 감화되어 억지로 시키지 않아도 공연장 밖을 나서면서 기꺼이 즐겁고 아름다운 성을 이야기하고 싶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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