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 현장
승무의 예능보유자로 한성준 ․ 한영숙의 춤맥을 이었으며, 시대를 춤추었던 이애주(1947~2021)의 2주기 추모행사가 5월 9, 10일에 경기아트센터(이사장 임진택)와 이애주문화재단(이사장 유홍준) 공동주최로 있었다. 이애주 선생과 인연을 맺었던 여러 단체들이 참여했고, 많은 인사들이 동참하여 이애주를 추모했다.
9일에‘다시 천명(天命), 춤의 길’이라는 제목으로 경기아트센터 소극장에 올린 공연은 1부에 이애주한국전통춤회의 완판 〈승무〉와 이애주춤․장단연구회의 〈바람맞이 태평춤〉, 2부에 이애주한국전통춤회의 〈살풀이춤〉과 경기도무용단의 〈제(祭)〉였다. 2시간에 걸쳐 진행되었다.
객석의 불이 꺼지자 이애주 선생이 영상 속에서 “잘 오셨습니다. 잠시 무거운 짐 내려놓고 쉬십시오. 저도 함께 쉽니다. 모두 내려놓고 자연이 됩니다. 땅과 하나 되고 하늘과 바람과 하나 되어 깊은 숨을 쉽니다. … 다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겠습니다. 을시구(乙矢口) 절시구(節矢口) 지아자(知兒者) 절시구 하면서.”라고 말하면서 춤판을 열었다. 이애주 선생이 춤 인생의 완성기에 춤에 대한 성찰을 집약한 내용이었다. 그렇게 모두를 초대했다.
이애주한국전통춤회 〈승무〉 |
이애주한국전통춤회 〈살풀이춤〉 |
첫 춤 〈승무〉는 이애주한국전통춤회의 윤영옥, 주연희, 김연정, 김미자, 이숙자, 안효정, 모영진, 신영, 유주희가 추었으니, 스승으로부터 배운 승무를 40분간 짚어냈다. 염불과장에서 9인이 추다가 인원을 줄이면서 굿거리에서 4인이 추었고, 다시 북놀음과 당악과장까지 함께 추었다. 제자들은 언뜻언뜻 다른 분박에서 장삼 사위를 뿌리고, 몸통의 각도와 높이가 조금씩 상이한 대목들이 있었지만, 정성껏 추어냈다. 스승 이애주의 춤을 이어받은 이들의 어깨가 무겁지 않을 수 없다. 〈살풀이춤〉 역시 제자 9인이 함께 춤추었는데, 그날 그들이 춘 살풀이춤은 무겁고 건조했다. 이애주 선생이 통으로 몸을 사용하며 거침없이 뿌렸던 수건 사위나, 담백하면서 굵은 선은 약화되었다. 또 때에 따라 감정을 실어 환하게 기운을 보냈던 표정도 별로 보이지 않았다. 황망히 타계한 스승에 대한 슬픔 때문일 수 있고, 스승의 부재로 인해 갈 길을 아직 찾지 못했을 수 있다. 하지만 스승의 춤을 지키는 일이 엄연히 남겨졌으니, 스승의 족적을 꼼꼼히 되짚어봐야 할 것이다. 이애주의 춤 뿐만이 아니라 한영숙의 춤도 돌아보아야 그 춤맥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경기도무용단 〈제(祭)〉 |
경기도무용단(예술감독 김상덕)의 〈제(祭)〉는 노정식 교수(용인대 무용과)의 안무로, 1주기 때도 추어졌다고 한다. 떠나간 자에 대한 제례(祭禮)라기보다 남아있는 자의 지난(至難)한 삶의 이야기를 본듯했다. 후반에 ‘허여어!’의 구음이 반복된 후, 춤꾼들과 무대 위에 하염없이 떨어지는 흰 종이 조각들은 슬픔일 수도, 상념일 수도, 삶의 편린일 수도, 끝없이 흐르는 시간일 수도 있다. 그런데 ‘에라 만수야 대신이여’라는 성주풀이의 변주로는 제(祭)가 마무리되지는 않은 듯했다.
이애주춤·장단연구회 〈바람맞이 태평춤〉 |
그리고 그날의 공연에서 가장 관심이 높았던 춤은 〈바람맞이 태평춤〉이었다. 〈바람맞이〉는 1987년 연우무대 초연 이후 6월항쟁 과정에서 이애주 선생이 추었던 춤으로, 씨춤 ․ 물춤 ․ 불춤 ․ 꽃춤으로 구성된 작품이다. 〈태평춤〉은 1980, 90년대의 여러 춤판에서 이애주 선생이 경기도당굿의 구성을 토대로 춤판의 주제와 상황에 따라 태평무를 추었는데, 이 과정에서 구성의 틀이 만들어진 후, 1997년 홍성에서 개최한 한성준춤예술제에서 ‘태평춤’이라는 제목으로 초연된 춤이다. 이애주 선생이 작고하기 전까지 여러 무대에서 마지막 프로그램으로 꼭 추었던 춤이다. 이 두 작품을 이애주춤․장단연구회가 어떻게 엮어서 춘다는 것일까.
〈바람맞이〉 공연 영상에서 40대 이애주의 모습이 크로즈업되자 객석 뒤편에서 풍물이 울렸다. 198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이애주의 춤판에서 반주를 도맡았거나, 군무를 추었던 제자들로 구성된 이애주춤‧장단연구회의 〈바람맞이 태평춤〉이 시작되었다.“문엽쇼 문엽쇼. 단군할아버지 문엽쇼. 녹두장군 문엽쇼!”비나리가 청해지고, 김경숙, 김창수, 한승석, 한동욱, 김성남의 5인이 객석을 지나 무대에 오르자 월산가를 부른 후, 백발 분장의 김경숙이 사방에 씨를 뿌렸다. 손춤을 추며 땅에 엎드렸다 일어나며 들어올리기도 하고, 솔가지를 팔뚝에 나누어 얹고 진쇠장단에 춤을 춘다. 솔가지가 떨리며 돌다가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나 솔가지를 크게 흔들며 춤추었다. 그렇게 전반부에서‘씨춤’을 추었으니, 이애주 선생이 1987년에 황토빛 치마저고리를 입고 추었던 〈바람맞이〉의 씨춤과는 사뭇 달랐다. 그의 제자 김경숙(한국문화재재단 예술단 예술감독)은 백발에 흰 치마저고리를 입고 마치 마고할미의 캐릭터로 춤추었던 것이다. 원초의 생명 씨앗을 뿌리고 솔가지를 들어 춤추며 부정을 친 춤이다. 그리고 후반부의‘태평춤’이 추어졌다. 길군악 후에 김경숙이 흰 쾌자를 입고 흰 족두리를 쓰고 등장하여 진쇠 가락에 손춤을 추고, 꽹과리를 치며 터벌림으로 넘어갔다. 이때 4인의 군무가 합류하여 사방으로 동선을 옮기며 터를 다지고 벌렸다. 이어서 익히 보았던 태평무의 발동작들이 이어졌고, 솔가지를 든 김경숙이 지전을 든 군무들(이현희, 박다인, 양윤정, 이호연)을 불러들이며 사방치기를 했다. 마지막 당악에서 연풍을 돌며 절정에 이르렀고, 푸살 장단으로 마무리했다. 반주가 생생하게 받쳐주었다. 후반부의 ‘태평춤’ 역시 이애주 선생이 홀춤으로 추었던 구성과는 달리 군무를 결합한 구성이었다. 〈태평춤〉은 이애주 선생이 전통춤꾼으로 평생 내공을 쌓으면서, 또한 시대와 호흡하며 추었던 춤에 대한 생각들을 토대로, 태평 세상을 이루기 위해 추어야 할 춤으로 구성한 또 하나의 역작이며, 기억해야 할 작품이다. 이번 추모공연에서 〈바람맞이〉의 씨춤과 〈태평춤〉을 엮어 공연했는데, 이는 이애주의 〈바람맞이〉와 〈태평춤〉을 이해하기 위한 첫 걸음이었다고 본다. 전통을 토대로 현재화하고자 했던 이애주의 춤 사유의 성과들이 또 다른 해석으로 펼쳐지기를 기대한다.
이애주 추모 2주기 나눔굿의 모란공원 전경 |
10일에는 2주기 추모식 ‘나눔굿’이 마석 모란공원에서 있었다. 이애주의 묘소는 전태일(1948~1970), 백기완(1932~2021)의 묘소와 가까이 있었는데, 열림굿(풍물굿패 삶터)으로 시작하여 모시는 춤으로 한국민족춤협회(이사장 이삼헌)의 〈이애주 추모춤 현신 오마주〉를 5인이 추었고, 책 헌정례가 있었다. 이애주문화재단이 1주기 이후에 출간을 준비한 『이 땅에, 춤이란 무엇인가』(서울대 출판문화원)와『이애주의 춤 생각』(개마서원)을 필자인 고 이애주에게 헌정했다. 그리고 백기완 선생과 이애주 선생의 유작 교환이 있었다. 이애주문화재단은 백기완 선생이 이애주의 〈도라지꽃〉 작품에 대해 쓴 '도라지꽃을 위한 비나리'라는 시를, 노나메기재단(이사장 신학철)은 백기완 선생이 1980년대 후반에 만든 이애주 춤달력을 서로 교환한 것이다.
이애주문화재단과 노나메기재단의 유물 교환 |
이어서 채희완(민족미학연구소 소장)이 2주기 추모제의 제목인 ‘나눔굿’에 대해 설명했다. 이애주 선생이 춤패 신을 창단하고 첫 공연으로 1984년에 국립극장 실험무대에서 공연한 작품이 〈나눔굿〉이었는데, 그 창작과정을 회고하고, 의미를 설명했다. 불교의식인 식당작법을 자신의 관점으로 해석한 창작춤판으로, 이애주 선생은 창작노트에 “밥을 나누어 먹는 것이야말로 온천지가 모두 하늘을 모시고 부처를 섬기는 생명개벽의 세상이다. … 밥 나눔의 극치를 나타내는 경건한 공양의식, 그것이 나눔굿이다. 생명춤이다.” 라고 남긴바 있다. 뒤이어 임진택(창작판소리연구원 원장)이 〈빈 산〉을 노래했고, 이애주한국전통춤회의 제자들이 꽃을 들고 본살풀이를 추었으며, 창작판소리연구원이 나눔의 노래 〈먹세 먹세〉를 불렀다. 추모의 의식이면서, 한 판 공연이기도 했으며, 이애주를 함께 기억하는 나눔의 굿이었다.
이애주 2주기 추모 나눔굿 중 한국민족춤협회의 〈이애주 추모 현신 오마주〉 |
이애주 선생은 서울대 퇴임 후 2014년 ‘이애주 춤 천명(天命)’공연을 준비하며 스스로 자신의 춤인생을 정리했다고 한다. 첫째는 전통춤 학습과 춤의 세계관을 세운 법무(法舞)의 시기, 둘째는 시대를 관통한 역사맞이, 바람맞이를 펼친 신명(神明)의 시기, 셋째는 우리네 삶의 원형과 몸짓․춤의 원류를 찾아나선 터벌림의 시기, 넷째는 온세상 생명의 자연춤, 함밝춤, 태평춤을 빚는 천명(天命)의 시기이다. 각 시기에 따라 추었고 고민했던 춤들 속에서 이애주 선생은 자신에게 과제를 부여했던 것이다. 이제 과제는 남아있는 자들의 몫이 되었다. 무릇 예인에 대한 추모는 행사로 갈음할 수 없다. 그가 남긴 역정(歷程)을 되돌아볼 뿐 아니라 곱씹어 다시 세우고, 그 열매를 새롭게 꽃피워야 할 것이다.
김영희
전통춤이론가. 김영희춤연구소 소장. 역사학과 무용학을 전공했고, 근대 기생의 활동을 중심으로 근현대 한국춤의 현상에 관심을 갖고 있다. 『개화기 대중예술의 꽃 기생』, 『전통춤평론집 춤풍경』등을 발간했고, 『한국춤통사』, 『검무 연구』를 공동저술했다. 전통춤의 다양성과 현장성을 중시하며, ‘검무전(劍舞展)I~IV’시리즈를 기획했고, '소고小鼓 놀음'시리즈를 진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