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 현장
안무가 김나이는, 자신의 작품이 추구하는 주제를 어떤 공간에 풀어놓으면 가장 적확할지 영민하게 찾아내는 이라고 기억된다. 필자가 그의 작품으로 처음 접했던 〈One〉(2015)은, 단언컨대 그동안 문화역서울284 RTO에서 공연된 작품 중 그처럼 그곳에 잘 어울리는 것이 없었다. 세월과 수많은 사람의 역사와 추억이 더께처럼 내려앉은 장소를 선택해 새로 사랑을 시작하여 완성하려는 커플의 이야기를 선보인 아이디어는 당시의 경력에 비해 원숙함을 느끼게 할 정도였다(관련기사: ‘김나이& 조각가 최수앙 콜라보레이션 〈One〉’, 〈춤웹진〉 2015년 2월호)
두 번째로 관람했던 〈(길은막다른골목이적당하오)〉(2016)는 ‘ARKO가 주목하는 젊은 예술가 시리즈’로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에서 공연되었지만, 기존 객석을 치우고 높은 가벽을 세워 사선의 막다른 골목을 만들고 그 가벽 위에 객석을 마련하여 관객이 질주하는 ‘아해’들을 내려다보게끔 설계하였다.
김나이무브먼트컬렉티브(NKMC) 〈(길은막다른골목이적당하오)〉 ⓒ김나이무브먼트컬렉티브 |
좁은 공간에서 부딪히는 아해들은 가벽에도 충격을 전달했으니, 필자 포함 높은 객석에서 관람한 이들은 그 물리적 충격으로써 식민지 지식인이 받는 정신적 충격과 불안감을 잠시나마 가늠하고 체험하게 되었다. 이 작품은 2020년 성균관대 인문사회과학캠퍼스 야외주차장에서 〈13인의아해가도로를질주하오〉란 제목의 드라이브인 형식으로 공연되기도 했는데, 코로나로 인한 언택트 상황에서 불가피하게 도출된 형식은 초연만큼의 감흥을 주기는 어려웠겠지만 관람의 능동성에 대한 새로운 실험으로서의 의미는 가졌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동영상: 〈13인의아해가도로를질주하오〉 2020 on Vimeo)
이렇듯 기존 프로시니엄 무대라는 형식을 벗어나 특별한 감수성을 지닌 공간을 선호하는 안무가가 이번에 발표한 신작 〈Alone, naturally〉(3월 24~25일/LG아트센터 서울, U+스테이지)는 오히려 극장 안으로 들어왔다.
전작들과 달리 아무런 장치도 오브제도 없고 청회색을 주조로 한 무대와 무용수들의 의상은 도시의 삭막하고 우울한 분위기를 전달한다. 김나이를 필두로 한 무용수들이 길게 엎드려 누운 채 바닥과 얼굴을 맞대고 있다가 일어나서 걸어 나가는 도입부는 일견 쓸데없이 길다고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학업을 위해, 직업을 찾아 상경하여 산등성이까지 들어찬 동네를 고단하게 오가 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그 수많은 전등 불빛 속에 내 몸 하나 뉘일 곳 찾기가 녹록치 않다는 것을. 가끔 인터넷에 감옥의 독방 마냥 싱크대와 변기와 딱 몸 하나 누울 자리가 어떤 구분도 없이 들어간 그런 원룸도 상당한 월세를 받는다며 소개되는 것을 보면, 비정한 도시는 사람들의 눈물을 먹고 비대해지는 모양이다.
작품 전체는 미니멀리즘 음악의 악보를 무대에 구현한 듯한 느낌을 주었다. 왼쪽으로 입장하여 오른쪽으로 퇴장하는 동선은 단순한 시간의 흐름을 지시한다. 개관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극장의 마룻바닥의 이음새는 오선지, 눕거나 서거나 다른 이의 의자가 되어주는 등 직선과 직각을 위주로 움직이는 무용수들은 거기에 ‘심은’ 음표처럼 보였다.
김나이무브먼트컬렉티브(NKMC) 〈Alone, naturally〉 ⓒ장호/김나이무브먼트컬렉티브 |
‘심었다’라고 표현한 것은 팔을 흔들며 달리기 자세를 취해도 발은 붙어있거나, 공간을 열어젖히고 자리를 확보해보려 하지만 동서남북 한 보씩 정도 밖에 움직이지 못하는 그런 동작들이 주로 보였기 때문이다. 이런 와중에 배경 음악의 현악기는 꾹 눌러서 음을 질질 끌며 타악기와 서로 다른 리듬감으로 부딪히는데, 예민하게 신경을 일깨우는 이 소리의 부조화는 공동체 생활에서 필수적으로 수반되는 우리 내면의 불편함, 타인과의 불화를 대변하는 것 같다.
김나이무브먼트컬렉티브(NKMC) 〈Alone, naturally〉 ⓒ장호/김나이무브먼트컬렉티브 |
후반부로 들어서면서 이 ‘무늬만 공동체’는 조금씩 자율성을 얻는다. 이제는 오른쪽으로 등장하여 왼쪽으로 퇴장하거나, 뒷걸음으로 퇴장하기도 한다. 런닝 자세는 한 발씩 움직이다 두 발 모두를 움직일 수도 있게 된다. 안무가는 단순한 동작구를 조금씩 꾸준히 반복하면서 점진적인 변화를 주어 쌓아가는 미니멀리즘 음악의 기법 그대로, 도시의 일상과 고독한 개인 그러나 서로 기댈 수밖에 없는 사회적 인간의 풍경을 건조하게 그려냈다.
김나이무브먼트컬렉티브(NKMC) 〈Alone, naturally〉 ⓒ장호/김나이무브먼트컬렉티브 |
주제에 대한 깊이 있는 사유, 그것이 오감을 통해 골고루 스며들 수 있게 연출하는 재기가 빛났던 그의 전작들을 생각하면 이번 작품은 사뭇 심심하고 평범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미니멀리즘을 이해하고 체화하여 절제된 톤으로 표출하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용수들이 달렸다가 멈추고 이내 호흡을 빼고 몸을 쓰러뜨리는 등의 동작들은 이를테면 현대무용축제에 참가한 대학팀들에게서 으레 발견하게 되곤 하는 것들이라 과연 그것이어야만 했을까 하는 당위성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한 음의 반복이나 빈번하고 긴 휴지부(休止符)만으로 완성되는 미니멀리즘 음악도 있기에 그런 춤의 상용구 자체가 현대성을 대표한다 강변할 수도 있겠지만, 허를 찌르고 들어오는 한 수가 보이지 않아 아쉬웠다.
꿈보다 해몽일 수 있지만, 그래도 이 작품이 ‘김나이 표’라는 것은 엘지아트센터라는 공간의 맥락까지 읽으면 가능하다고 생각된다. 필자는 마곡으로 이전한 LG아트센터를 이번 공연 관람을 위해 처음 찾게 되었는데, 직각으로 계획 조성된 아파트단지와 서울식물원 사이에 LG아트센터가 마치 섬처럼 혹은 완충지대처럼 자리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지하철역에서 나와 장대한 진입로를 에스컬레이터로 오르는 동안 진기한 풍경에 눈을 깜박이는 것도 잠시, 천장을 높게 두어 숨을 틔웠어도 노출 콘크리트가 주는 위압감, 주변과 분리된 느낌은 어쩔 수 없었다.
장르를 넘어서, 문화예술 전반에 대해 지식보다 본능적인 감각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이런 이유가 그래도 김나이의 작품을 계속 기대하고 지켜보게 만든다. 한국인 최초라는 경력사항을 몇 가지 가진 안무가 김나이는 이번 작품도 국내무용가 최초로 MAP펀드의 수혜자가 되어 올렸다. 이에 대한 질문에 그는 “MAP펀드는 이미 공연된 작품으로 지원을 하는 점에서 국내 지원제도와 다르다고 볼 수 있는데, 공연된 작품으로 아티스트의 작업(예술성 및 가능성)을 평가하는 시스템으로 구축되어 있어 2016~2019 3년에 걸쳐 다른 두 (미국) 아티스트와 협업한 작품을 지원하여 선정되었다”고 대답해주었다.
방희망
2013년 제1회 한국춤비평가협회 춤비평신인상을 통해 춤비평가로 등단했다. 현장 비평가로 다양한 춤 공연에 대한 비평작업을 하고 있으며, 한국춤비평가협회 정회원, <춤웹진>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