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바리시니코프댄스파운데이션 입단 소식으로 처음 이름을 알렸던 무용가 김나이가 조각가 최수앙과 콜라보레이션한 작품 〈One〉을 선보였다(1월 30-31일, 문화역서울284 RTO 공연장, 평자 30일 관람). 작년 5월 한남동 아마도 예술공간에서 발표했던 첫 안무작 〈장화홍련 revisited〉에 이은 두 번째 안무 작품이다. 이번에 안무한 〈One〉은 조각가 최수앙의 작품 〈The One〉으로부터 영감을 얻었다. 한 쌍의 남녀가 등을 맞댄 부분이 꿰매어져 하나로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정작 마주볼 수 없도록 처리된, 이 극도로 현실적이면서 또한 비현실적인 작품은 ‘관계’에 대해 다양한 심상을 담아낸다.
안무가는 조각에서 영감을 얻었으되, 그것을 해석하고 춤으로 풀어냈을 때는 한껏 다른 모습을 취했다. 조각이 그려낸 뒤틀리고 일그러진 관계의 현재 모습만을 제시하는 대신에 세상의 모든 관계들이 어디서 어떻게 시작되었을지 거슬러 올라가 이야기를 담아내면서 보다 따스한 숨결을 불어넣었다.
표정이 없는 하얀 마스크를 착용한 6명의 무용수들이 입장하여 객석에 섞여들어 앉고 서로 자리를 바꾸며 스쳐지나가는 모습들을 통해, 관계를 맺기 전까지는 이름도 모르는 그저 군중 속 ‘타인’에 불과했던 사람이 어느덧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는 과정을 그렸다.
두 명의 여성에게 꽃다발 포장 같기도 하고 신부의 면사포 같기도 한 비닐과 리본 장식을 씌우는 순간부터, 김춘수의 시에서처럼 혹은 어린 왕자의 장미꽃처럼 사랑을 헌정 받은 그 대상은 특별한 존재가 되면서 동시에 관계에 구속된다.
하지만 김나이 작품 속 인물들은 구속 자체에 실망하거나 멈추지 않는다. 어느덧 그것을 차고 나와 활발히 움직이며 다시 모두를 불러들인 뒤 객석의 사람들에게 손을 내민다. 상처가 있더라도 그것은 더 깊고 넓은 관계로 나아가기 위해 필연적으로 거칠 수밖에 없는 과정이며 자신을 끊임없이 오픈하는 것만이 성장하는 지름길임을 잘 알고 있는 어른스러움이 보인다.
그런 단상이 특별히 점화된 장면이라면 무용수가 주머니에서 매직펜을 꺼내어 상대방에게 눈썹과 입술 등 표정을 그려 넣어주는 장면일 것이다. 상대방에게 내가 ‘기대’하는 모습을 부여하지만, 그는 이내 그것을 손으로 쓱쓱 지워버린다. 관계를 방해하는 가장 큰 걸림돌이 각자의 고집, 상대를 있는 그대로 봐 주지 않고 내 방식의 기대를 거는 욕심이라는 것을 직관적으로 단순명료하게 표현한 장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 표정을 그려 넣으려는 상대방의 손에서 펜을 받아 스스로 그려나가는 것으로 ‘수용’을 배워나가는 노력은 관계를 보다 아름답게 진전시킨다. 마지막, 밧줄로 서로를 팽팽하게 옭아매었던 커플이 그것을 떼어내고 오로지 서로의 입맞춤으로 하나 되어 걸어 나간 마무리는 최수앙의 〈The One〉에 대한 김나이의 희망적인 메시지일 것이다.
오랜 시간 동안 스쳐간 수많은 사람들의 체취가 희끄무레하게 남은 문화역서울284 RTO 공연장. 그 특별한 공간에 객석을 사방으로 둘러 배치함으로써 안무가는 관객으로 하여금 이제는 낡고 바랜 관계가 최초로 빛났던 순간을 회상하게 하고, 무용수들을 열린 공간에서 다각도로 바라보면서 관계의 상대성을 되새기도록 이끌었다. 세월의 풍화와 대조되는 무용수들의 크림빛 매끄러운 의상, 추억을 끄집어내는 마중물의 역할에만 충실했던 올라퍼 아날드의 서정적인 음악, 함축되어 최소한으로만 적절하게 제시된 오브제들까지 연출 전체가 절제된 미덕을 갖고 있었다.
김나이는 발레에 기반하여 부드럽지만 절도 있게 에너지가 들어 찬 춤을 구사하는 것을 즐기는 듯 보였다. 그리스의 조각처럼 인체의 선을 우아하게 돋보이게 하는 마스크와 의상을 선택하면서도, 바닥을 쓸고 뒹굴며 흰 의상이 저절로 더러워지도록 하는 과감하고 대범한 연출력을 선보였다. 그것은 순수했던 마음들이 퇴색하는 과정이기도 했지만, 우리 모두가 삶 속에서 의미 있는 관계를 얻어내기 위해 치열하게 투쟁한 결과 얻은 영광의 상처라는 뜻으로도 보였다.
한편 오브제와 의상을 작업해준 최수앙의 다른 조각 작품들도 작품 속에 가벼운 터치의 포즈로 담겨 스쳐갔다. 남자가 여자의 등 뒤에 기대어있으나 머리는 한 개로 모아진 〈Perception〉은 〈The One〉과 함께 영감의 양대 축을 이루고 있었고, 수많은 손들이 모여 날개를 이룬 〈The Wing〉은 춤에서 어깨죽지를 토닥이는 손으로 살아났다. 남녀의 혀가 길게 나와 뱀처럼 얽힌 〈The Entangled Couple〉은 공연의 마지막 입맞춤한 채 결합되어 움직이는 동작들로 승화되었는데, 작년 여름 한국을 빛내는 해외무용스타 초청공연에서 툴사 발레단의 손유희& 이현준 커플이 선보였던 〈Extremely Close〉(Alejandro Cerrudo 안무)에서 턱을 물어 서로 얽었던 장면과 오버랩 되어 흥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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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_ 안무가 김나이
영국 뉴욕 거쳐 한국에서 안무교육 전공
1월 30일 공연이 끝난 직후 문화역284 RTO 공연장에서 안무가 김나이와 짧은 인터뷰를 가졌다.
방희망 영국 로열발레학교를 거쳐 쭉 해외에서 학창시절을 보내고 뉴욕의 바리시니코프댄스파운데이션에 입단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국내에 들어와 활동하면서 어려운 점은 없었는지, 현재 해외 활동은 지속적으로 하는 상태인지 궁금합니다.
김나이 외국에서 실기 무용학교를 계속 다니면서 공부를 제대로 하고 싶었어요. 2~3년간 고심 끝에 한국에 들어왔고 처음엔 해외무용단에 걸친 상태로 방학마다 나가서 활동을 했지만 바리시니코프도 3년간의 활동을 정리하고 마무리한 다음 아예 대학원에서 공부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게 되었어요. 두 살 때부터 외국 생활을 해서인지 처음에는 문화충격이 좀 있었구요.(웃음)
서울대 대학원에서 ‘안무 교육’을 전공하신 이력이 독특하다 여겨졌습니다. 그쪽으로 관심을 갖게 된 이유가 있나요?
사실 저는 어릴 때부터 로열발레학교에서 교수 교육을 받았어요. 영국 전통인 니네트 발로아 교수 방법을 배웠는데 그때부터 교육에 관심이 있었던 이유는 그곳에서 무용수가 테크닉을 구사하지 못하면 가르치지도 못한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에요. 소극적인 제가 그 교수방법을 배우게 되면서 외향적으로 변하고 이론과 실력이 같이 향상되는 것을 느끼니까, 어린 나이였지만 이론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지요. 한편 부모님께서 제가 다치게 되거나 했을 때 ‘플랜 B’가 있어야 되지 않겠느냐고 하셔서 학부 때부터 무용교육을 자연스럽게 병행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때는 무대에 서서 춤추고 싶은 게 우선이라 절실히 느끼진 못했지만, 공부를 하는 게 도움이 된다고 느꼈던 계기로 제가 선생님들께 들었던 “네가 너의 첫 제자다”라는 말씀이 있어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못하면 그 누구도 가르칠 수 없다는 그 말씀에 너무도 공감이 되었죠. 그래서 실기와 이론을 항상 같이 생각을 하게 되었고요.
전 발레를 배웠는데 발레에선 옳고 그름이 아주 분명하잖아요. 우연한 기회에 뉴욕을 가게 되었는데 거기선 제게 즉흥과 창작을 요구하고 제가 그동안 받았던 트레이닝이 필요가 없는 상태가 되면서 신세계가 열렸어요.
발레에서는 안무가와 무용수가 분리되어있는데 현대무용에서는 자기 스타일을 구사해야 하니까 안무가가 곧 무용수가 되잖아요. 발레를 하면서는 나는 창의적이지 못하니까 안무가는 될 수 없고 선생님만 되겠다 생각했는데 뉴욕 Tisch 학교에 가면서 안무 교육 또한 교육이 되어야 하고 교육될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이 바뀌게 되었어요.
저도 원래 의류학 전공이었기 때문에 순수미술과 디자인이 만남을 시도하는 ‘ART TO WEAR’ 작업이나, 패션디자이너들이 무대 의상 제작과 연출에 참여하는 것에 관심을 두고 지켜봅니다만, 무용수의 움직이는 신체에 구조적으로 긴밀히 결합되어 흡족할만한 결과로 나타난 콜라보레이션은 보기 쉽지 않은 것 같아요. 아무래도 움직임에 대한 이해가 달라서일 텐데 이번 작품은 안무가의 의견이 많이 반영이 된 걸로 보였습니다. 어떻게 협업을 하셨는지요.
예, 접근방식이 아예 다르니까 서로 의견 교환을 많이 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비닐 같은 경우, 최수앙 작가는 처음에 보자기를 생각하셨어요. 그럼 춤을 출 수 없잖아요. 정적인 조각 작품으로 보았을 때는 예쁘지만 무용으로는 이상하고 불가능할 수 있는 상황이니까, 최수앙 선생님이 자료를 많이 주시면 제가 그것을 안무에 어떻게 활용할지 구상을 많이 했어요. 저는 막처럼 둘러싼 무언가를 원했는데, 보자기나 천은 국내외 공연에서는 너무 흔하게 사용되고 가려지면 춤이 안 보이니까 단순히 제시하기 위한 이미지로는 쓰고 싶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은 정당성이 있어야만 쓸 수 있고, 이미지만으로는 주장할 수 없으니까요. 그래서 ‘인연은 선물’이라는 개념으로 비닐로 된 막을 선택하게 된 거지요. 누군가를 만날 때 허물 벗듯이 모든 것을 다 내려놓지 않고서는 진정한 만남을 이룰 수 없다는 뜻을 담으면서. 오브제에 너무 매이면 지저분해보일 수 있기 때문에, 정 안되면 안 쓸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어요. 사실 가면과 밧줄도 끝까지 고심하면서 사용한 겁니다.
공연 장소를 이곳으로 택한 것도 의도가 있다고 보입니다. 그리고 김나이 무브먼트 콜렉티브의 무용수 구성은 어떻게 이룬 것인지, 비슷한 색깔의 무용수들이 모인 것 같아요. 앞으로의 일정도 궁금합니다.
여기 아니면 공연을 올리고 싶지 않았어요. 특히 하얀 의상과 낡은 벽이 대조되고, 서울역이라는 역사성이 있는 공간이라는 점이 마음에 들었어요. 작년 <장화 홍련 revisited>때도 특정 장소 공연을 했는데, 다소 제약이 있긴 하지만 그 장소만이 주는 특별한 느낌을 포기할 수가 없어서입니다. 무용수들은 제가 성균관대 출강을 하고 있는 관계로 도움을 받았어요. 현재는 박사학위 취득으로 학업은 마쳤고 머릿속에 구상 중인 작품들은 있지만 아직 구체적인 일정이 잡히지는 않은 상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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