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 현장

진관사 수륙재
중생 맘속, 뱃속의 걸신(乞神)을 배불리 먹이고 위로하는 제의
이지현_춤비평가

시아귀식(施餓鬼食)

배고픈 귀신 아귀에게 먹을 것을 베푸는 의식.

불설구발염구아귀다라니경(佛說救拔焰口餓鬼陀羅尼經)에 따르면, ‘면연(面然)’ 또는 ‘염구(焰口)’라는 이름의 아귀가 석가모니의 제자 아난에게 나타나 “갠지스강 모래알만큼 무수한 아귀들과 바라문 및 선인들에게 음식을 베풀어 공양하면, 그 공덕으로 수명이 연장되고 아귀도에 떨어지는 일을 면하여 천상에 태어날 것이다.”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고 한다. 불교가 중생의 고통을 없애기 위한 석가모니의 궁구의 결과이기에 특히 지옥, 축생, 아귀계라는 지독한 3악도의 중생 구제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특히 일상이자 생존 행위인 ‘밥’과 관련된 베품, 시식(施食)을 불교에서 지나칠 리 없다.

이런 아귀를 먹이고 위로하는 의식은 인도에서 시아귀식의 형식을 갖추고 중국에 수용되어 ‘수륙재(水陸齋)’가 되었다. 송대 천태종 승려가 지은 저술에서 ‘수륙(水陸)’이라는 명칭이 처음 등장하는데, “제선(諸仙)은 밥을 흐르는 물에 두고, 귀신은 밥을 깨끗한 땅에 둔다”는 문장에서 시식물을 진설하게 되는 장소가 ‘물과 땅’이라는 점을 반영하여 10~11세기에 들어 ‘수륙’이라는 명칭이 통용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수륙’이란 물과 육지에서 죽은 중생, 즉 온 천지의 배고픈 중생을 차별을 두지 않고 먹이고 천도하겠다는 상징적인 표현이기도 하다. 이 수륙재가 고려에 전해져서 우리 풍토에 맞게 독자적으로 발전하게 되고, 조선 전기에는 수륙재에 대한 많은 기록을 근거로 유행했음이 보고되고 있다.1)



수륙재



진관사 수륙사

10~11세기까지 국왕의 의지에 따라 주로 국가적 계획 하에 진행되었던 수륙재는 무신집권기에 들어 민간의 사찰을 중심으로 한 집단위령제의 성격으로 변화되었다. 그 후 태조 7년(1398) 진관사에서 수륙재를 베풀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권근(權近, 1352∼1409)이 편찬한 「진관사수륙사조성기(津寬寺水陸社造成記)」에 따르면 “내(태조)가 국가를 맡게 됨은 오직 조종(祖宗)의 적선에서 나온 것이므로 조상의 덕을 보답하기 위하여 힘쓰지 않아서는 안 된다. 또 신하와 백성 중 혹은 국사에 죽고 혹은 스스로 죽은 자 가운데 제사를 맡을 사람이 없어 저승길에서 굶주리고 엎어져도 구원하지 못함을 생각하니, 내가 매우 근심한다. (그래서) 옛 절에다 수륙도량(水陸道場)을 짓고 해마다 (수륙재를) 설행하여 내 조상의 명복을 빌고 또 중생들에게도 이익에 되게 하고 싶으니, 너희들이 가서 합당한 터를 살펴 보아라”라 하여 개국 과정에서 희생된 무주고혼의 천도를 위해 다시 나라에서 주관하여 진관사에서 수륙재를 베풀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조성기에 의하면 진관사에는 수륙재 설행을 위한 별도의 공간인 수륙사(水陸社)가 조성되었는데, 상중하의 3단으로 각각 3칸짜리 집을 마련하였으며 중단과 하단의 건물에는 좌우로 3칸씩의 욕실(浴室-영혼을 씻기는 관욕 절차를 위한 방)을 설치하고, 하단 건물의 좌우에는 다시 왕실의 조상을 위한 영실(靈室)을 8칸씩 설치하였다. 또 대문‧행랑‧부엌‧곳간 등을 두루 갖추어 이 공간에 세워진 건물의 전체 규모는 총 59칸에 달하였다고 한다. 국가적 행사이니 만큼 행사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수륙재를 위한 별도의 공간을 짓고 제대로 규모를 갖추어 진행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세종실록에 따르면 세종 6년(1424) 불교 종단이 선교 양종으로 정리될 당시 속전(屬田) 150결과 소속 승려[居僧] 70명에 수륙위전(水陸位田) 100결을 지정받았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수륙재 지원의 지속성을 위한 국가 차원의 지원과 그에 따라 보다 안정적인 진행을 유추할 수 있다.2) 결국 연산군 10년(1504) 인수대비의 칠칠재를 끝으로 불교식 상례로서의 국행수륙재는 더 이상 행해지지 않았다고 한다.


올해 진관사 수륙대재 〈우리 모두를 위해〉

2007년부터 동희스님에 의해 집전되던 수륙재는 2013년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유네스코 문화유산 등재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올해로 진관사 수륙재는 개건 626주년을 맞아 9월 1일 입재를 시작으로, 10월 19일 낮재, 20일 밤재를 끝으로 칠칠재의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총 9번의 재(7재+입재+밤재)와 더불어 8번 있었던 법문은 나라의 별이 된 영혼, 청소년, 사회초년생, 아기와 어린이, 엄마와 아빠 세대, 노년을 위해 올해의 슬로건인 ‘우리 모두를 위해’ 설해졌다.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지 10년이 넘은 재인 만큼, 모든 준비와 진행은 수륙재의 본산으로 불릴 만큼 화려하고 차질이 없었다. 불교방속국이 막강한 생중계 시스템은 현장감을 다 담아내지 못할까하는 우려를 가볍게 넘어서며 매번 3시간이 넘게 진행된 수륙재를 집에서도 여러 개의 눈을 가진 것처럼 절의 여러 곳에서 동시에 벌어지는 사소한 진행까지 유투브 라이브로 볼 수 있게 해주었다.

내가 참여한 마지막 밤재가 열린 10월 20일, 진관사의 일주문을 지나자 마자 그냥 흐름을 따라 가게 된 건 한 켠에 정갈하게 마련된 서서 먹을 수 있도록 차려진 식탁 앞이었다. 가는 길이 멀어 물론 배도 고팠지만 공양을 도와주시는 분들이 따뜻하고 섬세한 서빙은 ‘아! 여기가 배고픈 중생을 먹이는 수륙재구나’를 몸으로 느끼게 해주었다. 품질 좋은 재료들로 만들어진 나물 비빔밥과 미역국을 먹으며, 예로부터 아귀를 그냥 두면 세상살이의 모든 화근이 된다는 말씀을 깨달았다. 내 안의 가벼운 배고픔도 누군가 챙겨주고, 입에 넣어주니 감사하는 마음이 절로 일고 어디선가 쌓인 섭섭함이 사라졌다. 바로 이게 중생이구나!

이렇게 중생심을 다스려 절 안으로 들어가니 재가 한창이다.

동희스님으로부터 올해 초에 들은 바로는 스님은 수륙재가 끝나고 연초부터 국행수륙재보존회 산하 ‘수륙재학교’의 학장으로 매주 한번씩 진관사에서 진성, 일구, 덕현, 치향, 진용, 덕원, 능현, 선우, 본엄스님들과 함께 새로운 스님들을 학교에 받아들여 수륙재 준비를 하신다고 한다. 한겨울을 넘어 봄과 여름 내내 준비하여 9월부터 2달 동안 수륙재를 치르는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매년 스님과 함께 수업을 진행하는 어산 스님은 조교와 시범을 매년 함께 하시지만 그 외의 스님들은 이렇게 한해를 열심히 가르치고 배우고 나면 다른 소임을 위해 떠나게 되고 다음 해에는 또 새로운 스님들을 맞이해 같은 과정을 매년 반복해 오셨다는 말씀이었다.

세 계절을 거치며 쌓은 정성 때문이었는지 현장에서 보는 수륙재는 도량 마당에 설치된 괘불과 상단(부처님을 위한), 중단(보살님을 위한)의 상당한 규모에서 느껴지는 압도감과 장엄함과 더불어 긴 시간 집중과 철저함을 요구하는 재의 진행에 있어서 사부대중을 감복시키기에 충분했다. 수륙재의 절차는 모두 14단계로, 도량 밖에 나가서 영가를 맞이하여 모셔오는 시련(侍輦)으로 시작되어 대령(對靈)으로 영가에게 차와 국수를 대접하며 도량으로 들어오시길 청하고, 관욕(灌浴)으로 그간 떠도느라 생긴 고단함과 번뇌를 씻어드린다. 특히 이 관욕 절차는 아무리 몸이 없는 영가들이라 하더라도 수륙사에 설치된 별도의 가려진 공간인 좌우로 3칸씩의 욕실(浴室)에서 치러져서 볼 수 없는 것이 원칙이나 생중계를 위해 지붕 없이 만들어진 욕실 위로 드론이 촬영을 하여 절 입구와 도량에 놓인 화면을 통해 송출하여 볼 수 있도록 하였다. 정갈하게 무릎을 꿇고 앉은 스님이 작은 빗자루와 비슷하게 생긴 비로 대야의 물을 떠서 영가를 씻기는 과정을 볼 수 있었다.

그 이후는 신중작법(神衆作法)과 영산작법(靈山作法)으로 영가와 대중들에게 석가모니불의 영상회상을 현현시키기에 앞서 삿된 기운을 몰아내고 도량을 정화하는 작법을 실행한 후 영산회상을 의식작법을 통해 현현한다. 여기서부터 작법의 나비춤을 시작되고 의식의 순서에 따라 바라, 법고가 이어진다. 재는 법문에 이어 사자단, 오로단 등 하늘의 불보살님과 고혼들이 법회에 참석할 수 있도록 하늘 길을 열어주는 절차를 거켜 상단, 중단, 하단(외로운 영혼을 위한)에 공양을 드린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이 마지막에는 회향봉송(回向奉送)으로 불보살님과 고혼 등을 도량 밖에서 배웅해 드리는 것으로 마무리하고 이 모든 공덕을 모두의 성불을 서원에 회향하는 것으로 끝맺음을 하였다.



수륙재 〈나비〉



수륙재 〈바라〉



수륙재 〈법고〉



나라에서 백성의 억울한 죽음과 배고픔을 걱정하고, 그 원혼들이 떠돌며 공동체를 해꼬지 하지 않도록 시식하여 그들을 달래는 것이 과거 사회에서만 더 중요했다고 얘기 할 수 있을까? 진관사 수륙재가 어떻게든 중생에게 시식하고 각 계층 별로 나눠 법문으로 위로하고 힘을 주는 것을 직접 본다는 것은 그나마 다른 여러 종교행사 속에서 더 광범위하고 영혼과 살아있는 이의 몸을 차별하지 않고 챙김의 어떤 방향을 제시하는 것 같아 많은 위로가 되었다.

부처님이 중생의 고통을 안타까워하는 자비심으로 그 해법을 위해 궁구하고 고안해 내어 그 첫 설법을 펼친 영산회상이라는 형식을 빌어와 중생을 차별 없이 천대받는 이들과 배고픈 이들을 먹이고 달래서 법문을 듣게 하여 깨달음에 이르도록 하려는 것이 과연 불교를 종교로 가진 이에게만 와 닿는 일일까?



동희스님



20세기 들어서며 비구니 사찰이 된 진관사에서 동희스님의 지휘로 비구니 스님들에 의해 치러지는 수륙재는 또 다른 의미를 주었다. 불교 안에서도 교학이 중시되기 시작한 조선조에 들어서는 범패와 작법을 하는 스님들, 특히 비구니 스님들이 설 곳은 많지 않았다. 일반사회든 종교계든 여성의 자리는 미리 배려되지 않는다. 그 어려운 첫걸음을 누군가 묵묵히 자신을 내어주며 걸어갔을 때 그 길이 생기며 서서히 인정받게 되듯이 이 길을 먼저 닦은 분이 동희스님이시다.

옥수동 미타사, 석관동 청량사, 숭인동 청룡사, 보문동 보문사를 서울 근교의 4대 비구니 사찰이라고 한다. 6.25전쟁이 끝나고 6살의 나이에 사미니계를 받은 동희스님이 출가한 절이 바로 청룡사다. 청량산는 민비의 홍릉 축조 때문에 지금의 자리로 이전한 비운의 국모 민비와도 관련이 있는 사찰이다. 역시 비구니 스님이신 진관스님(1928-2016)이 전쟁 후 재건에 힘쓴 삼각산 진관사에서 추대하여 집전을 맡겨 수륙재를 봉행하는 것 역시 어려움 속에서 길을 가는 비구니 스님들의 묵묵한 노고의 흐름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비구니 스님들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영가들과 오로운 고혼들을 밥과 소리와 춤으로 위로하신다. 지금 여러분 영혼은 안녕하십니까? 동희스님 ‘법고’의 가녀리면서 엄중한 두둥 소리와 발디딤이 그렇게 묻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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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민순의(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객원연구원), 조선 전기 수륙재의 내용과 성격 ―천도의례(薦度儀禮)의 성격 및 무차대회(無遮大會)와의 개념적 차별성을 중심으로―, 2017, 불교문예연구.
2) 민순의, 법보신문, 2022.9.5. https://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311855

이지현
1999년 춤전문지의 공모를 통해 등단했다. 2011년 춤비평가협회 회원이 되었으며, 비평집 『춤에 대하여 Ⅰ, Ⅱ』를 출간했다. 현장 춤비평가로서 왕성한 비평작업과 함께 한예종 무용원 강사를 역임하고, 현재 아르코극장 운영위원과 국립현대무용단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2024. 11.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