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 현장
마당굿은 탈춤, 풍물굿(농악), 줄당기기(두레굿, 민속놀이)를 비롯한 전통사회의 마당판 민중연희를 총칭하기도 하고, 가까이는 1970년대, 80년대 대학가에서 일기 시작한 민속극부흥운동과 민중문화운동의 연희 매체들을 상징적으로 일컫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마당굿의 개념 안에는 위 종목 외에 무굿, 장승굿, 민요, 판소리, 시나위, 줄타기, 유랑연예, 전통무예 등 문화운동성을 지닌 민중연희뿐만아니라 문화운동의 선두주자인 창작탈춤과 마당극을 비롯하여, 노래굿, 그림굿, 집체극, 민족춤, 민족굿, 민족악극, 민족영화굿 등 여러 갈래의 매체들도 포괄하는 민중적 민족예술운동매체의 이념적 총칭이기도 합니다. 이때 마당굿은 ’마당‘과 ‘굿’이 지닌 오래된 전망을 새로 모두은 합성 조어입니다. 삶터에서 상황과 격돌하는 판의 마당굿은 21세기 새로운 ‘일놀이 두레굿’이자, 온갖 반생명에 대항하는 ‘생명평화총체연행’입니다.
이땅의 마당굿운동은 올해로 반 백년 전 대학가에서 일기 시작한 ‘민속극부흥운동’으로부터 말문을 엽니다. 1971년 9월 15일 서울대 동숭동 교정에서 대학생 탈꾼들로만 올린 봉산탈춤 한마당 공연은 매몰된 우리문화의 본향을 우리의 몸짓으로 되찾고 말겠다는 젊고 푸른 몸부림이었습니다. 못된 것을 믈리치고 경사스러움을 맞이한다(辟邪進慶)는 탈의 이데아를 어느 누구가 거역하리오. 거역하면 탈이 난다는 것을 관중과 함께 몸서리치게 확인한 신명과 씻김의 미적 체험마당이었습니다.
전국의 대학으로 들불처럼 번져나간 탈춤부흥운동은 대학의 청년문화를 뒤바꾸어 놓았습니다. 지식인 사회에서 새로운 민중문화운동을 일으키면서부터 농촌, 노동, 빈민의 문화운동으로 나아갔습니다. 범민중문화운동으로 확충되면서는 민중생존권쟁취운동과 함께 민족의 현실과제인 민주화운동과 민족통일운동으로도 나아가 민중 주체의 민족문예부흥운동의 한 중심갈래로 자리를 잡았습니디.
연행패의 갈래로는 마을굿, 고을굿 단위의 일선 생산계층의 두레패식 활동이 하나이고, 또하나는 전문적이고 유목적인 예인들로서 사당패식 활동입니다. 앞의 것의 구체적인 사례를 든다면, 크고작은 고을이나 도시 단위의 테마가 있는 지역축전(예를들어, 마산 앞바다 새물맞이굿)이 있고, 넓게는 민족통일대동장승굿이든가, 일본군위안부해원상생굿, 4 3 항쟁 해원상생굿, 동학농민전쟁 100주년 고부봉기역사맞이굿, 3 1 혁명 100주년 기념 민족평화제전 한겨레줄당기기와 생명평화 12 마당 부마항쟁상황재현굿 같은 나라굿을 들 수 있습니다.
그 문화운동의 배후에는 대학탈춤 출신들의 모임인 〈한두레〉가 있어 일선 전방부대의 몫을 하기도 하고, 한편 후방 기지로서 물심양면의 그윽한 배경을 이루어냈습니다. 그러기에 〈한두레〉는 문화운동을 실행하는 예술행동조직이면서, 한편, 범민중문화운동의 배경인 본원적인 예술동반층의 뜻을 아우르고 있습니다. 앞의 일이 〈놀이패 한두레〉라면, 뒤의 것은 한두레후원회 격인 〈한두레 신협〉입니다. 뒤의 일로서는 대학탈춤반에서 활동한 이와 그의 후견인이라면 이를테면 근원적으로 한두레회원이라는 것입니다.
1974년 봄 서울지역 대학 탈춤패 출신을 중심으로 채희완, 김순진, 강철구, 이애주, 홍석화, 장선우, 김현숙, 박미해, 박현경, 김기연, 백귀순, 이혜경, 김남수, 전연숙 등이 〈한국문화연구모임 한두레〉를 결성하고, 새로운 민중공동체 사회 건립에 투신하고자 하였습니다. 농경사회에서 두레조직은 같이 일하고 함께 먹고 더불어 노는 일선 농꾼들의 자치결사조직이었습니다. 민중공동체의식의 사회적 통로가 두레인 것이지요. 후기자본주의사회인 이땅 곳곳에 다시금 이를 건립하는 것이 한두레의 중장기적 목표지점이었습니다. 20세기 후반 이후 이땅에서 두레공동체는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실현가능한 것인가는 줄기찬 현실과제가 되어왔습니다. 이를 실현 가능케 하는 새로운 ‘일놀이두레굿’은 과연 무엇인가.
한편 민족문화연구자 모임인 〈한두레〉가 결성되는 즈음해서 이종구, 김민기, 채희완, 이애주, 임진택, 김석만, 김구한, 김영동 등이 이종구작곡발표회의 이름으로 1974년 3월 말 국립극장 소극장에서 〈소리굿 아구〉를 올렸습니다. 이 공연은 일본의 문화적 경제적 재침탈을 기생관광으로 풍자한 본격적인 마당극 1호로서, 공동이념과 전문성을 겸비한 이른바 문화1세대의 출범 선언이었습니다. 5월 이화여대 공연을 거쳐 10월에는 당시 민중문화운동의 본거지 원주에서 본격적인 제2탄을 올렸습니다.
또한 그해 6월 22~23일 국립극장 소극장에서 첫번째 이애주 춤판을 열고 창작춤극 〈땅끝〉을 올렸습니다. 서울대 이대 연대 서강대 등 4개 대학탈춤반연합의 기획으로 이애주, 채희완, 김민기, 김영동, 정재만, 장선우 등과 갓 몸태를 갖춘 신생 대학탈꾼들과 한국춤꾼들이 규합하여 올린 범한두레식 공연이었습니다. 내용 또한 비상한 시국 속에 한 판 벌일 수밖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외딴 섬 서낭당을 중심으로 폭압적인 통치권을 휘두르는 섬주에 맞서 이 체제를 깨뜨리는 청춘남녀의 사랑과 희생을 집단지성과 집단 육체성으로 그린 것이지요. 이로써 한두레는 민족예술 대장정의 첫해 첫 걸음을 내디뎠습니다.
그리고 1975년 봄 대학탈춤과 문화패를 강타한 오둘둘(5·22) 사태가 잠잠해진 이후 전용공간을 차린 보문동 시절을 지나 1978년 6월에는 동교동의 한 연습장에서 대학 안팎의 명탈꾼들로 출연진을 구성한 춤판 〈미얄〉을 올렸습니다. 근대화 과정에서 공업입국의 기치 아래 깔묻혀가는 농촌 출신 어린 여성 노동자의 삶의 역경과 사회저항을 춤극화한 것이었습니다. 임명구 문창룡, 정수범 이연수 김봉준 강정례 김종수 등 춤꾼들이 발디딜 틈조차 없이 관중들로 꽉찬 비좁은 지하 공간에서 한여름에 흘린 땀방울은 당시 이땅의 어린 여공들이 흘린 피눈물의 땀방울에 못지않은 것이었습니다. 땀방울이 떨어질 틈조차 주어지지않은 20평의 공간에서 200여명의 선택된 관중과 함께 올린 이 공연은 어느 신흥종교의 검붉은 집회 같기도 하였습니다.
같은 해 l2월 성탄절에 즈음하여 서울제일교회에서 김민기 작사 작곡의 〈노래굿 공장의 불빛〉 노래테이프를 가지고 춤판을 벌였습니다. 채희완의 연출과 안무로 이연형 임명구 조경만 박우섭 강정례 김경란 김종수 조혜정 등 한두레 단원과 한승호 박종관 등 기장문화패가 어울려 올린 것입니다. 공연장 안팎에서 죄어드는 삼엄한 분위기는 노래굿의 내용보다 훨씬 더 절박하고 억압적이어서 경찰의 저지망을 뚫고 들어온 출연자와 관중들에게 더할 수 없는 참담한 현실감을 꼼짝없이 강요했습니다.
이 노래테이프의 제작 의도는 단순 명쾌하였습니다. 노동자 자신의 노동현실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노조 결성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노동자 대중이 이 노래 테이프에 맞추어 노래하며 춤춤으로써 알아간다는 것입니다. 근로 대중과 가장 간편하게 소통할 수 있는 이 노래 테이프를 만드는데 제작자는 남들이 알지못하는 그늘진 곳에서 생명의 위협을 감지하면서도 어기차게 수행해냈습니다. 이는 민중과 함께 하는 이의 단호한 예술의지의 발로 그 너머 시대적 역사적 부름에 몸던져 받자온 이의 자기 결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름다운 예술 속에 사는 것보다 아름다운 사회 속에 사는 것이 먼저라는 것을 스스로 공표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를 두고 가히 한두레적 예인의 실천행이라 하는 것이지요. 근현대시기를 통틀어 우리 최초의 서사음악춤극이라 할 만한 이 작품을 원작자는 노래굿이라 명명하였습니다. 이는 노래굿운동의 대중화의 첫 시도로서 마당굿운동의 한 분수령을 이루었습니다.
이후 민족예술운동과 함께 하는 마당굿운동은 민중운동과 민주화운동 현장에서 마당극으로, 창작탈춤으로 민족춤, 노래굿, 그림굿으로, 민족음악, 민족영화 등으로 장르가 확산되었습니다.
1988년 봄에는 한두레의 중심인물 중 한 분인 유인택이 총괄 기획하여 전국의 놀이패와 극단 등 20여 마당극, 마당굿패가 서울에 모여 두 달간 ‘제1회 민족극한마당’을 개최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그 여세를 몰아 그해 겨울에는 〈전국민족극운동협의회〉를 결성하였습니다.
〈칼노래 칼춤〉 전단, 1994, 2001 ⓒ채희완 |
1994년에는 그간의 축적된 힘으로 전국 각 광대들이 전북 고부와 정읍에 모여 열흘간 합숙한 끝에 마당극 20년, 동학 100주년 기념으로 2월 26~27일 〈고부봉기 역사맞이굿〉을 올렸습니다. 역사의 현장인 정읍,전봉준 생가, 고부, 말목장터, 만석보 등지에서 각 지형지세와 역사성에 따른 크고작은 마당극, 마당굿 12마당을 이동 관중과 함께 새벽부터 온종일 펼치면서 마당굿운동의 새 지평을 열었습니다.
그 행사의 중심부를 이룬 마당극 〈칼노래 칼춤〉은 한두레 대표 임명구의 총괄기획 아래 부산, 마산, 광주, 공주로 순회공연을 하였습니다. 그해 10월 30일~11월 9일 문예회관 소극장에서는 마당극 20년 한두레 20년의 이름으로 〈칼노래 칼춤〉의 실내 마당판을 벌였습니다. 〈칼노래 칼춤〉은 고부봉기역사맞이굿의 한 부분입니다. 분담과 병진의 총체 유기성으로 부분의 독자성이 발휘될 때에는 전체를 구성하는 한 부분은 전체를 대표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칼노래 칼춤〉 ⓒ채희완 |
이제 탈춤 마당굿 〈칼노래 칼춤〉은 동학혁명의 도화선이 된 고부봉기의 역사적 현재성을 마당굿 연희패에게 어떻게 맞이하고 있는가를 묻고 있습니다. 과연 이 시대 한두레의 세상을 실현하기 위해 마당굿운동은 무엇을 어떻게 수행해나가야 하는 것인지, 50년만에 원초의 물음으로 되돌아왔습니다.
채희완
부산대 명예교수, 〈(사)민족미학연구소〉 소장, 〈부마항쟁기념사업회〉 이사, 〈창작탈춤패 지기금지〉 대표를 맡고 있다. 저서로 『공동체의 춤 신명의 춤』, 『한국의 민중극』(엮음), 『탈춤』, 『한국춤의 정신은 무엇인가』(엮음), 『춤 탈 마당 몸 미학 공부집』(엮음), 『지극한 기운이 이곳에 이르렀으니』 등을 펴냈고, 그밖에 춤, 탈춤, 마당극, 민족미학에 관련된 논문과 춤 비평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