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 현장

공동체의 춤 신명천지 마당굿 11
숨은 예인 한마당, 드러나지 않아 쩔어 그윽한 예인정신을 기리며
채희완_춤비평가

1. 민족미학연구소에서는 해마다 한해가 저무는 12월이면 전국의 숨은 예인을 찾아나선 끝에이들을 모시고 한바탕 노는 자리를 마련해 왔습니다. 회원들 사이 문화예술의 나눔을 통해 연구소 단위로 해넘이를 한다는 뜻도 그러하지만 한해 동안 우리의 문화적 삶을 갈무리한다는 뜻이 더 짙은 것이지요. 사람 사는데 소리나 춤, 놀이 한 자리가 어느 땐들 없겠습니까마는 숨은 예인한마당은 그러한 뜻을 더해줍니다. 숨은 예인 한마당은 묻혀져 있는 이 시대 예인의 삶과 예술을 찾아나섰습니다. 이들의 연행은 기존의 예술 장르에 포함되어 있지 않거나, 예술로 쳐주지도 않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남다른 재능과 예능을 일부러 기성 무대에는 내세우지 않기도 하여, 그저 평범하게 일상적으로 삶을 사는 가운데 생겨나 삭히고 쌓인 민초들의 표현일 것입니다. 알려지지 않은 이들, 일부 그들 사이 알려져 있되 기성 예술사회에서는 깔묻혀있는 민중연희의 예인들을 모시는 것이지요. 먹고 살기에 허덕이면서도 이에서 빚어낸 신명의 산물, 억울한 한스러운 삶 속에 배어있는 그늘진 삶의 정서, 예술을 한다고 하지도 않는 이들의 삶 속에 스며있는 예술혼을 찾아내고, 애써 드러내지 않으려는, 숨어있는 쩔은 예인 정신을 드러내고 이를 기리고자 합니다. 이들은 분명 잘 알려지고 대우받고 평가받는 예술가들이 기억해야 할 한국의 원형적인 예인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무대는 화려하고 대규모적인 것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들의 무대를 근현대 한국민중예술학의 현장으로 드높입니다.

2. 민족미학연구소에서 올리는 <숨은 예인한마당>은 1993년 경남 양산 두메에서 논밭 매며 부르는 지심 소리의 명인 김말수선생을 캐내고, 경남 영산에서 나무하며 부르는 어산령의 명인 설영무선생을 내세워 큰 소문 없이 시작하였습니다. 이후 경남 밀양 영남루에서 날이면 날마다 노래와 악기연주와 만담으로 지나는 관람객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 이들, 거리의 악사들, 소리꾼들을 비롯하여 이 시대의 이름없는 재인, 광대, 창우패를 찾아나서기도 하였습니다. 2001년부터는 정식으로 무대 자리를 잡아 마산 불모산 영산재 보유자이신 석봉 큰스님을 모시고 원공, 우공, 해공, 지공 스님과 부산민주공원 소극장에서 제1회 숨은 예인 한마당을 올렸습니다. 그 이듬해에는 1950년대 무성영화 <검사와 여선생>의 마지막 남은 변사이신 신출선생의 모노드라마를 올리고는, 2003년엔 새로운 소리공양을 베푸는 <꽃등 들어 님 오시면>을 작곡하고 부르는 범능스님(속명 정세현)의 <노래이야기 마당을 멈추고>를, 그 이듬해엔 부산지역 째즈밴드의 첫주자 박은익선생과 그 일행, 그리고 부산 소리꾼 홍순연선생의 합동무대 <재즈와 소리의 만남>을 마련했지요. 2005년엔 우리춤 언어를 모아 <춤동작>을 펼쳐내신 박금슬 명무를 이어받은 ‘속울음 겉웃음’의 춤꾼 김광숙 선생의 <꽃처럼 봄은 춤> 무대를 올렸고, 그 이듬해엔 서울과 부산에서, 서예와 바라춤과 불무도를 혼음한 범성스님의 퍼포먼스, 소리의 대중공양을 받드는 범능스님의 소리마당, 몸 움직임의 속울림이 사지 끝까지 번지는 임현미 춤, 끔찍한 새 발상의 신진 김옥희 춤 등을 함께 올렸습니다. 2007년과 2008년엔 대학교수로서 시인이자 문학사가이며 평론가인 이동순 교수의 <노래로 풀어보는 한국 근현대>를 연이어 올렸습니다. 올해 2009년은 소리가 소리를 불러 소리마다 속울음이 되어버린 동래지역 소리춤계의 마지막 예기 유금선 선생을 모시고 소리 한마당을 고이 접어올립니다.

3. 유금선 선생을 소개합니다.
스물다섯 살 결혼 이후 소리 인생길을 따라 살며 한때 찻집, 오릿집 식당운영도 하다가 예순에 이르러 부산시 지정문화재인 동래학춤의 예능 보유자로 지정되어 본래의 소리 삶을 제대로 살게 되었다.
1929년 부산 동래권번 바로 옆집에서 나신 유금선 선생은 영남의 소문난 예인이었던 고무 유항앵의 보살핌으로 어린 시절을 보낸다. 열네 살부터 3년간 외사촌 언니 석록향과 함께 동래권번에 들어가 소리, 춤, 악기에 묵화, 한자공부, 교양 등을 두루 배운다. 특히 소리수업은 보성소리 송계 정응민의 제자인 박기채 선생으로부터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하여 안중근 열사가, 유관순전 등으로 이름높은 강창범 선생, 소리와 춤의 명인 최소학 선생 등에게서 소리와 춤을 배운다. 경상도 출신에 호남소리를 익히니 그것은 충돌이 아니라 화해였다. 해방전후와 한국전쟁 이후 그 당시 원옥화, 김강남월, 안향면 등과 함께 온천장 가무계를 주름잡았다.

4. 선생의 소리는 쪽빛처럼 여리게 푸르면서 속에 단단한 결기가 속 한과 겉신명을 타고 마치 동래 온천의 검푸른 뜨거움처럼 우리의 심금을 적신다.

5. 동래의 마지막 권번 출신 유금선선생의 여든 소리 잔치를 맞아 못다한 정을 풀어내시는 무대를 올려 모십니다. 소리가 소리를 불러 소리 따라 뜨거운 속울음이 되어버린 삶, 동래의 마지막 소리꾼 유금선 소리 한마당을 고이 접어 올립니다. 숨어 곳곳에 베인 삶의 그늘을 거두어 보릿대 문디 춤한자락 얼러대기로 속시원히 풀어 헤쳐 설설이 내리소서.



(2009년 <숨은 예인 한마당> 기획의 초대글입니다.)

채희완

부산대 명예교수, 〈(사)민족미학연구소〉 소장, 〈부마항쟁기념사업회〉 이사, 〈창작탈춤패 지기금지〉 대표를 맡고 있다. 저서로 『공동체의 춤 신명의 춤』, 『한국의 민중극』(엮음), 『탈춤』, 『한국춤의 정신은 무엇인가』(엮음), 『춤 탈 마당 몸 미학 공부집』(엮음), 『지극한 기운이 이곳에 이르렀으니』 등을 펴냈고, 그밖에 춤, 탈춤, 마당극, 민족미학에 관련된 논문과 춤 비평문이 있다.​​​​​​​​​​

2025. 3.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