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 현장

김기인춤문화재단의 서클 댄스
봄날, 마로니에공원의 떼춤
이만주_춤비평가

5월 중순의 화창한 봄날,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공원.

전국에서 모여든 춤꾼들과 감정이입된 수십 명의 관객이 함께 어울려 즉석에서 즉흥으로 떼춤을 추었다. 살아 있는 사람들이 춤으로 그려내는 움직이는 만다라(曼陀羅, mandala)였다. 작고 무용가 김기인이 좋아했던 원(圓,circle)을 바탕으로 춤꾼들이 원융(圓融)을 이루었다.

올해로 제25회를 맞는 서울국제즉흥춤축제(Seoul International Improvisation Dance Festival/Simpro)가 2025년 4월 20일부터 5월 23일까지 서울 대학로예술극장, 남산국악당, 광진어린이극장 등에서 열렸다. 이 축제의 프로그램 중 하나로 5월 18일 오후 2시 40분부터 30여 분간 ARKO 극장 앞마당 마로니에공원에서 김기인춤문화재단이 주관하는 ‘서울시민과 함께 하는 즉흥 파티(I)’라는 제목으로 서클 댄스가 추어졌다.



김기인춤문화재단의 서클 댄스 ⓒ김채현



이와 같은 장면이 연출되기까지에는 긴 사연이 있다.

2010년 9월 3일, 불세출의 춤꾼이자 현대무용 안무가였던 김기인이 타계했다. 당시 서울예술대학 무용과 교수였던 그녀는 밤늦게까지 안산캠퍼스에서 학생들의 공연 연습을 지도하던 중 쓰러진 것이다. 그녀는 1980년대와 1990년대 초반, 현대무용이라는 장르의 매력을 일반에게 알린 무용가 중 한 사람이었고, 이미 그 시절 독자적이고도 한국적인 현대무용을 선보이던 우리 춤계의 아이콘(Icon)이었다. 당시 그녀에게는 팬덤(fandom)이 형성되어 있어 공연을 따라다녔다. 창작무용 관람 인구가 얼마 안 되는 한국의 춤계 풍토에서는 특이한 경우였으며 현재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녀와 같은 아이콘은 쉽사리 탄생하지 않을 것이다.

독일에 유학하고 있던 언니 김기선은 동생의 춤 공연을 많이 관람치 못했다. 하지만 그녀가 본 몇몇 작품과 자료들을 통해 “김기인 춤이야말로 한 무용가가 추구할 수 있는 궁극의 춤이다”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갑작스런 동생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만큼 충격적이었다. 그러나 그 누구보다도 가장 슬퍼한 이는 현재는 재단이사인 막내 김기중이었다. 그는 ‘춤의 화신’으로 살았던 누나를 기리는 재단을 만들 것을 제안했고, 다섯 형제들이 한마음으로 동의해, 다음해 2011년 8월 김기선을 이사장으로 김기인춤문화재단이 발족했다.

김기선은 독일 튀빙겐대학에서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철학자다. 니체는 몸현상학자인 프랑스의 메를로 퐁티(Maurice Merleau-Ponty, 1908~1961)보다 훨씬 앞서, 몸에 대한 깊은 통찰을 남긴 철학자다. 그는 정신과 이성을 상위에 두었던 플라톤과 기독교의 전통적인 사고를 벗어나 몸을 정신과 이성보다 우선시했다(니체는 저술에서 ‘물리적 신체’를 뜻하는 Koerper 대신 ‘근원적 존재’로서의 몸을 뜻하는 Leib라는 단어를 사용함).

니체는 “예술은 삶을 더 깊이 사랑하게 만드는 방식”이라 했다. 또 그의 저서 『비극의 탄생』 에서 “우리에겐 예술이 있어 진리로 인해 파멸되지 않는다”라고 썼다. 그리고는 예술가는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자, 즉 ‘초인(Uebermensch)’의 역할을 한다고 했다. 우리는 초인을 멀리서 찾을 것 없다. 춤예술에 있어 독자적인 ‘철학과 기법(method)’을 추구하고 춤계에 큰바람을 일으킨 사람이 있다면 그 또한 ‘위버멘쉬’가 아닐까? 





김기인춤문화재단의 서클 댄스 ⓒ이만주



김기선은 재단 설립 후 지금까지, 다양한 시도로 김기인을 기리는 사업과 우리 춤계에 대한 많은 후원을 해오면서 앞으로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해야 하는 가에 대한 생각을 정리했다. 기획재단으로서 첫째는 김기인 춤의 결정이라 할 수 있는 ‘스스로춤’의 이론과 기법을 정리하여 후대로 이어지게 하는 일이다. 둘째는 그녀가 십수 년 전 접한, 누구든 참여하여 다 함께 어울려 추면서 명상과 치유 효과를 얻을 수 있는 서클 댄스(circle dance)를 보급, 확산시키는 일이다. 이 둘은 그 철학에 있어 공통되는 부분이 있다​.

여러 사람이 둥글게 원을 만들어 추는 떼춤인 서클 댄스는 어느 민족에게나 있다. 그러나 오늘날 신성무(sacred dance), 성스러운 원형 춤(sacred circle dance)이라고도 부르는 서클 댄스는 대략 50년 전, 독일 출신의 무용가, 안무가이자 무용 교육자였던 베른하르트 보진(Bernhard Wosien, 1908–1986)에 의해 시작되었다.


자기 자신이 춤을 추고 안무하던 그는 춤이 단순한 오락이나 남에게 보이는 예술을 넘어, 개인의 내면 성찰과 정화, 영적 성장, 나아가 공동체의 치유 수단으로 활용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1976년, 스코틀랜드 북부에 있는 핀드혼 공동체(Findhorn Community)에 초청되어, 자신이 고안한 서클 댄스를 사람들에게 소개하며 서로 의견을 나누었고 그 후 그리스, 발칸, 러시아, 켈트 등 여러 민족의 원형무를 참고해 오늘날 서클 댄스의 이론과 방법을 정립했다.





김기인춤문화재단의 서클 댄스 ⓒ이만주



고급 예술이라는 것은 어찌 보면 소수(the few)의 고급 향수자를 위한 것이다. 고급 관객을 위해 예술성 짙은 춤 작품을 발표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다수의 일반인들을 참여시켜 그들에게 예술 행위를 한다는 충족감을 주고 그리하여 치유(healing)의 효과를 준다면 그것 또한 춤의 큰 역할일 수 있다. 원을 이루어 함께 돌며 추는 것이 특징인 서클 댄스는 누구나 참여할 수 있고, 공동체 춤이면서 개개인이 주체가 되는 춤이다. 춤 실력보다는 서로의 연결과 조화가 중요하고, 음악과 움직임을 통해 명상과 치유의 효과를 기하면서 공동체의 일체감을 갖게 한다. 특정 종교에 얽매이지 않으며, 다양한 문화와 삶의 철학을 포용하여 춤을 통해 삶의 신성함을 경험하도록 유도한다.

한국에서도 몇몇 사람이 대전, 제주도에서 서클 댄스를 해오고 있었고 지금은 서울에서도 일부 사람들이 추고 있다. 우연한 기회에 서클 댄스를 접한 김기선은 매료되었다. 2016년, 제주도 강경희 선생의 서클 댄스 그룹에 속한 사람들과 함께 스코틀랜드 핀드혼에서 열렸던 ‘세계서클댄스 40주년 축제’에 다녀왔다. 그리고 연이어 매년 독일, 스위스 등지에서 열린 다수의 서클 댄스 워크숍에 참가했다.

15여 년 동안 재단을 이끌어오면서 그녀는 결국 김기인의 제자로 김기인이 추구했던 춤의 세계를 가장 잘 이해하는 성신여대 대학원 외래교수인 하혜석과 좋은 케미를 이루게 된다. 하혜석은 김기인이 처음 서울예대 교수로 부임한 후, ‘스스로춤’을 정립해나갈 때의 제1기 제자라 할 수 있다. 재단이 생길 때부터 참여했고 지금은 상임이사다. 그녀는 대학에서 ‘움직임과 표현(movement and expression)’을 주로 가르치지만 무용심리치료(dance theraphy)를 위시한 예술심리치료(art theraphy)에도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

김기선은 하혜석이야말로 재단 차원에서 서클 댄스를 널리 보급시킬 만한 능력을 가진 무용가라고 생각해 그녀를 서클 댄스의 세계로 입문시켰다. 하혜석은 조화로운 성정과 함께 영성을 추구하는 면을 갖고 있다. 무엇보다 서클 댄스가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한국전통춤의 춤사위를 살린 서클 댄스를 안무할 역량이 있다고 생각되었다.

2023년, 김기선은 하혜석을, 지인 셋이서 두 달간 그리스를 비롯해 독일 몇 곳의 서클 댄스 워크숍에 참가하는 유럽 여행에 초대했다. 이어 2024년에도 하혜석과 또 다른 셋이서 역시 거의 한 달간 독일, 아일랜드 등지의 워크숍에 참가했다.



2024년 5월 제주돌문화공원에서 선보인 서클 댄스



김기인춤문화재단이 제주돌문화공원에서 열리는 설문대할망제에 ‘스스로춤’ 외에 서클 댄스를 처음 선보인 건 2016년이었다. 그 후, 매년 ‘스스로춤’과 함께 서클 댄스가 추어졌다. 2024년 5월부터 하혜석이 설문대할망제에 합류했다. 같은 해 11월 말, 서귀포시 약천사에서 서클 댄스의 큰 스승인 프리델 클로케-아이블(Friedel Kloke-Eibl)을 초청해 김기인춤문화재단 주관으로 국제워크숍을 개최했다. 이 워크숍에는 열 두서너 명의 독일인과 스위스인, 한 명의 일본인이 참가했다.

올해 2025년 5월 15일에 열린 ‘설문대할망제’에서는 하혜석이 한국춤 춤사위에 제주도의 분위기를 살려 안무한 ‘할망아리랑춤’이 서클 댄스로 선보였다. 한국화한 서클 댄스를 모두가 어울리며 흥겹고 신명나게 추었다. 제주돌문화공원의 풍경과 어우러진 ‘할망아리랑춤’은 보는 이들의 찬탄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는 지난 5월 18일 서울 마로니에공원에 다시 모여 모두가 참여하는 서클 댄스를 추게 된 것이다. 하혜석의 영도(領導, lead)로 네 곡과 함께 서클 댄스가 추어졌다. 첫 번째로는 영적이고 내면적인 평화를 추구하는 핀란드 미사곡인 ‘내 목소리를 들어주소서(Kuule minun aaneni)’, 두 번째로는 막간의 여흥(Divertissement)을 위한 곡에 맞춰 모두가 원을 이루며 어울려 춤을 췄다. 김기인의 제자이자 ‘스스로춤’을 마지막으로 이어받은 박성율이 가운데서 춤을 추며 센터 피스(center piece) 역할을 했다. 춤꾼들이 원의 중심을 축으로 방사형 대칭을 이루기를 여러 차례. 산스크리트어로 ‘원’ 또는 성스러운 공간을 뜻하며 우주의 구조와 신성한 질서를 상징한다는 만다라, 불교에서 우주 법계의 온갖 덕을 갖춘 것이라는 뜻의 만다라가 살아 있는 사람들의 몸과 춤으로 그려졌다.

세 번째는 “존재(Sat)가 현존하는 의식(Chit)으로 체화되면 그것이 곧 지복(Ananda)의 상태를 이룬다”는 내용을 담은 인도 명상 음악인 Satchita, 네 번째는 세계인들이 애창하며 이제는 평화와 반전을 상징하는 세계적 운동가요가 된 비틀즈 출신 ‘존 레논’의 ‘Imagine’과 더불어 한바탕 마지막 춤판이 벌어졌다.

어느 순간, 전국에서 온 춤꾼들, 관객들, 어린이들, 모두 70~80명이 김기선, 하혜석과 함께 춤추고, 토머스 하나(Thomas Hanna)의 몸학(Somatics)을 한국에 처음 소개한 명지대 예술체육대학의 김정명 명예교수 부부가 같이 어울려 추며 원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함께춤, 어울림춤, 대동춤이라고도 할 수 있는 서클 댄스에서 김기인, 베른하르트 보진, 토머스 하나, 해탈의 춤, 무애무를 추셨던 원효가 어울리고 있었다.



김기인춤문화재단의 서클 댄스 ⓒ이만주



멋진 춤을 추기 위해, 고급스런 예술춤을 추기 위해 눈을 외부로 돌릴 필요가 없다. 서클 댄스는 단순한 동작을 반복하면서, 또 사이사이 각자 멋대로, 자유자재로 춤추면서 자신의 내면과 만날 수도 있고, 움직임 속에서 하는 명상으로 치유(healing) 효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우주만유 일체를 상징하는 ‘원’의 형상은 김기인의 춤에 자주 등장했었다. 그녀는 중심에서 시작하여 퍼져나가 원을 그리며 회전하다가 다시 중심으로 회귀하는 일련의 작품들을 내보이곤 했었다. 그녀는 “네 안의 춤이 살아나게 하라, 스스로 저절로 흘러나오는 것만이 진정한 것이다”를 강조했었다. 그녀의 ‘스스로춤’은 ‘서클 댄스’와도 깊은 관계가 있는 것이다.

그 먼 옛날, 인류는 본래 춤을 들에서 추었을 것이다. 예술춤(concert dance)은 바깥에서 흥겨우면 어울려 추던 것이 실내로 들어온 것이다. 이제 서클 댄스는 춤을 다시 바깥으로 되돌린다. “춤도 배워서 추나”, “모든 사람은 예술가다”라는 말이 실감 나는 봄날이었다. 배우와 관객이 따로 없었다. 서클 댄스는 출연자와 관객이 함께 어울리는 한국의 마당놀이 그대로였다. 요즘 회자되는 커뮤니티 댄스(community dance)의 진수라 할 수 있었다.

이만주

춤비평가. 시인. 사진작가. 무역업, 건설업 등 여러 직업에 종사했고 ‘터키국영항공 한국 CEO’를 지냈다. 여행작가로 많은 나라를 여행하며 글을 썼고, 사진을 찍었다. 사회성 짙고 문명비평적인 시집 「다시 맺어야 할 사회계약」과 「삼겹살 애가」, 「괴물의 초상」을 출간했다.​​​​​​​​​

2025. 6.
사진제공_이만주, 김채현 *춤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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