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 현장
지속의 무게와 몸이 남긴 시간 – 하야로비무용단 창단 40주년
2025년 9월 10일(수) 금정문화회관 금빛누리홀에서 열린 하야로비무용단 40주년 기념공연은, 한때 단체의 일원이었던 필자에게 더욱 특별한 시간이었다. 부산 최초의 동인 무용단체로 출발한 하야로비무용단 40주년은 로컬을 넘어 한국 현대무용 전체에 의미를 더했다. 이번 공연은 하야로비무용단의 시간이 어떻게 축적되고 전승되었는지 부산무용이라는 큰 울타리에서 공유하고 회고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하야로비무용단 40주년 팸플릿 |
춤은 사람을 재료로 표현하는 예술이기에 단체에 머무르고 떠나고 다시 돌아오는 과정이 반복되기도 한다. 또한 로컬사회의 조건, 예술 환경과 지원체계의 변화가 겹쳐지며 ‘몸의 직접성’을 안고 단체의 결을 쌓아간다. 동인 무용단체로 창단해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어온 과정에는, 수많은 단원들의 땀과 헌신, 로컬 무대의 조건, 그리고 시대에 따라 변해온 예술 환경이 얽혀 있지만 이번 하야로비무용단의 40주년 소개는 A4 크기 양면으로 심플했다. 단순한 숫자에 의한 기념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더라도 하야로비는 10주년–25주년–30주년마다 단원들이 안무하고 서로의 작품에 무용수로 무대에 올라가며 시간을 끊지 않았고, 명칭도 ‘하야로비 현대무용단’에서 ‘하야로비무용단’으로 다듬으며 정체성과 활동 반경을 현재형으로 이어왔다.
특히 25주년을 맞았을 때는 단순한 기념공연에 그치지 않고, 지역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무용교육과 예술통합 프로그램을 병행하며 무용의 대중화를 모색했다. 움직임을 통한 감성 교육, 학교·지역사회와 연계된 문화예술교육은 예술단체가 공동체와 어떻게 호흡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시도였다. 이러한 경험은 하야로비무용단이 예술과 교육, 공동체를 아우르는 활동으로 확장해 온 근거가 되었다.
이러한 연속적 표식들이 지금의 하야로비를 지탱한 실제적 근거이다. 그러므로 40주년의 기록은 당일 공연되는 작품 소개 이외에 그간의 연보(창단·예술감독 변천·대표 레퍼토리·협업자 네트워크·지역 예술교육 프로그램), 그리고 관객과 지역이 어떻게 이 시간을 함께 만들었는지 메시지를 담았다면 40주년 하야로비무용단 〈체념증후군〉(금정문화회관 금빛누리홀, 9월 10일)이 남긴 현장의 온도와 하야로비의 40년은 다음 세대가 참고할 수 있는 살아 있는 기록으로 전달될 수 있었을 것이다. 로컬 춤판의 중요한 행보였음에도 채우지 못한 객석과 공연 후 한적한 로비 풍경은 더위를 피해 9월부터 시작된 많은 공연과 행사 때문이었을 것이라 짐작해 본다.
하야로비무용단, 1985 |
몸에 새겨진 과거와 현재
〈체념증후군〉에는 연출 손재서, 안무와 체념증후군에 빠지는 소녀 역할을 맡은 정기정, 그리고 궁다빈, 김현정, 박소희, 박은영, 정나원, 정승환, 하이경, 방영미가 출연했다. 연출을 맡은 손재서는 오랫동안 극단 자갈치와 부산민예총1) 동을 이어 온 연극인으로 최근 하야로비무용단 단원들과 다양한 행사에서 협업을 지속해 왔다. 그는 검은 통2)을 단순 소품이 아니라 서사의 축으로 삼아, 밀집-탈출-항해로 잡거나 과밀한 통에서의 압박과 비집고 나옴을 단순한 장면이 아니라 몸의 물리적 조건으로 제시했으며 검은 통-소녀의 안식처나 배 또는 집단-항해로 극의 흐름에 따라 변화시켜 춤 작업과 맞물려 설득력 있게 연출했다. 음악감독 이광혁은 관객이 바라보는 무대 오른쪽 끝에 자리하며 무용수들의 움직임을 가까이에서 보고, 즉각적으로 반응하고 호흡했다. 소리는 배경을 넘어 하나의 퍼포먼스로 기능했고, 장면의 여운이나 증폭, 장면을 자연스럽게 이어나갔다. 시노그라피(Scenography)의 백철호는 꾸준하게 하야로비무용단과 작업하며 이번 무대에서도 안무가와 몸의 질감이 읽히도록 공간을 채웠다. 무용수의 면면도 인상적이다. 김현정은 프리랜서로 부산에서 오랫동안 활동해 온 무용수로, 이미지가 생성되는 순간과 격렬한 군무 속에서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며 무대를 이끌었다. 하이경은 작은 체구에서 나오는 깊고 긴 호흡으로 시선을 사로잡았고, 궁다빈, 정나원, 정승환, 박은영은 각자의 호흡과 움직임을 맞춰가며 군무의 역동성을 견고하게 완성했다. 박소희는 연습 중 부상으로 객석에서 공연을 지켜봐야 하는 안타까운 상황이었지만, 작업을 하다 보면 무용수가 부상을 입고 무대에 오르지 못하기도 하는 현실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부침은 무용단체에게도 찾아온다. 2018년 동래문화회관 상주단체 시기, 하야로비무용단은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마침 그 시기는 코로나와 겹치며 단체의 문제는 깊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고, 그 침잠의 시간이 다시금 도약의 에너지로 전환되고 있다.
창단 세대에서 현재까지 – 지속의 흔적
춤의 현재를 살아내기 위해서는 언제나 ‘창단 세대의 상징성’이 필요하다. 나무의 뿌리가 보이지 않아도 나무를 지탱하듯, 하야로비무용단의 초석을 놓은 초대 회장 김형희를 비롯해 강신미, 김경순, 김남미, 김미영, 노현정, 이혜경, 황명숙은 곧 뿌리이자 기억이었다. 대학 입학 전, 필자에게 로컬 동인 단체의 첫 현대무용 공연을 보여주었던 이 세대는 하야로비무용단의 기원을 알게 해준 출발점이기도 하다. 그 가운데 예술감독이었던 하정애는 창단과 함께 단체의 길을 열었고, 그 길 위에서 수많은 무용수들이 춤을 이어가도록 토대를 마련했다.
하야로비무용단은 그로부터 10년 후, 10주년을 기념하며 전국 순회공연에 나섰고, 창단 17년 즈음에는 임연희가 부산무용제 대상을 수상하며 전국무용제에서도 성과를 남겼다. 또한 대학 무용과 폐과, 2005년 「문화예술교육지원법」 제정, 부산문화재단의 출범이라는 변화의 시기 속에서 이미혜는 지역사회와 연계된 예술교육의 기반을 다지며 활동의 영역을 교육과 치유로 확장했다. 이후 공백기를 지나 다시 돌아온 방영미와 정기정은 하야로비의 부침과 더불어 40주년을 함께 증언하고 있다.
철학사가 철학자들을 통해 이어지듯, 무용단체 역시 무용수를 통해 사람과 사람을 잇고 역사를 지속한다. 무용수는 단순히 무대에 오르는 재료가 아니라, 지금 무대에 서 있는 이들뿐 아니라 과거에 함께했거나 이미 단체를 떠난 이들까지도 여전히 그 존재를 지탱하는 뿌리다. 작품이 뿌리에서 피어난 꽃이라면, 무용수들의 삶과 증언은 단단한 결을 이루어 역사의 토대가 된다. 따라서 하야로비무용단의 역사는 특정 세대만의 서사가 아니라, 지나간 이들, 돌아온 이들, 그리고 현존하는 이들이 함께 새겨온 공동의 기억이다. 춤은 단순히 무대 위에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예술가와 공동체가 함께 살아낸 시간의 집적이자 증거다.
하야로비의 여정은 단순한 지역 단체의 사례를 넘어, ‘춤이 어떻게 현재를 살아내고 있는가’를 묻는 증언이자 성찰로 남는다. 오늘의 무대는 어느 한 사람의 성취가 아니라 수많은 손과 숨이 쌓인 공동의 시간이다. 우리는 그 시간을 박수 너머 기록으로 남긴다. 안무자, 무용수, 스태프, 후원자, 비평가, 관객까지 수많은 이들의 발자취가 오늘을 가능하게 했으며, 그 과정을 지속하기 위해 얼마나 치열한 고민과 노력이 필요했는지 알고 있다. 결국 예술적 이상과 현실적 조건 사이에서 흔들리면서도 무대를 지켜내려는 모두의 의지가 켜켜이 쌓여 지금의 하야로비무용단 40년을 가능케 했다. 이처럼 그 40년이라는 시간은 지속되어왔다.
하야로비무용단 연혁 (부분)
- 1985. 1. 18. 창단
- 1985. 9. 하야로비 현대무용 공연
- 1985. 12. 하정애 현대무용 발표회 협연
- 1986. 6. 86 하야로비 현대무용 실험무대
- 1987. 5. 하야로비 현대무용공연
- 1990. 5. 국제현대무용제 참가
- 1991. 5. 국제현대무용제 참가
- 1994. 11. ~ 1995. 6. 하야로비현대무용단 창단 10주년 순회공연(서울, 구미, 울산 등)
- 1996. 6. 부산무용제 참가
- 1998. 8. 부산바다무용축제 참가
- 2002. 7. 부산무용제 참가
- 2002. 9. 전국무용제 참가
- 2004. 6. 부산무용제 참가
- 2009. 7. 하야로비무용단 25주년 기념공연
- 2010. 6 ~ 10. 하야로비무용단 찾아가는 문화활동
- 2015. 12. 하야로비무용단 30주년 기념공연
- 2025. 9. 하야로비무용단 40주년 기념공연
소극장공연 (부분)
-1993 ~ 2004년 관객과의 만남을 위한 하야로비 현대무용 공연(부산SAY 소극장, 연당소극장, 떼아뜨르 마리나, 코드소극장 등)
해외초청공연 (부분)
-1992. 6. 국제공연예술페스티발 참가공연(이스탄불 국립 오페라 하우스)
-1993. 8. JADE’93 JAPAN ASIA DANCE EVENT 초청공연(일본도코 동경유빙조깅홀)
-2004. 11. 조선통신사 한일 문화 교류 참가공연(일본 쓰시마)
-2005. 10. 한일수교40주년기념 문화교류초청공연(일본 신주꾸문화소극장)
수상내용
-1990. 12. 제2회 봉생문화상 수상
-2002. 7. 부산무용제 대상 수상
-2002. 9. 전국무용제 금상, 미술상 수상
──────────────────────────
1) http://openart.or.kr/ 사)부산민예총은 부산지역 문화예술인들이 모여 지역의 문화예술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지역의 이슈들을 예술행동으로 시민들과 소통해 오고 있는 단체이다.2) 대형 고무 대야(다라이)
함수경
11대 하야로비무용단 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잉스문화예술교육연구소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프래그머티즘 미학에 근거한 예술교육 연구로 교육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춤 현장과 예술교육과 치유의 접점을 탐구하며 무용리뷰와 안무 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자료_ 하야로비현대무용단 창단 40년을 맞아
현대무용의 자유정신과 반듯한 춤의 규범성
김태원_춤평론, 「공연과 리뷰」 편집인
하야로비현대무용단이 창단되었던 1985년은 대학 중심의 무용과의 전국적 확산과 동인 창작 활동의 증대가 이루어지면서 지역춤 운동의 필요성이 요구되던 시기였다. 따라서 서울을 제외하고 가장 예술적 춤의 운동이 활발했던 부산에서 당시 부산여대-현재 신라대-중심의 하야로비현대무용단의 등장은 매우 자연스러운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간 하야로비현대무용단은 그들의 창단이념을 자유정신을 기반으로 한 현대무용 고유의 기술성과 창작정신의 고취, 그리고 서구적 현대무용의 테크닉과 한국적 전통성의 조화에 두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나에게 강한 인상으로 남아 있는 것은 후자보다는 전자와 관련한 가치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데, 나는 그것을 1990년대의 한 평문에서 "오늘의 국내 현대무용단체 중 하야로비 만큼 서구적 현대무용의 테크닉을 잘 규범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춤단체는 없다"고 적었던 것 같다. 이때 내가 말한 '규범성'은 일종의 춤테크닉의 스텐다드(표준)이라고 불러볼 만한 것인데, 아다시피 현대무용의 테크닉이 매우 다양하다 보니까 그것을 수용하는 국내 춤단체의 미적 잣대는 당시로서는(물론 오늘날에도 어느 정도) 어떤 측면 혼란스러웠다 할 수 있었는데. 그러나 하야로비의 경우에는 그런 혼란을 벗어나 매우 표준화된 테크닉을 신기하게도 잘 수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테크닉은 나의 관점으로 볼 때는 이른바 천편일률식으로 유행하다시피 한 마사 그레이엄의 테크닉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도리스 험프리와 리몽으로 이어지는 테크닉에 더 가깝다 할 수 있을 것인데. 그 테크닉이 갖고 있는 독특한 낙하/상승의 탄력성과 음악성은 현대무용의 교육적 측면에 있어서나 창조적 측면에 있어서도 매우 소중한 부분이어서, 그만큼 하야로비의 성공적인 기술적 수용은 우리 현대무용계 전체로서 매우 중요한 것이기도 했다.(이것은 특히 90년대 '서울 ADF 의 국내 개최시 하야로비 단원들이 어느 현대무용단체의 단원들보다도 더 적극적인 참여를 꾀해 국내외적으로 주목을 받았던 사실에서 알 수 있다.)
한편, 그간 하야로비현대무용단의 활동은 매우 다양해서 나는 한두 줄로 그 성격을 이 지면에서 다 이야기한 수는 없다. 그러나 나에게 강하게 남아 있는 몇 가지 부분들을 이야기해볼 것 같으면, 하야로비 현대무용단을 정신적으로 이끌고 있는 하정애 교수는 매사 현대무용의 열린 창조정신과 반듯한 춤의 교육정신을 강조하는 모범적인 지도자의 상(像)을 갖고 있고, 현재 서울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는 하야로비의 초대 회장이었던 김형희(현재 트리스트무용단 대표)는 인종의 이국적(때로는 여행자적인) 감성을 짙게 갖고 있었던 열린 의식의 춤꾼이었으며, 현 회장이기도 한 임연회는 특히 〈충격, 그리고 홈수〉와 같은 작품을 통해 단순하지만 강렬한 춤의 구성법뿐만 아니라 서울의 뛰어난 현대춤꾼들에 비해서도 결코 뒤지지 않을 파워 있는 움직임을 소유했던 이였다. 그리고 항상 하야로비의 중심에 있었던 노현정 · 김경순 · 강인숙 ٠ 김보영 · 정기정 등은 그들 나름대로의 각각의 다양한 주제 의식을 탄탄한 춤동작을 사용. 색채감 있게 구성해 보여주었던 충꾼들이었으며, 허윤정은 매우 흥미롭게도 일종의 형이상학적인 춤의 주제를 현대무용으로 표현하려고 인상적인 노력을 보여주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이후 하야로비가 배출한 많은 수의 무용가들을 나는 일일이 나 기억할 수는 없지만. 앞에 든 몇 가지 예로만 보아도 부산 하야로비현대무용단의 활동이 큰 단체의 규모에 비해서 매우 다채로웠고 또한 건강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지난 1980년대 중반 이후 한국 현대무용의 세계를 풍요하게 만든 부분이면서, 동시에 부산 중심의 예술춤 운동을 볼 만한 것으로 만든 한 중요한 미적(美的) 자원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