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 현장
이나현이 이끄는 유빈댄스가 20주년을 맞이했다.
아날로그 시대라면 강산이 두 번 바뀐, 디지털 시대라면 쇼츠를 약 350만 개 볼 시간이다. 현대무용 민간단체로서 녹록지 않은 그래서 가벼이 여길 수 없는 동시대 춤의 역사이고 현재다.
2025년 12월 18일~20일 3일에 걸쳐 전주 문화공판장 작당에서 선보인 이번 프로젝트는 ‘전시+팝업 스테이지+렉처퍼포먼스’라는 형식의 짜임새와 흥미로움뿐 아니라 지난 20년간의 작업에 대한 깊이 있는 리서치와 아카이빙, 무용단의 기반과 운영에 대한 체계 확립 등 이나현의 안무철학과 작업의 깊이를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특히 2025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공연예술창작주체지원사업의 핵심플레이어 예술단체의 중장기 활동을 지원받은 ‘유빈이콜로지 UBIN-ecology’의 첫해 사업으로, ‘연구, 나눔, 성장’이라는 중장기 비전을 바탕으로 지난 20년의 활동을 되새기고 전주로 거처로 옮겨 새롭게 유빈의 거듭남을 모색하고자 하는 단체의 기획의도를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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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안무노트 20+α: 20년의 기록과 도래할 생태계〉, 유빈댄스 제공 ⓒ류진욱 |
전시는 20년간 50여 개의 작품에서부터 안무가의 생각과 논리를 끌어올려 ‘안무노트(choreography notes)’라는 주제 아래 입체적으로 재구성하여 5개의 장으로 전개된다. 특히 전시 아카이빙 기획의 주된 생각들은 그간 이나현 안무가가 자신의 춤 논리를 설득하기 위해 성실히 실천해왔던 렉처퍼포먼스 시리즈 〈안무노트〉(2018~2025)의 내용들을 충실히 분석하고 되새기고 다듬어 구조화된 결과물이라 하겠다.
‘NOTE_01 안무가의 독백(Artist’s Monologue)’에서는 유려하고 영민한 무용수에서 안무가이자 무용수로, 그리고 오로지 안무가로서 춤에 유령으로 존재하는 안무가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담아내었다. “나 자신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춤을 춘다”는 안무가의 선언은 춤이 미(beauty)나 주제(theme)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며 춤은 움직임 그 자체라는 확고한 예술철학을 투영한다. 안무가의 선언은 독백의 글로, 그리고 QR코드에 새겨진 나지막한 안무가의 육성으로 만나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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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안무노트 20+α: 20년의 기록과 도래할 생태계〉 전시: 안무가의 독백, 안무가의 재료, 유빈댄스 제공 ⓒ류진욱 |
‘NOTE_02 안무가의 재료(Tools & Materials)’에서는 자신만의 움직임 언어를 탐구하고 무용수들에게 이를 이해시키고자 분투했던 안무가의 재료들을 도식으로 한눈에 그려낸다.
안무가의 재료는 그간 그녀의 작품 안에서 지속적으로 탐구되고 실험되었던 요소들을 크게 ‘몸’, ‘관객’, ‘관계와 구성’, ‘음악’으로 구분하고, 그 안에 존재론, 물질-몸, 안무논리, 움직임, 공간, 질감, 감각, 감각융합, 공감각, 운동감각, 시각, 촉각, 청각, 렉처퍼포먼스와 같은 재료들로 제시한다. 이 재료들은 위계적 종속적 선형적 관계를 이루지 않고 해체적이면서도 공기를 떠다니는 입자들처럼 작업 과정에서 부유하며 응집하는 유기적인 생각의 지도를 그려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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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안무노트 20+α: 20년의 기록과 도래할 생태계〉 팝업 스테이지, 유빈댄스 제공 ⓒ류진욱 |
팝업 스테이지(the Move Assembly)에서는 안무가의 재료를 직접 사용하여 춤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를 관람객이 직접 또는 무용수의 시연을 통해 체험하고 이해할 수 있다. 몸, 공간, 시간, 움직임으로 구별된 수십 가지의 재료카드를 무작위로 뽑아 자유롭게 순서를 나열하면 무용수들이 즉흥적으로 선별된 내용을 움직임으로 구현해 내는 안무게임 방식이다. 이를 통해 관객들은 NOTE 02에서 개념적으로 제시되었던 안무가의 재료들을 직관적이고 경험적으로 이해하고 즐길 수 있게 된다.
‘NOTE_03 대화(From Dancers & Critics)’에서는 유빈과 오래 작업했던 무용수들(신혜진, 강요섭)과 조명감독(공연화), 선배 예술가(안애순), 비평가(정옥희)가 바라본 이나현과 유빈댄스의 작업에 대한 경험과 생각을 담아낸 인터뷰와 전주의 대표 공간에서 촬영된 유빈의 작업스케치를 영상으로 만날 수 있다. https://youtu.be/CxtqSJjjvOc?si=oeLeq7ULBxaL5SG-
‘NOTE_04 앤솔러지’에서는 20년간 파편적 사건들로 존재했던 50여개의 작업들을 시간의 흐름으로 나열한 연보로 본 전시의 출발점이 되는 원자료들을 일목요연하게 제시한다. 작품의 내용과 참여무용수, 대표 이미지뿐만 아니라 무용축제 초청과 공공예술기금지원, 렉처 퍼포먼스, 주요 대표작 등의 구분을 한눈에 살펴봄으로써 유빈의 성장과 예술적 생각의 전개를 이해하고 조망할 수 있다. 또한 앤솔러지의 선형적 나열을 감각, 즉흥, 비정형성, 구성연구, 음악의 구조, 춤의 내재적 리듬, 매체 활용, 관객과의 소통 등 내재적 주제로 키워드화하여 작품간의 논리적 관계를 프로젝션 매핑 영상으로 시각화하여 제시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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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안무노트 20+α: 20년의 기록과 도래할 생태계〉 전시: 앤솔러지, 도래할 생태계 ⓒ류진욱 |
전시의 마지막 챕터 ‘NOTE_05 도래할 생태계’는 앞으로 유빈댄스가 모색하는 미래를 담아보고자 했다. 그 생태계는 작은 책자 형태로 무용수들이 유빈댄스의 연습과정에서 느낀 생각의 메모들을 간략히 담아 전시되어 있지만, 그 속에 담긴 경험의 시간과 내용들은 더욱 오래고 깊다.
‘유빈이콜로지 UBIN-ecology’사업을 통해 유빈댄스는 전주를 기반으로 오디션을 통해 무용수를 선발하고 지난 1년간 즉흥테크놀러지, 펠든크라이스, 접촉즉흥, 한국무용 등 움직임 워크숍과 기존 작품들의 작업 분석과 재해석 연구 과정을 통해 ‘유빈스러움’이 무엇인가를 고민하고 쌓아나갔다. 또한 유빈댄스 컴퍼니 II ‘유 코레오랩(U ChoreoLab)’ 결성을 통해 유빈의 생태계를 확장하기 위한 교육, 창작, 안무, 지역연계, 콘텐츠발굴을 위한 활동도 시작하였다. 유빈의 무용수들은 일회성 공연을 위해 소진되고 교체될 수 있는 도구가 아니라 안무가의 논리를 온몸으로 이해하고 수행하는 유빈 만의 ‘진짜’ 무용수가 되어가는 유빈의 진행되고 도래할 생태계를 만나볼 수 있다.
12월 20일 전시공간의 절반에서 자연스럽게 이어졌던 메인 공연 렉처 퍼포먼스는 이나현 안무가의 생각 속으로 걸어 들어가 안무가의 작업 논리를 온전히 들여다볼 수 있는 공감각적 체험의 장이 되었다. 전시에서 글과 체험으로 안무 논리를 이해하고자 한 관객들은 렉처 퍼포먼스에서 춤으로 안무가가 쌓아온 생각과 앞으로의 계획을 한층 깊이 있게 공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춤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다뤄온 이전 5년간의 〈안무노트〉 기획들과는 달리 이번 공연에서는 지난 20년간 만들어진 춤과 앞으로 만들어나갈 춤에 대한 이야기와 그 춤의 일부를 선보였다. 유빈 만의 고유 언어인 움직임의 특질이 무엇인지, 안무란 무엇인지, 안무를 통해 붙잡고 싶은 군무란 무엇인지, 춤에서 감각은 무엇이고 어떻게 확장되는지, 춤의 내재적 의미란 무엇인지, 안무의 과정에서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춤은 어떻게 발생되는지, 그리고 앞으로의 작업에서 리듬과 공간을 어떻게 춤의 주제로 담아낼 것인지에 대한 논리적이고 수행적인 렉처와 퍼포먼스가 영상과 함께 배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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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안무노트 20+α: 20년의 기록과 도래할 생태계〉 렉처 퍼포먼스, 유빈댄스 제공 ⓒ류진욱 |
렉처 퍼포먼스에서 안무가는 주제적 질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렉처하는 것과 함께 자신의 생각이 가장 잘 반영되어 있을 솔로춤을 무용수들이 재해석하는 방식을 덧붙였다.
〈시선의 온도〉(2017) 〈텅빈 혼잡〉(2008) 〈Below the surface〉(2003)의 솔로들을 무용수들이 탐구하고 재해석하는 과정에서 고민하고 느낀 생각들이 재해석한 춤의 수행과 함께 목소리로 발화되었다. 관객들은 안무가의 생각을 무용수의 생각과 재해석된 춤과 함께 보고 듣고 느낄 수 있었다. 작품들이 작품들로서가 아니라 작품의 논리를 예증하는 재료로 활용된 방식, 그리고 무용수가 ‘진짜’로 춤추기 위해 안무가의 춤을 탐구하고 재해석한 춤을 추어내며 그 생각을 발화하는 방식, 짧지만 관객 스스로 신체의 감각을 깨워낼 수 있는 움직임 체험, 제거된 조명, 최소화된 음악 등은 춤의 내재적 가치를 증명해 보이고자 하는 안무가의 철학에 빈틈없이 철저하게 논리적이고 설득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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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안무노트 20+α: 20년의 기록과 도래할 생태계〉 렉처 퍼포먼스 ⓒ유빈댄스 |
이번 프로젝트가 선보인 문화공판장 작당은 전주의 한옥마을과 함께 전통문화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남부시장 한복판에 있다. 과거 원예공판장을 리모델링하여 2024년 오픈한 복합문화공간으로 시장 2층의 청년몰 유치와 함께 세대간 문화의 융합과 소통의 중심지를 모색하고 있다. 그러하기에 전시와 공연을 찾은 관객들은 무용전문 관객뿐 아니라 시장 공간을 찾은 청년 및 중장년층의 일반 관객도 함께하였다.
특히 팝업 스테이지에서의 무용수의 시연과 설명, 관람객 스스로의 체험은 누구나 안무가가 될 수 있다는 상상 넘치는 기대와 자신이 만든 안무재료가 즉흥적으로 눈앞에서 춤으로 완성되는 희소한 경험으로 높은 흥미와 이해의 반응을 끌어내었다. 작품으로 어렴풋이 만나온 혹은 만나지 못했던 춤과 안무가 조금은 감각과 경험의 단계로, 참여자들의 삶의 일부로 스며든 즐거운 시간을 그들의 설레인 미소에서 확연하게 감지할 수 있었다.
이나현 안무가의 논리는 간명하지만 지극히 관념적이면서 신체적이고 감각적인 사유에 근거한다. 오직 감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춤을 어렵다고 말하는 관객들을 위해 안무가는 예술가의 사명으로 애써 설명하고 이해를 구한다. 안무가는 연구로, 전시로, 팝업 공연과 체험으로, 렉처 퍼포먼스로 다각적인 노력를 마다하지 않는다. 춤을 환언하거나 담론 아래 사로잡히기 쉬운 드라마투르기 방식이나 안무의 논리를 춤 바깥에서 찾는 안무 리서치와는 정 반대에 서 있는 이나현의 안무철학은 오로지 춤 안에서 춤의 내재적인 원리를 탐구하고 그 원리를 수행하는 사건으로 작품을 실천하는 것에 있다.
이번 〈2025 안무노트 20+α: 20년의 기록과 도래할 생태계〉 프로젝트는 그녀의 안무철학에 대한 가장 짜임새 있는 설명의 과정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설득은 무료 전시 관람객이 이튿날 유료 공연의 관객으로 이어질 만큼 자못 성공적이었다. 내년 3월 전주 한국소리문화의전당에서 있을 유빈댄스의 신작 〈무·율·경 舞·律·景〉도 관객들의 감각과 이해를 일깨우는 데 부족함이 없으리라 기대한다.
성균관대학교 무용학과 초빙교수와 댄스&미디어연구소 연구원으로 동시대 춤 미학과 비평에 대해 가르치고 연구하고 있다. 실천연구에 관심을 갖고 유빈댄스 〈유빈이콜로지〉 사업에 크리에이티브 퍼실리테이터로서 리서치와 아카이빙에 참여하고 있다. 2004년 국제공연예술제 제1회 젊은비평가상을 수상하였으며, 춤웹진, 몸, 춤과사람들, 춤in 등에 기고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