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 우리
지난 글에서 소개했듯 오늘날 ‘코레오그래피’라는 용어가 대중적으로 널리 통용되는 것에는 단연 케이팝 문화의 영향이 지대하다. 아카데믹 무용계에서 ‘안무’, ‘안무가’라는 개념을 일찍이 정립된 것과는 대조적으로 케이팝 / 방송댄스계에서 안무의 대두는 비교적 최근의 현상이다. 이러한 현상은 언제부터, 또 어떤 흐름에서 기인하게 된 것일까?1)
K-아이돌의 시초와 ‘방송댄스’
서태지와 아이들 – 하여가 |
요즘의 케이팝과 달리 스트릿 장르 춤이 방송 무대에 그대로 올라가던 시절이 있었다. ‘아이돌 그룹’이라는 개념조차 생소하게 받아들여지던 시대, 한국 대중음악 시장 자체에 새로운 바람이 끊임없이 불어 닥치던 시대. 그중에서도 한국 대중음악사를 뒤흔든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그룹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이었다. 소방차, 김완선 등 서태지와 아이들 이전에도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던 댄스가수들이 더러 있었지만 이전의 가수들이 무대를 즐겁게, 색다르게 장식하기 위해 (방송국 무용단과 함께) 재즈 동작이나 곡예들을 활용했다면 서태지와 아이들은 힙합 댄스를 방송 무대 위로 가져와 대중적인 파급력을 보여준 최초격의 시도였다.2) 이들의 선풍적인 인기와 함께 ‘회오리춤’, ‘버터플라이’ 등의 힙합 동작들이 유행을 끌기도 했다. 당대 최고의 힙합 춤꾼들이 캐스팅되어 가요계를 주도하는 분위기가 한동안 지속되면서 듀스, 클론 등 일종의 힙합 루틴에 다양한 프리스타일을 구사하는 무대가 많았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성공 이후 본격적인 댄스 그룹, 아이돌 문화의 가능성을 본 한국 가요계는 H.O.T, 젝스키스, S.E.S, 핑클 등 10대를 겨냥한 1세대 아이돌들을 필두로 본격적인 아이돌 시대에 돌입한다. 한동안 흑인 문화의 유행을 안고 힙합 베이스의 음악과 춤이 대세였고, 걸그룹들 또한 통큰 바지에 힙합, 락킹 동작들을 활용한 안무를 선보이곤 했다. 아이돌 멤버들이나 백업댄서들이 화려하게 스트릿 테크닉을 선보이는 댄스브레이크도 필수 요소였다.
H.O.T – 전사의 후예 |
S.E.S – Dreams Come True |
이전 세대의 그룹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무대에서의 즉흥이 사라지고 완전히 확정된 안무를 매 무대마다 동일하게 반복적으로 수행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3) 그러다보니 아이돌의 춤을 따라 추는 인구도 더 늘어났다. (커버 댄스의 시초일지도!)
K-POP 안무 시대의 도래와 ‘포인트 안무’
모두들 알다시피 1세대 아이돌의 등장 이후 한국의 대중음악 시장은 점차 다양한 컨셉과 장르의 음악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무대 또한 한 두 장르의 베이직 동작들을 반복하는 형태가 아닌 동작들의 연결로서 안무 춤의 형태로 자연스럽게 진화하게 된다. 아티스트나 앨범 컨셉, 곡 자체의 표현을 염두에 두고 무대 퍼포먼스를 구성하게 된 것이다.
나아가 2000년대를 거치며 강력한 중독성을 가진 후렴구를 무기로 경쟁하는 대중음악의 경쟁적 시기가 도래하게 되면서 후크송과 포인트 안무가 국민적 인기를 얻는 히트곡의 필수 조건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이전에도 대표적으로 클론, 핑클, 이정현 등 센세이셔널한 대표 동작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곡들은 줄곧 있어왔지만 춤이 대중적 인기의 선결 조건이 되는 것은 확연히 새로운 기준의 도래였다. 춤/안무의 비중이 높아지자 뮤직비디오에서 댄스 장면이 등장하는 시간도 훨씬 길어졌다.
원더걸스 – Tell Me |
소녀시대 - Gee |
카라 - 미스터 |
원더걸스, 소녀시대, 카라 등 여자 아이돌 그룹들이 지금도 거론될만한 대박 곡과 대박 안무로 잇따라 히트를 쳤고, 그 결과 소위 ‘포인트 안무’가 걸그룹 곡에서 차지하는 중요도는 오히려 음악을 압도할 정도가 되었대도 과언이 아닐 지경이었다. (이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경향이기도 하다.) 잇단 아이돌 그룹의 초대박 행진에 힘입어 한국은 아이돌 전성시대에 접어들고 케이팝 문화는 일정 수준의 체계와 공식을 공유하는 하나의 산업으로 성장한다.
K-POP과 ‘칼군무’
기억에 남는 포인트 안무와는 또 다른 한 줄기로 대중들의 감탄을 자아내는 높은 퀄리티의 퍼포먼스도 케이팝을 받치는 중요한 근간으로 떠올랐다. 수많은 아이돌 그룹과 퍼포먼스가 만들어지고 공유되는 시대에 케이팝 안무 수준과 아티스트 수행 능력이 동시에 상향 평준화되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룬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보이그룹에게서 먼저 강하게 나타났다. ‘칼군무’라 불리는, 이제는 케이팝 퍼포먼스의 가장 중요한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아이돌 퍼포먼스에서의 댄싱 퀄리티. 모든 멤버가 복제된 듯 하나의 몸처럼 움직이는 모습에 대중들은 감명받았고 강하게 매료되었다. 인피니트, 비스트, 틴탑 등의 보이그룹이 오랜 연습 기간과 트레이닝의 결과물로서 칼군무를 보여주기 시작했고, 마침내 BTS에 이르러 칼군무의 정점이 빛을 발하게 된다. 단합된 몸짓과 파워풀한 에너지로 강하게 밀어붙이는 퍼포먼스는 BTS를 대중들에게 각인시키는 키워드가 되었으며 이는 국내를 넘어 해외까지 케이팝과 케이팝 아티스트들을 알리는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다. 케이팝 아이돌들의 댄스퍼포먼스 - 칼군무는 커버 댄스의 국제적인 인기와 무대가 아닌 연습 영상의 소비라는 새로운 문화를 창출해내기도 했다. 이와 같은 현상은 보이그룹 뿐 아니라 걸그룹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어 팬덤을 구축하는 주요한 방식이 되고 있다.
BTS – 가요대전 Performance Practice |
‘코레오그래피’가 K-POP의 주축이 되기까지
이렇듯 케이팝의 눈부신 성장에서 춤/퍼포먼스/안무의 역할이 지대한 가운데 또 한 가지, 케이팝-방송 분야와 댄스-코레오그래피씬이 분리되어 활동하던 과거와 다르게 서로 교류하게 된 변화도 한 몫을 했다. 이전에는 방송댄스팀에 소속되어 활동해야만 케이팝 안무에 참여할 수 있었다면 이제는 케이팝 산업 밖에서 자신만의 개성으로 활동하고 있던 댄서/안무가들에게도 안무 참여의 기회가 주어지게 된 것이다. 이 영향으로 방송 안무의 공식처럼 받아들여지던 특정 스타일들을 벗어나 신선하게 느껴지는 개성있는 안무 스타일이 케이팝에 빠르게 적용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자연스럽게 안무가 개인 혹은 안무가 그룹에 대한 대중적인 관심 또한 증가하게 되었으며 안무라는 행위 자체에 대한 주목 역시 커지고 있다. 이제 케이팝 팬들은 내가 좋아하는 아티스트의 안무에 누가 참여했고 어떤 부분이 채택되었는지, 이 안무가는 어떤 스타일을 가지고 있는지 찾고 파악한다. 이는 그간 코레오그래피씬의 발전과 케이팝 시장의 확장이 한 지점에서 만나 선순환을 그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https://youtu.be/ZbOOwaaLAaE
IVE – Love Dive 안무 시안 비교 컨텐츠
어느새 4세대로 불리는 아이돌들이 신선한 아이디어로 대중을 사로잡고 있는 이 때, 음악 뿐 아니라 춤-안무의 중요성이 어느 때보다 대두되고 있음은 자명하다. 케이팝이 하나의 음악 장르일 때 가장 기본이 되는 요소는 당연히 음악이겠지만 안무가 담당하는 파이가 절대로 음악에 뒤지지 않는 것이다. 엔터테인먼트사들은 조금 더 새롭고 높은 퀄리티의 작품을 내놓기 위해 앞다투어 능력있는 퍼포먼스 디렉터와 안무가들을 섭외하고 대중적이면서도 아이코닉(iconic)한 안무를 만들어줄 것으로 요청하고 있다. 더군다나 하나의 곡에 여러 안무가가 시안을 제출하고 이 중 좋은 부분들을 골라내어 한 작품으로 꿰어내는 최근의 디렉팅 경향은 열린 자세로 더욱 새로워질 케이팝 스타일들을 기대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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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케이팝(K-POP)’은 한국 대중가요를 뜻하는 포괄적인 용어로서 1960~70년대의 팝, 록음악, 포크뮤직 등을 시초로 보고 있으나 본 글에서는 현재 케이팝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아이돌 산업에 초점을 맞추어 1990년대 이후의 한국 대중음악계로 시기를 한정해 그 자취를 좇아가보고자 한다.
2) 서태지와 아이들보다 먼저 흑인 음악과 힙합 댄스를 국내 가요계에 소개한 가수로 현진영(이후 그룹 ‘현진영과 와와’ 활동)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서태지와 아이들의 파급력에 비할 수 없거니와 서태지와 아이들 활동 이후 현진영의 무대 또한 더욱 발전된 힙합 댄스 무대로 거듭났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3) “정밀한 테크닉, 오차 없는 K팝 춤…BTS는 현대무용가” 헤럴드 경제, 2022.8.17. https://n.news.naver.com/article/016/0002029570
이아로미
서울대학교 미학과 학사 및 무용원 이론과 전문사를 졸업 후 코레오그래퍼/강사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