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 우리
요즘 방송가에서는 교양과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이 줄어들었고 예능 프로그램이 압도적 인기를 누리고 있다. 이런 현상은 지난 2010년, 종합편성채널이 등장한 시점부터 더 거세졌다. 지상파 방송보다는 상대적으로 덜 까다로운 규정, 시청자들이 TV 프로그램을 정보의 창고보다는 엔터테인먼트 용도로 바라보는 시각이 강해졌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에 들이는 수고와 제작시간, 제작비용을 볼 때 이후 협찬사나 광고가 붙는 숫자와 금액이 예능 프로그램과 비교할 때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이유도 있다. 최근 예능 프로그램은 콘텐츠 시장에서 수출 공신으로 떠오르고 있기도 한데 그 이유는 전 세계적으로 ‘포맷(format) 시장’이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포맷은 무엇이고, 포맷이 중요하게 떠오른 세계 콘텐츠 시장의 흐름을 공연계, 춤계에서는 어떻게 바라보고 무엇을 적용할 수 있을까.
런닝맨이 달리다가 ‘돈방석’에 앉은 이유, K-Format(포맷)의 힘
‘포맷(format)’은 최근 방송가에서 가장 핫한 용어이다. 프로그램의 진행과 구성 형식을 뜻하는 말로, 해외에 프로그램 자체를 판매하는 게 아니라 이 포맷을 판매함으로써 수익을 내고 있다. 일종의 판권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예를 들어 지난 2010년부터 지금까지 방송을 이어오고 있는 장수 예능 프로그램 〈런닝맨〉의 경우도 중국 저장위성TV에서 프로그램 자체가 아니라 프로그램 포맷을 판매했다. 저장위성TV는 출연진들을 중국의 인기 연예인으로 섭외하고 현지의 장소들로 로케이션해서 〈달려라 형제〉라는 제목의 프로그램으로 탄생시켜 방송하고 있다. 이 점이 프로그램 자체를 판매하는 것과 포맷을 판매하는 것의 차이점이다.
‘SBS ‘런닝맨’ 포맷을 구입해서 제작한 중국 저장위성TV ‘달려라 형제’ @SBS, 저장위성TV |
포맷은 이제 수출 공신이 되어가고 있고, 제작진들에게는 소위 ‘돈방석’이 되고 있다. 다큐멘터리는 어떤 아이템을 다뤘느냐, 그것을 제작진이 어떤 시각에서 심도 있게 파들어 갔느냐가 중요하고, 이미 제작된 프로그램을 판매한다. 하지만 예능 프로그램은 이렇게 포맷만 판매하는 것이 가능하기 어떤 포맷으로 기획하느냐가 중요하다. 포맷은 잘 만들어놓은 주물, 틀 같은 것이어서 해외 어느 곳에 가도 그 틀 안에 해당 국가의 유명 연예인이나 인플루언서로 출연진을 변경해 그 나라에 맞는 프로그램으로 재탄생할 수 있고, 포맷을 사간 방송사는 포맷 구입 비용 이상으로 수익을 올릴 수 있는 것이다.
방송프로그램에서 포맷이라는 용어가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1989년 영국의 제작사 셀라도가 만든 〈누가 백만장자가 되고 싶은가(Who Wants to Be a Millionaire?)〉라는 퀴즈쇼 때문이다. 이 프로그램은 공전의 히트를 치면서 그 포맷이 전 세계 100여 개국이 넘는 나라로 수출돼서 2억 달러가 넘는 수익을 올렸고 이후 방송가에 포맷에 대한 관심과 열풍을 일으켰다. 우리나라는 2003년 KBS의 〈도전 골든벨〉을 베트남에 수출한 것을 시작으로 활기를 띠었고, 런닝맨, 히든 싱어, 복면가왕 등 우리나라 예능 프로그램들이 해외에 팔려나가면서 K-포맷은 이제 전세계 방송가에서 주목받기에 이르렀다. 2011~2013년 국내 방송 포맷 수출의 연평균 성장률은 약 105%였다. 2020년 12월 콘텐츠진흥원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국내 주요 9개 방송사를 대상으로 한국 포맷 수출 성과를 조사한 결과, 최근 10년간 국내 방송 포맷 102건이 전 세계 65개국 204건의 수출을 달성한 것으로 집계됐다.
영국 등 유럽에서는 아직 온에어도 안된 프로그램으로 기획서만 보고도 사갈 정도로 우리나라 방송과 K-포맷에 대한 신뢰가 커졌다. 올해 국제포맷어워즈(IFA, International Format Awards)에서는 MBC에서 방영 중인 〈복면가왕〉의 박원우 작가가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국제포맷어워즈는 영국 매체 C21미디어와 밉포맷 등이 주최하는 권위 있는 국제적 시상식이다. 박원우 작가의 이번 수상은 한국을 넘어 아시아 최초의 대상 수상이기도 하다. 현재 〈복면가왕〉의 구성·진행 방식 등 포맷은 미국, 독일, 프랑스 등 약 50여 개국에 수출됐다. 박원우 작가는 아예 방송포맷과 기획 작업을 주로 하는 ‘디턴’이라는 회사를 만들어 작가진들과 크리에이티브 팀을 만들어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기존에 작가가 방송국 안에서 기획 작업을 하던 관행을 엎고, 기획과 포맷의 구상을 작가 크리에이티브 팀과 미리 해서 방송국이나 해외시장에 파는 형태를 취하고 있는 것. 방송환경의 변화와 방송에서 포맷의 힘이 얼마나 커졌는지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법적 다툼까지 불사하는 포맷
음악 예능 프로그램은 최근 몇 년 사이 포맷 시장에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복면 가왕, 히든 싱어, 미스터트롯 등. 이런 프로그램들의 원래 정체성은 ‘음악’에 있지만 음악이라는 소재가 예능화되는 과정에 포맷의 힘이 발휘된 프로그램들이다. TV조선의 〈미스터트롯〉의 경우 유명 예능인들이 심사위원으로 나오고, MC도 최고의 주가를 달리고 있는 김성주 아나운서가 맡았지만 핵심 출연자인 트로트 가수들은 대부분 무명이었다는 점, 어르신들만 흥얼거리던 트로트라는 아이템을 갖고 젊은 세대에까지 인기몰이를 했다는 점에서 포맷의 중요성을 읽게 된 프로그램이다. 문제는 이 프로그램의 인기가 천정부지로 솟자 이후 타 방송사에서 비슷한 아류 프로들이 쏟아지게 됐다는 점이다. 그리고 여기서 이전에 없는 사례가 발생하면서 방송가의 이목이 집중됐다. TV조선이 MBN을 상대로 저작권 침해 소송을 낸 것. 프로그램 ‘포맷’을 베꼈다는 게 그 이유였다. 이전까지 방송가에서는 오디션 프로그램, 데이팅 프로그램, 관찰 예능 등 한 프로그램이 히트하면 비슷한 프로그램들이 우후죽순처럼 등장했고 애초에 그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만든 제작진은 속상해했지만 관행상 별 소리 없이 그냥 넘어갔었다. 따라서 이번 소송은 여러 의미를 담고 있다.
포맷을 놓고 소송에 들어간 TV CHOSUN ‘미스터트롯’과 MBN ‘보이스트롯’ @TV CHOSUN, MBN |
법률 관계자들의 말에 의하면 포맷에 있어서 저작권 침해 여부의 핵심이 그 포맷이 ‘아이디어’ 수준이었느냐 ‘표현’의 영역이냐에 따라 판가름 된다. 전자는 침해 여부를 말할 수 없지만 후자는 명백히 저작권 침해이다. 지난 2017년에는 SBS가 CJ E&M에 대해 리얼리티 프로그램 '짝'을 무단 도용했다며 제기한 손해배상소송에서 대법원은 '짝'의 저작물성을 인정한 판례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기도 했다. 구체적인 대본이 없이 대략적인 구성안을 기초로 출연자들에 의해 표현되는 상황을 담아 제작하는 리얼리티 방송 프로그램의 경우도 창작성이 있다면 저작물로서 보호받을 수 있다는 판결이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포맷은 아이디어 영역으로만 보고 법적으로 저작권을 보호하지 않아 학계에서 꾸준한 논란이 제기되어 왔다. 이 판결은 리얼리티 프로그램 역시 저작권법의 보호 대상이라는 최초의 판결이자, 포맷의 창작성을 인정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큰 판결이었다.
사실 과거에는 해외 프로그램을 참고해서 소위 ‘베끼기’를 하는 게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우리는 주로 베끼는 쪽이기도 했다. 오래된 이야기라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심정으로 고백하자면, 예능 프로그램에 첫발 디뎠을 때 담당 프로듀서가 일본 예능 프로그램 영상물들을 산처럼 쌓아서 주고 다 보고 따라할 만한 재밌는 프로그램이 있는지 찾으라고 요청한 적도 있었다. 그 당시 아직 새내기 작가였던 터라 이 상황은 내게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사실 시청자들은 표절이니 베꼈다느니 비난의 목소리가 높았지만 제작진들에게는 베껴서라도 재밌고 시청률 높은 프로그램을 만드는 게 더 시급하고 중요한 문제일 때가 많았다. 지금 맡은 프로그램의 반응에 따라 이후 자신의 방송 생명과 밥줄을 이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즘은 반대로 해외 방송사에서 우리나라 프로그램을 베끼는 사례가 종종 발생하고 있다. 특히 중국과 포맷 다툼은 큰 문제가 되고 있다. 현재 전세계적으로 포맷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들이 나오고 있고 협회도 만들어졌다. 포맷의 저작권, 포맷의 중요성은 이미 확고해졌다.
공연의 포맷화,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그렇다면 이런 흐름을 공연계, 춤계에서는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접근할 수 있을까. 최근 방송 외에 공연 창작 작업을 해보니 음악 공연은 방송처럼 포맷의 시각에서 접근이 가능하고 해외 판매도 가능한 지점이 있다. 최근 클래식 음악공연에서 각본과 연출작업을 몇 차례 했는데 방송가 출신이라 스스로의 피는 못 속이는지 공연마다 ‘포맷’을 염두에 두고 작업을 했었다. 보통 음악 공연은 클래식이든 대중가요든 연주나 노래를 들려주고, 필요한 경우 음악 사이사이 연주자가 관객에게 이야기를 건네고, 게스트가 중간에 함께 하는 콘서트 형식을 취한다. 이런 콘서트는 레퍼토리를 어떤 순서로 선보일 것인가에 집중돼 있고, 연출도 그 음악을 가장 돋보이게 만드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그런데 형식에서 과감하게 벗어나 매공연 때마다 다양한 포맷을 시도해봤다. 공연에 대한 새로운 포맷과 구성을 만들고 제안했기는 했지만 그걸 기획사 측에서 받아들이지 못할 수도 있는데 인연이 닿은 기획사들과 아티스트들이 다행히 콘텐츠 시장의 흐름에 대해 열린 시각, 도전에 대해 용기를 갖고 있었다. 덕분에 새로운 포맷이 무대에 구현될 수 있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작업한 공연에 대한 실례를 들자면, 지난 5월 롯데콘서트홀에 올린 〈De l'Amour〉(연애론)의 경우도 포맷을 염두에 두고 만든 공연이었다. 애초에 이 공연은 바리톤 이응광의 앨범 발매 기념 공연으로서 내게 작업이 들어왔었다. 보통 앨범 발매 기념 공연은 앨범에 수록된 음악을 들려주는 콘서트 형식을 취하지만, 이런 형식에서 아예 벗어나 반주자, 게스트, 주인공인 바리톤 성악가, 3명의 퍼포머를 중심으로 미니 오페라 포맷의 공연을 만들었다. 특히 앨범에 수록된 말러와 바그너의 가곡들이 모두 사랑의 아픔을 담고 있는 애절한 곡이란 점에 착안, 스탕달의 저서 〈연애론〉으로 연애의 과정을 서사의 뼈대로 잡고, 문학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사랑의 문장들을 대사처럼 활용해서 하나의 극으로 이끌어냈다. 미니 오페라 형식 자체를 포맷화하려는 시도였는데 재밌다는 관객들의 후기가 많이 올라오면서 이 시도에 대한 확신이 들기도 했다.
이번 9월에도 롯데콘서트홀에 올라가는 클래식 공연을 하나 준비하고 있는데 역시 포맷을 염두에 두고 작업하고 있다. 비발디의 사계를 2050년 서울의 기후변화에 맞춰 편곡한 '사계2050' 곡을 연주하는 공연인데 기획사는 연주에 앞서 곡에 대한 해설을 진행할 계획이었다. 연주회 때 사회자와 주요 연주자의 토크, 혹은 렉처나 작품 안내 형식의 콘서트 가이드는 종종 있어왔다. 나는 이런 방식의 토크가 아니라 콘서트 가이드 자체가 공연이 되는 다른 포맷을 구상했다. 내레이터와 오케스트라 단원 전원이 출연해서 1725년 비발디가 〈사계〉를 작곡했던 시절의 계절과 2050년 서울의 계절을 비교하는 과정을 연극적 내레이션과 영상, 연주가 어우러지도록 한 새로운 형식의 콘서트 가이드로 준비하고 있다. 이 기후변화 프로젝트를 통해 서울뿐 아니라 총 14개 나라의 2050년 사계 버전이 작곡되었는데 이번 공연의 포맷을 다른 국가의 공연에도 적용할 수 있을 거고, 포맷 수출이 공연에서도 가능할 거란 생각으로 만들고 있다.
(좌)미니 오페라(뮤직테아터) 포맷으로 만든 〈De l'Amour 연애론〉 @봄아트프로젝트 |
막강해지는 포맷의 힘, 춤공연의 방향은?
그런데 ‘포맷’을 음악공연이나 뮤지컬 공연에는 적용 가능한데 춤 공연에는 적용이 쉽지 않다. 어떤 사물이나 사건, 상황에 대해 창작자가 바라본 시각을 춤이라는 언어로 표현하는 게 춤공연이다. 애초에 춤공연에서는 형식과 포맷 자체에도 창작자의 혼과 결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이 포맷을 해외 안무가나 창작자에게 판매해서 그들 나름대로 공연하게 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현재로서 춤공연에서 ‘포맷’의 활용은 작품 자체에 대한 것보다는 그 공연의 전후에 펼쳐지는 여러 가지 홍보와 마케팅의 방법, 관객과의 대화, 메타버스 내의 밋업(meet-up) 기획 등에 대한 접근에 적용될 수 있다.
또 한 가지, 춤공연에서 창작이라는 범주가 안무가에게 몰려있는 경향이 있는데 저작권 문제, 협업 개념, 콜라보 등 변화하는 다양한 흐름을 볼 때 이 부분에 대한 정리는 필요해 보인다. 춤공연에서 포맷이나 기획이 안무가에게서 나오지 않은 경우, 어디까지를 창작의 영역으로 보고, 어디까지를 안무가를 서포트한 것으로 보느냐 하는 문제가 있다. 지금 춤계에서 안무가의 영역이나 역할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이 실질적으로 전부 안무가 혼자의 힘으로 나올 수 없는 것들도 많다. 만일 작품의 주제, 내용, 전개, 음악, 모든 것을 다른 사람이 만들고, 이걸 가지고 안무가가 무브먼트만 만들 경우, 어디부터 어디를 안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최근에는 장르가 파괴되고 다양한 형태의 춤공연이 나오면서 안무의 개념 자체라 달라지고 있다. 앞서 방송 프로그램에서 완성된 대본이 아니라 구성과 형식을 담은 ‘포맷’만으로도 대법원이 창작성을 인정한 판례가 있기 때문에 앞으로 이 부분은 공연에도 적용될 가능성은 커졌다. 저작권 문제는 앞으로 더 첨예해지고 더 범위가 커질 것이 뻔하기 때문에 춤공연에서도 관행으로 넘겼던 부분이 수면 위로 올라올 가능성도 높아졌다. 춤공연에서도 기획이나 주제 선정 등 작품을 만들기 위해 뼈대가 안무자의 손에서 나오지 않았을 경우 이 문제는 미묘해진다. 관련 법은 점점 세분화되고 강화되겠지만 굳이 법제화의 필터를 갖다 대지 않더라도, 다른 사람이 작업한 것을 내 것으로 생각하거나, 카피하는 것은 이미 창작자로서의 위엄을 잃은 것이다. 창작은 나 자신을 무대 위에 드러내놓는 작업이고, 그게 예술이니 말이다.
이단비
방송작가, 춤칼럼니스트. KBS 교양 프로그램에서 방송작가를 시작, SBS 보도제작국, YTN 보도제작국, MBC 시사교양국 〈문화사색〉 작가 등 다양한 매체에서 방송작가로 일해오고 있다. 춤 경험과 방송작가 이력의 융합으로 공연예술 다큐멘터리 제작, 발레와 무용 칼럼 집필 작업을 해오고 있으며 최근에는 공연 구성과 기획, 대본 집필 등 공연 창작으로 영역을 확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