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 우리
얼마 전 방송촬영을 위해 방문한 어느 전자업체 쇼룸에서 스탠드에 올려놓고 흡사 콘솔처럼 인테리어할 수 있는 작은 냉장고를 발견했다. 냉장고는 그동안 모두의 공간인 주방이나 거실에 위치해 있는 게 불문율이었다. 그런데 이 냉장고는 그 틀을 깼다. 이 냉장고는 주방 한 편이 아니라 거실이나 침실, 혹은 내 방 안에 들여놓아도 제법 어울릴 모양새였다. 냉장고, 세탁기, TV 등 필수가전이자 가족 모두가 함께 사용하는 ‘공용의 물품’에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다.
천편일률적이었던 디자인이나 색상에는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고, ‘개인의 물품’으로 변화하고 있다. 앞서 말한 냉장고를 보자면 가족 모두가 사용하는 냉장고가 아니라 내 취향에 맞는 냉장고를 내 방 안에 들여놓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기능은 기본, 이제 전자제품을 고르는 기준에서도 심미적, 예술적 영역이 중요해지고 있다. 개인화, 취향 존중, 감성 가전은 지금 전자업계의 제품 개발과 마케팅의 포인트이다. 과학과 기술의 집약체인 전자기기도 감성과 취향을 이야기하는 시대. 바로 이 지점에서 예술이 다른 방향으로 기지개를 켤 수 있는 시점이 왔음을 감지하게 된다.
세로 디스플레이와 큐브 형태의 냉장고. 전자기기는 공용의 물품에서 개인의 취향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전환했다. ⓒ이단비 |
취향 존중 시대, 기술도 맞춤형
가전과 IT기술의 발달 방향은 매해 초에 진행되는 세계 최대 가전·IT전시회 CES를 보면 바로 파악할 수 있다. 올해 초에 진행된 CES 2021에서는 전자기기의 개발 방향이 과거와 완전히 달라졌다는 점을 알 수 있었는데 바로 ‘맞춤형’ 기술이 중요해졌다는 점이다. 주요 기업들의 마케팅 방향이나 브랜드명만 봐도 이 점은 바로 알 수 있다. 비스포크, 프라이빗 가전, 이런 단어들은 과거에 전자기기에서는 나오지 않은 단어들이다. 냉장고의 색이나 무늬는 내 취향에 맞는 판넬로 바꿀 수 있고 문을 어떤 식으로 배치할 지도 내가 고를 수 있다. TV는 거실에 놓여 모두가 함께 하는 ‘공용의 기기’가 아니라 어디든 이동할 수 있고, 심지어 캠핑장에 들고 갈 수 있는 제품도 나왔고, 가로가 아니라 모바일 환경에 맞게 세로로 시청도 가능하다. 미러링은 기본이다.
TV도 개인 취향과 감성 중심의 전자기기로 변모하고 있다 ⓒLG전자 |
실제로 삼성전자는 맞춤형 가전인 비스포크를 내놓으면서 올해 1분기에 전년 대비 148% 증가한 1조 1,200억 원의 영업이익을 거두기도 했다. LG전자도 프라이빗 가전이란 이름으로 새로운 TV들을 출시하며 주목받고 있다. 시대의 흐름을 제대로 탄 브랜드가 된 것이다. 이 모든 것의 흐름은 하나로 향한다. 바로 개인의 ‘취향’을 얼마나 중시하느냐가 기기의 개발 방향과 맞물렸다는 점이다. 취향과 개성을 존중하는 스마트 경험은 이제 전자업계의 중요한 키워드가 되었다. 바야흐로 취향 존중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맞춤형 기술과 맞춤형 서비스가 중시되는 시대 ⓒ삼성전자 |
아트워크로 이어지는 취향의 소비와 공유
지난 6월, 전국 만 19세~59세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시장조사전문기업 엠브레인 트렌드모니터가 우리나라의 나와 타인의 ‘취향’에 대한 인식 조사를 실시한 결과를 보면, ‘개인의 취향’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인식이 강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응답자 87.6%가 ‘개인의 취향은 존중되어야 한다’고 대답했고 73.4%가 ‘나와 취향이 다른 사람과 집단이 다양한 것은 사회 전체에 의미 있는 일이다’라고 답한 것이다. 또한 전체 응답자의 75.4%가 ‘내 취향에 다른 사람들이 공감을 해주면 기분이 좋다’고 응답한 것으로 나타나, 자신의 취향을 있는 그대로 존중받고 싶은 마음이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결과를 보였다. 요즘은 프랜차이즈 카페에서도 개인의 커피 취향을 중시하는 세일즈를 펼친다. 원두를 고를 수 있는 건 물론, 커피를 내리는 방식도 푸어 오버 방식인지 사이폰 방식인지 선택할 수 있다. 취향에 따른 세분화가 점점 강렬해지고 있는 것이다.
‘취향’에 대한 사회적 인식 @엠브레인 트렌드모니터 |
이렇게 취향이 중시되는 분위기가 형성된 건 지난 2016년부터이다. 취향을 발전시켜 전문성을 확보하고, 급기야 취향이 직업이 된 ‘테이스테셔널’도 이 즈음에 등장했다. ‘테이스테셔널’은 taste(취미)와 professional(전문적)의 합성어로 ‘덕업일치’라는 신조어와 맥락을 같이 한다. 나이나 성별, 직업보다는 취향이란 카테고리가 더 중요해진 것이다. 서울시 마포구 합정동에 2층 양옥집을 개조, 18세기 살롱 문화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취향관’의 등장은 이런 문화를 보여주는 대표 사례다. 이곳 회원들은 본인의 취향을 기반으로 타인과 공유하고 발전시켜 나간다. 예술에 대한 대화를 나누고 더 나아가 회원들끼리 직접 전시를 하거나 잡지를 만드는 등 아트워크까지 그 영역을 확장시킨다. 그야말로 테이스테셔널이 되고, 아티스트가 되는 것이다. 취향관 외에도 문래당, 문토 등 다양한 소셜살롱들이 취향과 예술, 사교와 아트워크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다. 취향의 공유는 새로운 방식의 예술 체험, 그리고 창작 작업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취향을 통한 예술적 확장
기술에서는 사용자 환경, 개인의 취향과 개성까지 고려한 맞춤형 기술과 서비스를 중시하고, 문화는 취향을 확장해서 예술적 과업을 탄생시키는 시대이다. 이런 시대 분위기는 예술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다. 취향을 파악하기 위해서 가장 선결되어야 하는 과정은 ‘체험’이다. 체험과 경험의 횟수가 많지 않다면 자신의 취향을 파악하기 어렵다. 여기서 어떻게 새로운 관객들을 끌어들이고 이들이 춤 공연을 경험하게 하느냐는 문제가 생긴다. 이제껏 우리 모두 고민했던 지점이다. 지금까지의 마케팅 방식이 애호가들을 자극시키는 방향이었다면 이제는 춤 공연에 전혀 관심없는 사람들에게도 신선한 제안을 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
전자업체와 손을 잡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 생각한다. 맞춤형 가전에 대해 고민을 하는 만큼 고객의 취향이나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고민을 전자업계에서도 큰 숙제이다. 최근 삼성전자의 경우 비스포크를 주요 브랜드로 내세우면서 라이프스타일 쇼룸을 새단장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다양한 아티스트와 손을 잡고 작업을 했다는 점이다. 노보 아티스트, 김충재, 김종완, 임성빈, 문승지 등 다양한 아티스트와 손잡고 이 공간을 꾸몄을 뿐 아니라 콘서트, 토크쇼, 다이닝 프로그램을 통해 감성 마케팅을 펼치고 있다. 여기에 무용수나 안무가도 당연히 합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협업은 서로에게 새로운 시너지를 가져올 것이다. LG전자의 경우도 지난 2019년, 프랑스 안무가 요안 부르주아와 손잡고 그의 작품 〈역사의 역학〉에서 영감을 받은 예술적 디자인을 제품에 적용했다. 이를 통해 ‘가전제품’이 아니라 ‘가전작품’이란 평가까지 들었다. 개인의 취향을 중시하고 예술과 손잡는 방법을 전자업계에서도 고민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 춤 공연이나 축제가 다른 방향으로 관객을 끌어 모을 수 있는 방안들은 얼마든지 기획될 수 있는 상황이다.
요안 부르주아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은 가전제품 @LG전자 |
'취향‘이란 단어는 이 시대에 ’열린 가능성‘을 대표하는 단어가 될 수 있다. 개인의 취향이 강조된다는 것은 예술처럼 정답이 없는 영역이 주목받고 각광받을 시대가 왔다는 뜻이다. 거기다가 기업은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에 나서야 하기 때문에 예술과 손잡는 방법을 지금보다 더 많이 고민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2030~2050년이 춤과 예술이 다른 방향으로 성장할 수 있는 절호의 시기라고 본다. 그때 사회는 지금까지 다른 시대적 요구에 부응해서 움직여야 할 시점을 맞이하기 때문이다. 2021년, 지금 공연계와 춤계는 그 시간에 대한 준비에 들어가야 한다.
이단비
방송작가, 춤칼럼니스트. KBS 교양 프로그램에서 방송작가를 시작, SBS 보도제작국, YTN 보도제작국, MBC 시사교양국 〈문화사색〉 작가를 거쳐 현재 한국경제TV 산업부 작가로 일하고 있다. 중학교 1학년 때 발레를 전공한 담임교사를 만나 발레 실기를 배우기 시작했고, 춤 경험과 방송작가 이력의 융합으로 공연예술 다큐멘터리 제작, 발레와 무용 칼럼 집필 작업을 해오고 있다. 최근에는 춤 공연 창작 작업까지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