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 우리
보도 성격이 강한 방송 프로그램을 맡고 있다 보니 PD뿐 아니라 각 분야 기자들과도 작업을 하는데 어느 기자가 뜻밖의 고민을 털어놓는다. ‘아바타를 어떤 모습으로 만들까’라는 고민이었다. 모 기업에서 기자간담회를 메타버스 안에서 열기로 했다는 것이다. 아바타로 참여하는 기자간담회라니 생소하지만 재미있는 발상이었다. 지난 8월, SKT가 국내 기업으로는 최초로 메타버스 안에서 기자간담회를 열면서 이런 움직임은 가속도가 붙었다. SKT는 메타버스 공간 이프랜드(ifland)를 만들어 발표하면서 이프랜드에서 기자간담회를 연 것이다. 메타버스 공간을 소개하는 자리를 메타버스를 통해 하는 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아마 지금쯤 대한민국 기자들에서 아바타 하나 키우지 않는 기자는 전무하다시피 할 것이다. 로블록스, 포트나이트, 제페토, 이프랜드 등 메타버스 플랫폼들이 계속 더해지면서 다양한 비즈니스, 콘텐츠들을 담아내고 있고, 이제 시대가 본격적으로 메타버스의 물결을 타게 됐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SKT가 이프랜드(ifland) 발표 기자간담회를 메타버스 내에서 열었다 ⓒSKT |
아바타가 없다=메일주소가 없다?
아바타를 어떻게 만들까 하는 고민은 꽤 설득력 있는 고민이다. 최근 메타버스가 우리 생활에 재빠르게 스며들면서 몇 가지 현상이 눈에 띄게 나타나고 있는데 이 부분을 살펴보면 이 고민이 이해될 것이다. 이런 우스갯말이 있다. 아무리 메타버스 안에서 만나도 아바타만 보며 상대방의 연령대를 바로 가늠할 수 있다고. 기성세대는 아바타를 자신의 모습과 닮은, 현실적인 모습으로 만들어내는 반면에 Z세대는 상상력이 동원된 기발한 아바타로 메타버스 세상을 돌아다니기 때문이다.
Z세대는 1990년대 중반에서 2000년대 초반에 태어나 디지털 환경에서 자란 게 특징이다. 보통 MZ세대로 묶기는 하지만 밀레니얼 세대와는 확연히 다른 점이 이 부분이다. Z세대는 이미 ‘디지털 네이티브’(디지털 원주민)라는 별칭이 붙은 만큼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경계가 모호한 세대이다. 메타버스에 접근하고 즐기는 방향 자체가 다른 것이다. 메타버스의 아바타가 나를 표현할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 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최근 삼성전자에서 3세대 폴더블폰 Z플립을 내놓으면서 비스포크 에디션을 따로 출시해 언팩 행사까지 가졌다. 비스포크, 맞춤형 가전이 전체 매출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면서 휴대폰에까지 이를 적용한 것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37개의 브랜드와 콜라보한 액세서리까지 내놓으면서 ‘폰꾸미기’ 열풍을 일으키고 있는데 이유는 분명하다. ‘나만의 폰’을 만들고 싶어하는 유저들의 마음에 적중한 것이다. 관계자와 방송 인터뷰를 진행했는데 휴대폰을 자기만의 것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MZ세대의 취향을 마케팅에 적극 활용했다고 답변했다.
메타버스 속 아바타도 마찬가지 개념이다. ‘소비의 시대’에는 나 혼자 보고 만족했지만 ‘공유의 시대’에는 자기만의 것, 나를 표출할 수 있는 수단은 필요하지만 동시에 그게 남에게 드러나고 선보여져야 한다. 이 이중구조 안에서 아바타는 최적의 캐릭터로 자리 잡고 있다. 그런데 Z세대에게 메타버스의 공간은 놀이의 공간이자 자신을 표출하는 하나의 수단이지만, 기성세대에게는 생존의 공간이 되고 있다. 이제 메타버스를 모르거나, 아바타 없이는 사회생활을 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만일 당신이 이미 20대는 추억의 한 페이지가 된 지 오래된 기자라면, 그리고 곧 있을 간담회가 메타버스 안에서 벌어진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바타를 만드는 건 놀이가 아니라 비즈니스가 되지 않겠는가. 그런데 지금의 속도로 봐서는 1년 이내에 메타버스 안에서 나의 아바타를 갖는 일은 마치 인터넷이 처음 확산되기 시작할 때 내 메일주소를 갖는 일과 똑같은 입지를 가지게 될 게 자명해 보인다. 그리고 Z세대에게 아바타는 자신을 표출하는 강력한 수단이지만, 기성세대에게는 다를 수 있다. ‘아바타를 어떤 모습으로 만들까’라는 고민은 나를 표출하는 수단이 될지, 나를 감추는 수단이 될지는 사람마다 달라질 것이다.
시대의 표식 된 ‘메타버스 탑승권’
네이버 자회사인 네이버제트가 제페토를 만들고 이게 주목을 받기 시작할 때만 해도 메타버스의 세상은 10대들의 놀이터라는 인상이 강했다. 2018년 서비스를 시작한 제페토는 지난 2월 기준으로 전 세계 이용자 2억 명을 넘겼다. 제페토의 글로벌 가입자 중 10대 이용자 비중은 전체에서 80%를 차지한다. 그런데 이제는 어떤가. 기업이나 국공립단체, 정부기관까지 메타버스 안에서 중요한 일들을 발표하고 처리하고 있다. 이제 내가 어떤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이든 메타버스를 모른 척하고 업무 처리 하기는 쉽지 않을 전망이다. 몇 가지 사례만 봐도 그렇다.
서울시는 10월 12일부터 19일까지 '비대면 사회와 앞당겨진 미래'를 주제로 '2021 서울 스마트시티 위크'를 온라인에서 개최하면서 마지막 나 포럼을 메타버스에서 열었다. 서울시장이 가상공간에서 인사를 하고, 최재붕 성균관대 산업공학과 교수, 이정훈 연세대 정보대학원 교수, 신우석 베인앤컴퍼니 파트너, 박종수 서울시 스마트도시정책관, 그리고 청중석의 시민들까지 모두 아바타로 만났다. 시대가 변하고 있고, 미래사회가 디지털로 대전환되고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좌담회 현장이었다. 대학들은 발 빠르게 메타버스에 탑승했다. 이대, 성균관대, 연대, 건대 등 메타버스 내에 수업을 개설하거나 이벤트를 벌이고 있다.
여기서 더 나아가 드라마도 메타버스 시대에 들어서고 있다. SKT는 이프랜드를 야심차게 출시한 만큼 이 공간을 배경으로 만든 참여형 웹드라마 〈만약의 땅〉을 만들어 공개한다고 밝혔다. 〈만약의 땅〉은 언제든 자신의 아바타를 쉽게 꾸미거나 바꿀 수 있는 특성을 살려 "만약 내 남자친구의 아바타가 매일 바뀐다면?"이라는 설정으로 제작한 로맨틱 코미디 드라마다. 드라마 연출 PD와 실제 웹드라마 연기자들은 메타버스 내에서 아바타를 통해 연기하는 방식으로 참여하고 조연과 단역은 이프랜드 일반 이용자들 가운데서 오디션을 거쳐 캐스팅했다고 한다.
메타버스 내에 공개되는 참여형 웹드라마 〈만약의 땅〉 |
이런 현상을 지켜보면서 얼마 전 포럼을 하나 준비하면서 몇 가지 항목을 만들어봤던 게 떠올랐다. 시대의 흐름에 얼마나 발맞추고 있는지 체크해 볼 수 있는 질문으로 준비한 것이다. 지금 당신은 어디에 속하는가.
① 집에 TV와 전화기가 있습니까?
② 집에 컴퓨터가 있습니까?
③ 휴대폰이 있습니까?
④ 스마트폰을 사용합니까?
⑤ SNS계정이 있습니까?
⑥ 줌을 사용합니까?
⑦ 메타버스 아바타가 있습니까?
재밌는 건 첫 번째 질문이다. 80년대에는 이 질문에 YES라고 답한 사람은 중산층에 속했지만 이제 1번 질문에 ‘네’라고 답할 사람은 현저히 줄었다. 시대가 변한 것이다. 전화기 대신 개인 휴대폰이, 가족 공용의 텔레비전 대신 각자의 태블릿이나 PC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시대의 코드가 된 상징이자 표식 하나가 사라지고 이제 ‘메타버스’라는 새로운 상징과 표식 하나가 새로 입성했다.
텔레비전부터 메타버스까지, 달라진 시대의 표식 |
춤과 예술, 메타버스는 새로운 도구이자 플랫폼
그렇다면 춤과 예술 현장에서는 메타버스가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까. 코로나를 겪으면서 비대면 문화가 확장되는 시점이다. 가상공간은 더더욱 환영받는 상황이 됐고, 문화예술행사의 장과 공연도 이제 메타버스로 확장되거나 이동되고 있다.
광주광역시와 광주문화재단은 최근 유네스코 미디어아트 창의도시 지정 7주년을 맞아 '2021 유네스코 미디어아트 창의도시 정책포럼'을 열면서 유튜브 생중계는 물론이고 메타버스 회의실을 열어서 진행했다. 올해 춘천SF영화제에서는 메타버스 안에서 수상작을 상영하는 시도를 했다. 2021 강원국제트리엔날레는 개최지 중 한 곳인 홍천 탄약정비공장을 메타버스 플랫폼 안에서 구현해 행사에 참여하는 작가 작품 일부를 감상할 수 있도록 했다.
수상작을 메타버스 안에서 상영한 2021 춘천SF영화제 ⓒ춘천SF영화제 |
국공립단체, 지자체 외에 메타버스 내에서 예술 관련 기획자들의 움직임도 활발하다. 최근 ‘스트릿 우먼 파이터(스우파)’라는 여성 스트릿댄서들을 상대로 만든 서바이벌 방송 프로그램이 인기를 누리로 있다. 스트릿댄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데 메타버스 내에 스트릿댄서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노는 공간이 마련됐다.
다양한 테마와 주제로 채워지고 있는 메타버스 공간 |
여러 현대무용 단체에서 기획을 맡고 있는 김민영 프로듀서는 이프랜드(Ifland)에서 크리에이터 핀(piiin)님과 손잡고 지난 9월 16일 현대무용 공연을 메타버스 안에서 선보이기도 했다. 실제 공간이 아니라 메타버스 공간 안에서 아바타들이 미리 짜놓은 안무에 맞춰 군무 공연을 선보였다는 점, 그리고 관객들도 아바타로 그 공간에 참여해 공연을 관람했다는 점에서 좋은 스타트였다. 처음 시도라 기술적인 부분에서 미흡함은 있었지만 아바타 관객으로 참여해본 결과 색다른 공연의 경험이 됐고, 특히 Z세대 관객들에게는 ‘재미있다’는 인상만 있으면 지속적으로 메타버스 내의 춤 공연에 참여가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해 9월, BTS가 포트나이트에서 다이너마이트 뮤직비디오를 처음 선보이면서 유저들이 해당 공간 안에 들어가 함께 뮤직비디오를 보고 춤을 출 수 있게 기획됐던 게 지난해 화제가 됐었다. 가요나 팝 문화가 Z세대에 주로 소비되고 있는 만큼 Z세대에게는 반향이 컸는데 이런 게 무용공연에 적용된다는 것은 미래관객에 대한 새로운 대응이라고 본다.
메타버스 안에서 아바타로 펼쳐진 현대무용 공연 |
이제 메타버스 안에서 개설되는 방의 주제나 테마는 더 넓어지고 있고 그만큼 흡수되는 연령대도 넓어지고 있다. 문화예술뿐 아니라 패션, 뷰티, 식품, 엔터 등 비즈니스 영역은 확대되고 간담회, 포럼, 강연, 비대면 치료까지 가능해질 상황이다. 업종 간 콜라보는 앞으로 더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지금 시점에서 제안하고 싶은 건, 우선 아바타를 만들라는 것, 그리고 메타버스 안에서 어느 방이든 들어가서 한 번 체험해 보라는 것이다. 여기서 나아가 강연이든 포럼이든 메타버스 안에서 콘텐츠를 풀어놓을 수 있는 기획력이 중요해졌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춤 공연도 이제 아티스트와 무대만 있으면 되는 게 아니라 메타버스 안에서 새로운 형식으로 기획하는 태도와 관점이 필요하겠다.
예술이 기술과 손잡는 게 어쩔 수 없는 현상이라고 쳐도 기술 없이 예술이 존재할 수 없다면 문제가 되는 건 분명하다. 이런 흐름에 불편한 기색을 드러낼 수도 있다. 이렇게 생각해보자. 과거에 펜이나 아크릴물감, 캔버스가 없던 시절에는 붓으로 화선지에 그림을 그렸다. 부채와 장구 같은 오브제만 있던 시절에는 그것을 들고 춤을 췄다. 영상이 없고 무대 세트가 없던 시절에는 자연 풍광 자체가 무대세트였다. 메타버스라는 플랫폼을 도구적 측면에서 바라보면 조금 편해지지 않을까. 다만, 도구는 표현의 한계를 확장시키지만 표현하고자 하는 정수와 방향을 잃어버리지 않는 노력은 필요하겠다. 그게 플랫폼과 도구에 잠식당하지 않고 어떤 곳에 나를 갖다 놓고 예술을 갖다 놓아도 나 자체로, 예술 자체로 서 있을 수 있는 중심 푯대는 기억해야겠다.
이단비
방송작가, 춤칼럼니스트. KBS 교양 프로그램에서 방송작가를 시작, SBS 보도제작국, YTN 보도제작국, MBC 시사교양국 〈문화사색〉 작가를 거쳐 현재 한국경제TV 산업부 작가로 일하고 있다. 중학교 1학년 때 발레를 전공한 담임교사를 만나 발레 실기를 배우기 시작했고, 춤 경험과 방송작가 이력의 융합으로 공연예술 다큐멘터리 제작, 발레와 무용 칼럼 집필 작업을 해오고 있다. 최근에는 춤 공연 창작 작업까지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