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 우리
방송작가가 뽑은 2021년 방송가 10대 뉴스 중 하나로 ‘센 언니들의 예능 접수’가 선정됐다. 대표 프로그램으로 꼽힌 것 중 하나가 〈스트릿 우먼 파이터〉, 일명 ‘스우파’였다. 뜨거운 화제가 됐던만큼 프로그램 방영 이후 인기 출연자들은 여기저기 러브콜을 받으며 각종 CF에 등장하고 있고, 팬덤도 형성됐다. 현재 스우파의 인기에 힘입어 10대들로 구성된 스걸파까지 온에어를 시작하며 해당 방송 채널은 흐름을 제대로 타고 있다. 제작진이나 해당 방송 채널은 과거 〈댄싱9〉을 만들었던 곳. 춤을 활용한 예능 프로그램의 계보는 이렇게 이어졌다. 〈댄싱9〉이 그랬던 것처럼 스우파도 방송가에 공연현장에 다양한 이야기들을 남겼다. 스우파의 인기와 성공을 통해 우리는 어떤 점을 인지하고 무엇을 배워야 할까.
‘스우파’ 출연 크루들 @Mnet |
언니들이 진짜 언니가 될 때
스우파의 인기에 대해 말하기 위해 이 부분을 짚어보려 한다. 7개의 에미상, 8개의 골든글로브를 수상한 미국의 인기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가 2004년 종영 이후 17년 만에 새 시리즈로 돌아왔다. 환호하는 팬들도 있었지만 달갑지 않아 하는 반응도 있었다. 출연진들 간의 불화로 배우 킴 캐트럴이 빠진 것도 그 이유였지만 이미 50대 중반을 훌쩍 넘긴 언니들의 귀환에 불편하다는 의견도 있었다. ‘늙은’ 여주인공들을 보는 건 달갑지 않다는 것이다. 주요 주인공인 배우 사라 제시커 파커는 30대가 아닌 50대 여성들의 사랑과 우정과 삶은 여전히 중요하다는 말로 이런 비난을 일축했다. 이 일화는 영상 콘텐츠의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왜일까.
앤드 저스크 라이크 댓(And Just Like That)이란 제목으로 리부트된 〈섹스 앤 더 시티〉@HBO max |
방송가에서는 오랫동안 불문율처럼 전해 내려오는 것이 있다. 시청률에 호재로 작용하는 아이템과 악재로 작용하는 아이템은 정해져 있다는 것. 요즘으로 치면 조회수, 구독자수, 좋아요 숫자로 대체해서 말할 수 있겠다. 호재는 젊고 예쁜 여성, 아기와 어린이다. 악재는 안타깝게도 노인과 장애인이다. 젊고 예쁜 여성은 오랫동안 시청률과 조회수 제조의 일등공신이었다. 〈섹스 앤 더 시티〉의 새 시리즈가 나오는 건 반갑지만 ‘진짜 언니’가 된 그녀들을 보는 건 어쩐지 꺼려지는 것. 이런 시청자와 구독자들의 수요와 시각 때문에 영상 콘텐츠를 제작하는 사람들은 ‘안전하게’ 젊고 매력적인 여성들을 전면에 내세우게 된다.
또 하나, 최근 방송가는 예능이 독점하다시피 움직이고 있다. 과거에는 중요한 주제와 화두를 다루고, 관련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데 방송사들도 기꺼이 시간을, 돈을 들였다. 그게 방송사의 위상과 권위를 살리는 일이었고, 기업들도 이런 프로그램에 협찬에 적극적이었다. 비록 시청률에 도움이 되지 않을지는 몰라도 노인과 장애인의 이야기를 다루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고, 중요한 작업이었다. 예능 프로그램이 웃음과 휴식을 줬다면, 이런 프로그램은 깊은 감동과 의미를 전달했다. 고령화 사회이자 곧 고령사회가 될 시점에서 만일 노인을 주인공으로 한 아이템이 인기를 끄려면 방법은 딱 하나이다. 쉽게 입주할 수 없고, 다양한 부대시설이 함께 있는 화려한 실버타운의 모습을 담은 프로그램이 나온다면 그건 좀 승산이 있을 것이다. 이게 우리가 생각하는 대중성이나 프로그램 인기도의 실체이다.
이제 스우파 이야기로 돌아와서 보자. 스우파의 언니들은 춤 잘 추고, 스타일링 화려하고, 소위 말하는 ‘매력 쩌는’ 2030 여성들이다. 그 자체로 시청률과 조회수에서는 염려를 내려놓을 수 있는 출연진들이다. 이쯤 해서 냉정한 질문을 하나 던지려 한다. 과연 시청자들이 빠진 것은 ‘춤’인가, ‘스우파 언니들’인가. 헛살린다면 더 명확하게 질문을 좁혀 보겠다. 스우파 출연진들이 췄던 그 춤들을 그들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춰도 지금처럼 빠져서 보겠는가.
스우파는 ‘춤’ 프로그램인가
스우파처럼 경연 프로그램에는 다른 프로그램에 없는 몇 가지 강점이 있다. 출연진들의 개성과 성격, 매력도에 따라 매회 다른 에피소드들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점, 그로 인해 시청자들이 누군가에게 빠져들게 되고 응원하게 되고, 그 사람 때문에 프로그램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 한다는 점이다. 방송 이후 스타 탄생이 가능하고 그들의 활동영역은 확장되며, 방송사 입장에서는 새로운 후속 프로그램으로 이어질 수 있는 강점이 있다. 거기다가 경연이라는 형식 때문에 긴장감과 쫀쫀함을 놓치지 않는다. 예능 프로그램이지만 출연진들의 이야기 속에 눈물, 웃음, 감동, 다양한 감정들을 넣을 수 있고 보는 이에게 공감과 감동까지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돈만 쓴 가벼운 프로그램’이라는 오명을 가볍게 벗어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스우파는 성공을 점칠 만한 많은 요소들이 있었다. 춤은 그 자체로 이미 역동성과 흥겨움이 가득한 매개체인데다 그걸 추는 사람들이 2030 여성들. 출연 인물들의 개성이 뚜렷하고 그들 간의 호흡이 좋거나 재밌는 상황들만 잘 만들어진다면 이건 꽤 승산 있는 프로그램이다. 인기가 있으면 프로그램 중간에 수많은 PPL이 쏟아져 들어오고 출연진뿐 아니라 제작진에게도 중요한 커리어가 된다. 기업들도 이런 프로그램에 협찬하는 것을 선호한다. 현재 스우파에 출연했던 노제는 광고출연료가 200만 원에서 1억 5천만 원으로 70배 뛰었다. 기업에서 만일 스우파 시작 전에 노제와 CF 출연 계약서를 미리 썼다면 이야기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이걸 예시로 들어보겠다.
스우파 등장 1년 전, 대한민국을 강타한 프로그램이 하나 있었다. 〈내일은 미스터트롯〉이다. 당시 쌍용차는 이 프로그램과 협력 마케팅을 진행했고 우승자에게는 상금 1억 원과 G4 렉스턴을 부상으로 제공하기로 약속했다. 기대 이상으로 프로그램은 대박이 났고 국민 영웅이 된 임영웅은 쌍용차 렉스턴의 모델로 서게 됐다. 결과는 어땠을까. G4 렉스턴은 ‘임영웅 차’로 불리며 광고가 나간 직후 판매대수는 53% 증가하고, 쌍용차 공식 유튜브 채널에 올린 광고도 360만 뷰를 기록했다. 뒤이어 올 뉴 렉스턴까지 임영웅이 모델로 서면서 지난 11월에는 판매대수가 1만 1천 대를 넘어서기도 했다. 쌍용차가 여전히 적자의 고전을 벗어나고 있진 못하지만 협찬한 금액 이상으로 ‘임영웅 효과’를 톡톡히 본 것은 사실이다. 이미 임영웅의 인기는 천정부지로 올랐지만 처음 인연을 잘 맺은 덕에 임영웅은 올 뉴 렉스턴도 기꺼이 임영웅이 모델로 함께 해줬다는 후일담이 나왔다. 물론 현재 본인의 광고 몸값과 상관없이 낮은 금액으로. 이런 효과 때문에 기업들은 스타 탄생이 예감되는 경연 프로그램에 협찬하는 데 적극적이다. 과거에는 기업의 이미지를 높이는데 좋은 효과가 있기 때문에 대작 다큐멘터리에 협찬을 많이 했지만 이제는 사람들이 무겁고 진지한 프로그램보다 예능 프로그램을 많이 보기 때문에 자본의 흐름은 이런 예능 프로그램 쪽으로 움직이게 됐다.
프로그램 협찬을 통해 임영웅을 모델로 기용, 판매율 높인 렉스턴 @쌍용자동차 |
같은 맥락으로 질문을 하나 던진다면, 〈내일은 미스터트롯〉은 트로트를 다뤘기 때문에 성공한 것일까. 같은 ‘트로트’라는 아이템이라도 미스트롯과 미스터트롯의 인기의 차이는 ‘등장인물들의 케미스트리’에 있다. 젊은 여성의 등장이란 점에서 미스트롯은 미스터트롯보다 성공 가능성은 더 높았고, 그래서 미스터트롯보다 먼저 진행됐지만, 출연진들의 매력도가 높고, 그들의 화합이나 에피소드가 재밌었던 미스터트롯이 압도적으로 인기를 얻었다. 스우파의 인기도 그렇다. ‘춤’이라는 아이템 못지않게 스우파에 등장한 인물들의 매력 때문에 소위 대박이 났다.
결론적으로 스우파를 ‘춤의 승리’로만으로 여길 수는 없다. ‘춤’은 중요한 매개체였지만 이 인물들이 아니었다면 이만큼의 성공을 가져오기는 힘들었다. 스우파의 탄생은 춤에 대한 관심이라기보다는 시청률과 조회수가 나올 수 있는 기획력의 승리이다. 그래서 방송가에서 ‘춤’ 아이템에 대해 관심이 있냐고 물어본다면, 이렇게 대답할 수 있겠다. 엔터테인먼트의 관점에서는 관심이 있다. 하지만 다큐멘터리나 교양 프로그램 차원에서는 아니다.
스우파 인물들이 얻은 건 새로운 ‘통로’
예능 독식 시대에 건강하고 의미 있는 방송은 이제 사라지고 예능만 남는 것은 아닐까 고민과 걱정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우파가 방송가에, 공연계에 남긴 긍정적 실적이 있다. 우선, 이번 방송에 등장한 8팀의 크루 대부분이 방송을 위해 만들어진 팀이란 점이다. 즉, 제작진이 섭외를 하면서 팀을 결성하도록 이끌었다. 리더를 중심으로 한 크루는 메가 댄스 퍼포먼스를 선보이면서 방송으로서도, 스트리트 댄스 공연으로서 훌륭한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또 하나는 이 프로그램의 인기 덕분에 네이버와 카카오가 제공하는 인물정보 서비스에 ‘댄서’ 직업명이 신설됐고, 직업목록과 등재 기준이 개정됐다. 이것이 방송사가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역할이자 능력이란 점을 강조하고 싶다. 그리고 앞으로 어떤 식으로든 춤이 방송을 통해 노출될 때 방송제작진의 기획력과 역량을 통해 변화를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마이너 문화에 속했던 스트리트 댄스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 것처럼.
KISO 인물정보 직업목록 @한국인터넷자율정책기구 |
특히 대중성을 잡은 건 높은 평가를 받을 부분이다. 아마 춤계에서, 춤 공연을 만들거나 안무가들은 이 부분에서 마음이 많이 흔들렸을 것이다. 춤으로 이렇게 대중들을 사로잡을 수 있다니! 실제로 담당작가는 인터뷰를 통해 마니아층에 국한하지 않고 전국민이 접근할 수 있는 지점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 부분은 예능작가의 역량이기도 하다. 방송의 예능 프로그램이란 결국 ‘누구나 좋아할 만한 요소들을 잘 차려내는’ 데 있다. 이런 점을 컨템퍼러리댄스 작품에서는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
새로운 관객을 창출하는 것은 춤계, 공연계의 오랜 숙제였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티켓을 팔기 위해 내 영혼을 팔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내용이나 철학은 만드는 자의 경험과 세월에 따라 숙성되어 가는 정신세계가 담겨 있다. 그것을 억지로 대중들의 입맛에 맞게 바꿀 필요는 없다. 우리가 관객 동원을 위해 할 수 있는 건 만든 작품을 더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관심 갖게 만드는 ‘접근방식’에 변화를 주는 데 있다. 스우파 언니들의 춤과 퍼포먼스는 그녀들이 이렇게 알려지기 이전에도 이미 대단했고 멋졌다. 다만 그걸 대중들에게 알릴 방법이나 통로가 없었을 뿐이다. 영상 콘텐츠에서 어떤 형식과 구성, 연출을 하면 대중들에게 어필될 수 있을지 잘 알고 있는, 이 부분에 전문성을 갖고 있는 방송 제작진을 만난 게 행운이었다. 즉, 스우파의 성공은 마이너 문화라도 포맷과 접근 방식, 구성이 달라지면 대중들에게 소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보여준 사례다. 같은 맥락으로 앰비규어스댄스컴퍼니가 이전보다 인정받고 주목받는 건 그들의 실력이 갑자기 월등해져서가 아니다. 그 컴퍼니의 실력은 이전에도 훌륭했고, 작품은 늘 재밌었다. 그런데도 그 팀이 이전에는 대중들에게 각인되지 못하다가 지금은 누구나 다 아는 팀이 된 건 알다시피 한국관광공사 홍보영상 때문이었다. 즉, 현대무용 애호가들이나 관계자들이 아닌, 이전에 접점이 없었던 대중들에게 그 팀의 역량을 노출시킨 데 있었다.
해답은 접근방식과 접점의 변화에 있다
정리해 보면 이렇다. 대중들에게 어필될 수 있는 내용이 중요하다기보다 ‘대중들에게 접근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지금 공연이 올라갈 때 SNS에 오픈하는 건 기본이 됐다. 사전 예고 영상을 만들어서 뿌리기도 한다. 확실히 과거보다 파급력은 좋아졌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놓치고 있는 점이 있다. SNS는 누구에게나 닿을 수 있는 채널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SNS는 누구나 보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 분야에 관심 갖는 사람들에게 정확하게 포지셔닝 된, 의외로 ‘특정 다수’에게만 접근되는 매체란 점이다. 스우파를 통해서 배운 점, 새로운 관객 창출을 위한 방법을 한 마디로 딱 잘라 정리하면 이렇다. “지금까지 접근했던 곳 말고 다른 곳을 공략하라, 전혀 컨템퍼러리댄스와 접점이 없던 그곳에 노크하라!”
폐 페트병으로 만든 가방 @플리츠마마 |
방송과 공연계를 오가다 보니 이 지점이 상당히 많이 보인다. 한 가지 예시를 들고 글을 줄이려 한다. 최근 투명페트병 분리수거가 확대됐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투명 페트병을 통해 실을 만들어낼 수 있는 기술이 나왔기 때문이다. 투명 페트병에서 뽑은 원사로 친환경 폴리에스터 섬유 ‘리젠’(regen)이 만들어졌고, 이 섬유로 이미 옷, 가방 등이 만들어져서 판매되고 있다. 제주 삼다수 페트병을 활용한 제품은 유명하다. 현재 원사는 효성그룹에서 만들고 리젠 섬유로 플리츠마마에서 가방 등 완제품을 만들고 있다. 이런 친환경 제품들을 만드는 기업과 손잡고 춤 축제나 공연을 연계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제주 국제즉흥춤축제의 경우 자연친화적 성격이 맞닿는다. 최근 코로나 이후 자연을 주제로 한 작품들도 많이 나오고 있는데 이런 작품들도 관련 기업과 손잡고 협찬, 홍보 등을 추진할 수 있다. 이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효과는 단순한 협찬에 있지 않다. 그 기업이 갖고 있는 홍보력을 댄스컴퍼니의 홍보로 끌어올 수 있다. 이제까지 예술이나 춤 공연과 접점이 없던 그곳과 손을 잡으면 이제까지 접점이 없던 사람들을 새로운 관객으로 만날 수 있다. 내가 가지 않았던 그곳에서 해답을 건져 올릴 수 있다. 그것이 스우파를 통해 춤이 대중들에게 어떻게 소구될 수 있는지 확인한 부분이며 우리가 흔히 말하는 ‘대중성’을 얻을 수 있는 길이다.
이단비
방송작가, 춤칼럼니스트. KBS 교양 프로그램에서 방송작가를 시작, SBS 보도제작국, YTN 보도제작국, MBC 시사교양국 〈문화사색〉 작가를 거쳐 현재 한국경제TV 산업부 작가로 일하고 있다. 중학교 1학년 때 발레를 전공한 담임교사를 만나 발레 실기를 배우기 시작했고, 춤 경험과 방송작가 이력의 융합으로 공연예술 다큐멘터리 제작, 발레와 무용 칼럼 집필 작업을 해오고 있다. 최근에는 춤 공연 창작 작업까지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