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 우리
화가 에드가 드가 (Edgar Degas,1834-1917)는 서민의 삶에 대한 색다른 시선을 그림에 담아 명성을 떨쳤던 화가로 말년이 되면서 시력이 극도로 악화되는 위기를 맞았다. 그림은 미묘한 색상 차를 눈으로 확인하면서 완성하는 작업이므로 화가에게 시력악화란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드가는 절망하지 않고 그림대신 조각에 몰두하게 된다. 그는 이미 삼십대에 황번변성(黃斑變性)이라는 눈의 병변으로 시력이 악화되고 색채나 공간감에 대한 어려움 속에 장님이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시달렸다. 그래서 이 시기부터 그는 조각재료를 만지기 시작하며 틈틈이 쌓아온 조각경험이 훗날 조각가로서 제2의 예술인생을 여는 데 기반이 된 셈이다.
거의 장님이 되다시피 한 말년에는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되자 촉각으로 작업이 가능한 조각은 그에게는 새로운 희망이 되어 조각에 전념하게 되었다. 소재는 자신이 줄기차게 그렸던 무희들의 그림이었으며 드가는 이들 주제가 연출하는 역동적이면서도 정확한 동작을 표현하기 위해 만들고 허물기를 거듭하면서 조각에도 열의를 보이며 여러 작품을 만들어 냈다.
1917년 드가가 사망했을 때 공개된 그의 아틀리에에서는 150여점의 조각 작품들이 나왔다고 전해진다. 그저 조각은 자신이 사랑하는 그림을 대신하고자 한 일이라 여겨 작품을 만들었으면서도 전시회 등으로 공개적으로 작품을 선보이는 일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드가가 생전에 스스로 전시했던 조각 작품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열네 살의 어린 무용수’(1881)라는 밀랍조각이 유일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조각을 회화적 발상으로 풀어 조각의 원칙을 따르지 않고 획기적인 발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이 작품이 전시 되였을 때 적지 않은 물의를 일으켰는데 우선 그 작품을 만들게 된 경위를 알아보기로 한다.
드가 〈열네 살의 어린 무용수〉 (1881) 파리, 루브르 박물관 |
작품의 모델은 1878년에 열네 살이 된 마리(Marie Van Goethem)라는 소녀였다. 이 작품은 당시는 물론 지금까지도 화제작으로 손꼽히고 있는데 주목하여야할 점은 혁신적인 제작 방식으로 드가에 의해 최초로 시도된 디테일 때문에 이 조각을 관람하는 사람들을 어리등절하게 하였다.
그 이유는 이 조각 작품이 입고 있는 옷은 실제 망사와 천을 사용한 발레복이었고 머리 뒤에 매고 있는 리본도 정말 리본이었으며 머리카락은 장난감 인형공장의 말총 가발을 붙이기까지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조각 계에서는 이 소녀상이 보여주는 낯선 느낌에 반발했던 것이다. 어찌 보면 이 정도까지 자연주의 방식 그대로 제작된 조각이 이때 까지는 없었기 때문에 생긴 문제이며 예전 일을 지금의 시각으로 이해하려도 희한한 점도 있다.
인류학 박물관에 보관돼 있는 원시인 동상이나 왁스 박물관에 있는 유명인사의 인형들은 실제 옷을 입히고 머리카락을 동물의 것을 가져다 붙여서도 아무도 문제를 삼지 않았는데, 유독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들어가는 조각 작품에 대해서는 이전까지는 이렇게 실물 옷과 리본을 단 조각은 없었기에 낯선 것에 대해 마치 암묵적인 합의라도 한 것 같이 일제히 심한 반발을 일으켰던 것이다.
드가 〈열네 살의 어린 무용수〉 아버지가 만들어 준 무용복 입은 모습(좌), 어머니가 달아주었던 복숭아 색 긴 리본(우) |
드가가 실제 무용복과 리본을 착용한 〈열네 살의 어린 무용수〉를 조작하게 된 동기와 그 내막을 살펴보면, 마리는 벨기에 이민자의 딸로 집은 매우 가난했으며, 그녀의 아버지는 재봉사였는데 그래도 생계가 어려워 마리의 어머니마저 세탁소의 일을 해 딸이 그렇게도 원하던 발레학교에 겨우 입학하게 되었다. 그러자 아버지는 딸에게 멋진 발레복을 만들어주고 어머니는 마리에게 행운을 빌며 머리에 기다란 핑크색 리본을 매주었다.
마리가 발레수업을 열심히 받는 가운데 아버지가 병으로 사망하게 되자 수업료 내기 어려워져 부업으로 마리는 드가의 모델이 되었다. 그런데 눈에 이상이 있는 드가는 모델에게 한 동작을 주문하고는 너무나 오랫동안 한 포즈를 취하게 하여 이 때까지의 모든 모델들이 도망치곤 했는데 마리는 참고 견뎌내곤 했다.
그러자 드가는 마리에게 자기는 눈에 이상이 있어서 한 동작 즉 팔과 손을 등 뒤로 깍지 낀 체 천정을 보고 서 있게 하는 포즈를 취하고는 움직이지 말고 오랫동안 서있으라 해 이를 견뎌내는 모델이 없었는데, 너는 어떻게 그리 잘 서있는가 물었더니, 자기 가정 사정을 이야기를 하고는 실은 오늘로 모델을 고만하고 자기도 어머니 일을 돕게 되었다고 해서 마지막으로 드가 선생의 모델이며 발레학교도 그만두게 되었다고 하자, 드가는 진흙을 꺼내서 긴 손으로 미친 듯이 주물기 시작했으며 그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모델 서기를 끝내고 마리는 자기가 머리에 하고 있던 기다란 핑크색 리본을 드가에게 선사하고는 이제는 무용복도 소용이 없어졌다며 벗어 놓고 집으로 돌아갔던 것이다.
그 후 드가는 마리의 조각을 만들면서 이 작업이 드가에게는 지금까지 기존 예술에서 다뤄왔던 정해진 포즈와 표정들이 아닌 수만 가지 새로운 시도와 자세를 시험할 수 있었으며, 드가 자신의 그림에 그리곤 했던 다양한 무희의 동작을 회상하며 작업을 하다 마리에게 마지막으로 취하게 한 ‘팔을 등 뒤로 하고 손을 깍지 낀 체 천정을 보고 서있으라’했던 그 포즈가 가장 좋겠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조각이 완성되자 그 머리에는 기다란 핑크색 리본을 달아주고 마리가 벗어 놓고 간 무용복을 입혀 놓았던 것이다. 그래서 이때까지는 볼 수 없었던 밀랍조각에 실제 리본과 무용복을 입은 조각 작품의 전시회를 하게 되였던 것이다. 그리고 전시회를 끝낸 드가는 죽는 날까지 마리의 조각을 작업실에 가지고 있었다.
이 작품을 통해 우리는 우리들이 살아가는 평범한 삶 속에서 예술가들의 삶과 예술을 보게 된다. 즉 예술을 삶 속의 하나로 이해하게 되는 좋은 작품이었다는 것을 알도록 한다. 즉 어떤 이들은 드가가 묘사한 무희의 현실적인 모습에서 '예술의 몰락'을 보기도 했고, 어떤 이들은 그 속에서 '진정한 예술'을 발견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현실은 존재한다. 문제는 예술이 그것을 드러내느냐, 아니면 그것을 감추느냐일 뿐이다.
현실이 어떻든 '예술은 아름다워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은 드가의 작품에 분노했다. 반면에 예술이 현실에서 눈을 돌리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오히려 보지 못했던 현실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눈을 제공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은 환호했다.
결론적으로 드가는 회화뿐만 아니라 조각, 소묘 등에도 능했던 그는 인상주의 그룹에 속하면서도 나름대로 자신만의 독특한 화법을 정립했던 화가로서 인상주의가 빛과 색의 자유를 추구했다면, 드가는 공간과 구도의 자유를 추구했던 화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화가였던 드가가 조각에 손은 댄 것은 눈에 이상 때문이기도 했지만, 현대의 비디오 예술가들이 3차원 그래픽에 관심을 보이는 이유와 유사했다. 즉 인체의 구조와 동작에 매료된 드가에게 있어 캔버스라는 2차원 공간은 지극히 제한된 표현영역이었기 때문이다. 드가는 내용과 형식 모든 면에서 시대에 앞선 예술가였기에 이에 합당한 비난을 받았던 것으로 해석된다.
드가가 피부색과 유사한 톤의 밀랍으로 조각을 빚은 후 가발을 씌우고, 무용복을 입히고 천으로 된 리본을 달아 전시했던 밀랍조각은 현재도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으며, 드가가 사망한 후 이 조각은 청동으로 주조 되어 지금은 20개가 넘는 커다란 박물관이나 미술관에서 볼 수 있는 명작이 되었다.
문국진 박사(1925~ )는 한국 최초 법의학자이자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창립 멤버로 한국 법의학계의 살아 있는 역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