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 우리
프랑스의 유명한 화가이자 조각가인 에드가 드가(Edgar Degas, 1834-1917)는 파리에서 은행가의 아들로 태어나 부유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아버지의 권유로 법률을 공부하기 시작하였으나 도중에 중단하고 1855년에는 국립미술학교에 입학하여 미술을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졸업 후에는 화가 앵그르의 제자인 루이 라모드의 화실에 들어가 사사 받았다. 그래서인지 데생(dessin)을 중요시하던 앵그르의 영향을 받은 작품을 많이 남겼다.
드가 〈스물세 살의 자화상〉(1857) ⓒ클라크 예술원, 미국 매사추세츠 |
드가가 남긴 자화상을 보고 있노라면 유복했던 그의 유년 시절과 굴곡진 기억에서 헤어나지 못했던 삶을 되짚어 보게 된다. 전공인 법학을 접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할 무렵인 이십 대 초반에 그린 드가의 자화상에는 상처를 드러내지 않으려고 무덤덤한 표정을 짓고 있는 화가의 모습을 읽을 수가 있다. 약간 내려앉은 드가의 눈꺼풀에는 분노를 억누르고 있는 냉소가 가득 담겨 있다. 드가의 내려앉은 눈꺼풀은 이후 삼십 대와 노년기에 그린 자화상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난다.
드가는 1870년에 보불전쟁에 참전 복무 중에 총을 조준하다 한쪽 눈이 잘 보이지 않아 후방부대로 후송 배치됨으로 인해 비로소 자기 눈에 이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후에 미국의 친척집을 방문한 드가는 그 지방의 아름다운 자연 풍경을 즐길 수 없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햇빛이 너무 강해 눈을 뜰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사촌 여동생이 7년 동안 좌측 눈의 시력이 떨어져 잘 볼 수 없다가 그 후 완전히 실명(失明)된 것으로서, 자신의 가계(家系)에 유전성인 눈의 장애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드가는 당시 유명한 안과의사라면 모조리 방문하여 진찰을 받았다. 의사에게 녹내장(綠內障)이라는 진단을 받고, 안약을 처방받았으나 시력은 점점 떨어져 그림을 그리는 데 지장이 있었다. 드가의 시력장애에 대해 안과의사들 간에도 의견이 구구하였다. 그들의 기록을 보면 영국의 안과의사 Trever Roper(1970)는 망막색소변성(網膜色素變性) 아니면 망막결핵이 의심된다고 하였고, 프랑스의 안과의사 Lanthony는 홍채(紅彩)의 만성염증의 가능성을 주장하였으며, 미시간 대학의 안과교수 Revin은 증상이 만성적으로 경과되고 그간 안과 의사들의 진료부를 보아도 드가는 망막이나 홍채의 이상이라기보다는 황반변성(黃斑變性, macular degeneration)의 가능성이 높다고 하였다.
황반이란 눈의 망막(網膜) 중앙부에 있으며 망막의 다른 부위보다도 눈의 사물을 보는 기능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부위다. 이 부위의 기능이 고장 난 황반변성에는 만성적으로 진행되는 위축형과 혈관이 증식되면서 병변이 비교적 급속히 진행되는 급성형의 두 가지가 있는데 드가의 경우는 전자에 속하는 것이라 하였다.
드가에게 이러한 시력장애가 있었다는 것을 전제로 그의 작품과의 관련성을 살펴보기로 한다.
드가 〈오페라 하우스의 오케스트라〉(1870) |
우선 그림의 구도를 보면 그의 작품은 가까운 근경(近景)은 세밀하게 강조하고, 먼 원경(遠景)은 대담하게 단순화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한 그림으로는 〈오페라 하우스의 오케스트라〉(1870)를 들 수 있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연주하는 모습으로 채워져 있는 이 그림에서 무대 위에서 춤을 추는 무희들의 모습이 매우 희미하게 처리된 것을 볼 수 있다. 이를 확대해 보면 그림의 근경에 있는 음악연주자들은 강조하여 자세하게 표현되었으나, 원경인 무희들은 대담하게 단순화된 것을 볼 수 있다.
드가 〈오페라 하우스의 오케스트라〉 부분확대 |
드가는 파리에 있는 오페라 하우스를 자주 방문해서 무희들의 모습을 그렸다. 하지만 공연을 펼치는 광경을 그린 것이 아니라 휴식을 취하거나 연습하는 모습을 주로 화폭에 담았다. 이러한 무희그림에서 드가의 취향이 잘 드러나 있다. 그는 무희가 자유롭게 연습할 때 나타나는 긴장하지 않고 자발적이며 자연스럽게 표출되는 자세나 동작을 그리고 싶었던 것 같이 보인다. 또 하나는 연습에 지친 모습에서 비로소 자연미를 발견할 수 있다는 드가의 생각이다. 그래서 그가 그린 무희 그림은 발레 연습 시간에만 볼 수 있는 한 순간을 마치 사진처럼 포착해 표현한 것이다. 드가의 현실주의를 읽을 수 있는 구도로서 그가 화려한 공연 장면을 외면하고 무대 뒤편에서 이루어지는 이런 평범한 현실에 주목한 까닭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눈의 황반변성이 있는 경우에는 시야의 중심부는 잘 보이지 않으므로 자연히 그림의 가운데 부위는 비우게 된다. 또한, 그림의 좌우상하의 주변의 대상을 자세하게 그리게 되는 경향이 있는데 실제 드가의 작품에서 그러한 경향의 그림이 있는가를 살펴보기로 한다.
드가 〈오페라 발레 교실〉(1872) ⓒ오르세 미술관, 파리 |
드가의 작품 〈오페라 발레 교실〉(1872)을 보면 물론 발레의 연습 광경이기 때문에 인물배치가 그림의 주변에 놓였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림의 중심에 마루만 보이는 공간이 너무 넓게 표현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현상은 Revin 교수가 지적한 바와 같이 드가의 눈의 장애가 황반변성이어서 시야의 중심부를 잘 볼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림으로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드가 〈발레 수업〉(1874)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뉴욕 |
드가의 가장 우수 발레작품이라는 〈발레 수업〉(1874)을 보면 무희들은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지도교사의 말을 경청하고 있다. 인물들의 배치는 주변에 놓여 있으며 중심의 공간은 넓기는 하지만 앞의 그림보다는 다소 덜하다.
그런데 이 그림은 발레 수업보다 교사 쥘 페로에게 더 비중을 두었다고 한다. 그것은 파리에서 유명했던 발레 지도자인 페로 선생의 은퇴를 앞둔 그림이었기에 구도자체가 교사를 중심으로 짜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무희들보다도 선생을 부각시키기 위한 배치라고는 하지만, 페로 선생의 위치도 중심이 아니라 우측으로 더 가까이 서 있고 중심은 역시 많이 비어있다.
작품을 자세히 보면 그림을 그릴 때 시선을 앞쪽 아래에서 뒤 위로 올려보고 그린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것은 그림의 뒷부분의 사람은 작게 보이며 공간이 없는 데 비해, 앞부분의 사람은 크게 그리고 마루도 넓은 공간으로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드가가 황반변성이어서 그림의 주변에 역점을 두고 중심부를 비웠다는 작품의 경향은 세월이 갈수록 더욱 두드러졌다는 것을 다음의 그림에서 더 알 수 있다.
드가 〈발레 전 연습〉(1876)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뉴욕 |
그의 작품 〈발레 전〉(前)(1876)을 보면 멀리서 연습을 준비하는 두 무희의 모습은 뚜렷이 표현되었다. 마루의 공간은 그림 오른쪽 뒤에서 중심에 이루기까지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 넓게 표현되었다.
드가는 평생 동안 발레와 관련된 작품을 많이 남겼다. 하지만 정작 무대 위에서 공연하는 모습보다는 무대에 오르기 전 리허설이나 옷매무새를 단장하고 있는 무희의 모습을 주로 그렸다. 그리고 홀, 대기실 등 공식적으로 외부에 공개되지 않은 장소에서 공연을 마친 후 앉아있는 무희들을 묘사했다.
드가의 눈의 장애는 점점 심해져 유화를 그릴 때의 물감과 기름 그리고 다른 물감과의 배합이 점점 어려워졌다. 그러자 그는 유화를 포기하고 파스텔화에 전념하여 그 나름대로 휘발성 기름과 파스텔을 섞어서 사용하는 독창성을 발휘하여 많은 파스텔화의 명작을 남기기도 했다.
1880년부터 드가는 이따금 조각도 했으며 무희들, 목욕하는 여인 등의 걸작을 남겼다. 말년에 시력을 잃어 한쪽 눈은 완전히 실명했고 나머지 눈도 그와 비슷한 상태였다고 한다. 즉, 드가는 시력장애 때문에 유화와 판화를 중단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파스텔화와 조각을 통해 그의 대담성과 환상적인 그의 예술성은 다시 개화된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