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 우리
치매는 불치가 아니다
치매는 불치의 병인가? 치매 치료제는 계속 개발 중이다. 일부의 치매는 완치될 수 있다. 〈춤웹진〉에서는 치매 치료 후 춤무대에 선 노인을 소개한다.
과거부터 치매를 불치의 병으로 여기는 터에 치료 후 무대에 섰으니 기적이 아니겠는가. 많은 가정에서 치매를 쉬쉬 하며 감추려 한다. 치매를 치료해도 굳이 주변에 알릴 생각이 없으므로, 치매 치료 사례는 잘 알려지지 않는다. 치매를 불치의 병으로 단정하는 인식은 치매 치료의 최대 걸림돌이다. 일부의 치매는 완치될 수 있다.
예비역 육군 장교 최순국씨는 치매 치료 후 지난 5월 4일 〈가방 이야기〉라는 춤 공연에서 한 시간 넘게 무대에 섰다. 그는 올해 83살로, 서울에서 딸네 집에서 거처하던 중 작년 봄 치매 치료차 입원하였다가 증세가 호전되어 퇴원하고 지난 5월 춤 공연에 출연하였다. 지금도 그는 치매지원센터를 매주 정기적으로 방문해서 완치를 향해 의지를 다지고 있다. 가족들은 치매지원센터를 충실히 이용하면 치료에 엄청난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강조한다.(치매지원센터는 전국의 지자체들에서 운영한다.)
〈가방 이야기〉는 어느 할아버지의 살아온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사람마다 자기 가방이 있고 가방마다 자기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여기서 할아버지 이야기는 최순국씨의 지난날들이 소재이고, 무대에서 최순국씨는 다른 출연진들과 함께 이야기를 풀어갔다. 최순국씨 세대는 한국전쟁 이후 근대화 시기를 살아왔고, 작품도 그 시대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가방 이야기〉가 펼쳐진 서강대메리홀 대극장 무대는 국내 전문 무용가들이 공연작을 수시로 발표하는 무대이다.
최수진 〈가방 이야기〉 ⓒ김채현 |
치매 치료 후 무대에 서다
춤 작품 〈가방 이야기〉는 일반 무용 공연과는 다른 점이 몇 가지 있었다. 노령의 일반인 노인이 출연한 점, 출연한 노인이 치매 치료를 경험한 점, 그 노인의 한평생 이야기를 소재로 한 공연에 당사자가 직접 출연한 점, 출연한 노인이 예비역 장교라는 점이다. 끝으로, 이번에 출연한 노인이 공연작(〈가방 이야기〉) 안무가의 아버지라는 점도 일반 무용 공연에서는 거의 없는 일이다.
〈가방 이야기〉는 이색적인 공연이며, 내용과 무대화 경위가 이색적이기 때문에 널리 알릴 필요가 있었다. 치매를 겪는 당사자와 가족에게 희망을 전하고, 치매 치료를 다짐하는 공공 기관들을 성원하고, 그 선상에서 무용인들이 치매 치료 프로그램 개발에 동참하기를 바라는 뜻에서 〈춤웹진〉은 출연자 최순국씨와 안무가 최수진씨(서울예술실용전문학교 교수)를 장시간 인터뷰하였다. 인터뷰 내내 최순국씨는 바른 자세에 또렷한 음성으로 답하여 치료되었음을 보여주었다.
인터뷰하는 최순국씨 |
인터뷰에서 최순국씨는 장교 시절 장교 클럽에서 사교춤을 즐긴 것으로 밝혔다. 1950년대에 대한민국 장교가 사교춤을 즐긴 것은 퍽 희소한 일이다. 그는 예편후 1990년대에 미국으로 이민했다가 2015년 귀국하였다. 인터뷰는 최순국씨의 체험을 독자들과 공유하기 위해 〈가방 이야기〉 출연 과정, 그의 치매 치료, 그가 사교춤을 즐겼던 시절을 중심으로 취재하였다. 본 기사는 그와 가족이 답한 바를 서술 형식으로 모아 2회에 나누어 게재된다.
딸 아이 창작 무대에 출연한 아버지
“영화보다 훨씬 더 영화 같은 현실입니다. 우리 아버지가 치료될 줄은 정말 상상도 못했어요. 치매가 어떤 것인지 몰랐으니까 당황했고, 그저 불치의 병으로만 알았죠. 그런데 빠르게 치료되셨으니 훨씬 더 영화 같습니다.”(최수진)
2018년 4월 어느 날 수진씨 가족은 치매 증상을 짐작하고 아버지를 입원시켜드릴 요양병원을 찾아갔다. 가는 요양병원마다 먼저 환자를 격리시켜 묶어두려는 태도부터 보이거나 간병인이 없거나 해서 단념하고 네 번째 요양병원에 가서야 최순국씨는 입원할 수 있었다.(치매 환자를 격리시키는 것은 치매 치료에 걸림돌이 된다고 한다.) 그후 6월에 다시 병원을 옮겼다.
“마지막 병원에 입원한 지 3주간은 별 차도가 없다가 그후 호전되기 시작했어요. 가족이 날마다 면회를 갔습니다. 8월말에 퇴원, 지금까지 통원 치료합니다.”(최수진)
수진씨가 이 사연을 작품화하기로 마음먹은 때는 작년 8월말. 그때는 아버지가 출연할 만큼 호전되실지 자신할 수 없었다. 다만 아버지가 병원에 계실 때 면회를 가면 카페에서 과거의 춤을 기억해내고 아버지 스스로 스텝도 완전하게 밟으셔서 수진씨는 마음을 굳히게 된다. 만일 공연 때까지 여의치 않으면 휠체어에라도 모셔 출연하는 것도 생각하였다.
〈가방 이야기〉는 시인 강성은의 같은 제목 시에서 착상하였다. 작년 6월 아버지가 병원을 옮길 무렵 수진씨는 이 시를 갖고 서울 용산에서 공연을 가졌었다. 그때는 해체된 가족의 이야기를 소재로 했다. 이 작업은 〈가방 이야기〉의 제1편에 해당할 것이고, 이 공연을 계기로 아버지 이야기를 갖고 다시 공연을 계획하게 된다.
마음에 두던 이 계획을 수진씨는 비로소 올해 2월 아버지께 밝혔다. 즉답이 없던 아버지로부터 공연 출연 승낙이 떨어진 것은 올해 4월이다. 아버지가 여러 면에서 심사숙고하고 마음을 굳히는 데 시간이 그만큼 걸렸다.
“사실은 출연 제안을 듣고 덤덤했어요. 그런데 귀국한 후 3년 동안 딸네 보살핌도 잘 받았고, 과거에 춤춘 경험도 있으니까 부담은 없었어요. 내가 출연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덕이 된다면, 해보자고 결심했어요.”(최순국)
최순국씨는 미국에서 귀국할 당시 미국 시민권자였으나 올해 3월에 한국 국적으로 정리해 주민등록을 새로 발급받았다. 그 직후 딸아이의 공연에 출연하기로 마음을 정하였다.
한국 근대화 세대의 〈가방 이야기〉
“〈가방 이야기〉에는 네 남자가 등장합니다. 그 사람들은 제각각 아버지께서 거쳐온 소년기, 청년기, 장년기, 노년기의 모습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침몰하는 배 속에서 구조 받지 못한 채 청소년들이 희생된 참사도 그렸어요. 아버지가 살아오신 이야기를 사람들과 함께 생각하려고 아버지 가방 속을 열어 보았지요. 춤뿐만 아니라 시각 이미지와 라이브 음악의 도움도 많이 받았어요.”(최수진)
〈가방 이야기〉는 무용극 형식 작품이다. 남성 네 사람에 더하여 여러 무용수들이 출연하였다. 중견 무용가 이광석과 원로 연극인 기국서가 아버지의 장년기와 노년기를 맡아 작품에 노련한 느낌을 주었다. 해금 연주가 김준희, 바리톤 오세민이 출연해서 현장감을 강조하였다. 영화 〈쉬리〉와 드라마 〈아이리스〉 음악감독 이동준이 이번 공연의 음악 감독을 맡았다.
최수진 〈가방 이야기〉 ⓒ김채현 |
지난 70년 동안 한국 사회는 한국전쟁, 경제개발, 중진국의 과정을 거쳤다. 이런 시절에 찍혔던 과거 한국 사회 영상 이미지들이 〈가방 이야기〉에서 파노라마 식으로 흐른다. 점차 잊혀가고 까마득할 듯한 한국의 근대화시기를 관객들은 영상 파노라마에서 오랜 만에 만났다. 노령 세대는 흘러간 시대 감회가 새로웠을 터이고 젊은 세대라면 낯설던 것을 접했을 것이다. 근대화의 파노라마를 배경으로 당시 한국 남성이라면 대부분 겪었을 법한 삶의 희로애락을 네 남자가 그려냈다.
〈가방 이야기〉는 춤으로 그려낸 개인 시대극(時代劇)이다. 힘겨워 하는 가장, 사랑에 설레는 청년, 꿈 많은 소년, 치매로 전전하다 재활하는 노인 등 과거 70년 사이 우리 사회를 살아온 사람들의 사연들이 가방 속에 있었다. 관객들 중에서는 〈가방 이야기〉가 자기 이야기, 자기 가족사로 받아들여졌음직하다. 열리기를 기다리는 가방, 이 세상 어딘가에 또 있지 않을까. 안무가 최수진은 일반 관객의 시선으로 한국 사회를 돌아보면서, 나는 누구인가, 우리는 누구인가고 물음을 남긴다. (계속)
* 〈가방 이야기〉 중 최순국씨가 출연한 부분 유튜브 영상 바로가기
* 치매로 어려움을 겪는 가정을 위한 공공 사이트 안내 중앙치매센터(보건복지부 산하) 바로가기
* 치매 예방에 중요한 조기 진단을 위한 공공 사이트 안내 치매 안심센터(전국 시군구 산하) 바로가기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교수. <춤웹진> 편집장. 철학과 미학을 전공했고 춤·예술 분야 비평 수백 편과 저서 『춤과 삶의 문화』, 『춤, 새로 말한다 새로 만든다』를 비롯 다수의 논문, 『춤』 등의 역서 20여권을 발간했다. 지난 30년간 한국의 예술춤과 국내외 축제 현장을 작가주의 시각으로 직접 촬영한 비디오 기록물 수천 편을 소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