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 우리
배우이자 모델인 소지섭씨의 열애설 기사가 나왔다. 라디오에서는 이를 놓칠세라 여성 DJ가 속상해서 밥이 안 넘어간다는 둥 시청자와 너스레를 떨고 인터넷 기사에서는 파파라치 컷들과 상대 여성의 신상에 대한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런데 소지섭 배우의 열애 못지않게 관심이 간 건 상대 여성이 무용과 출신의 방송인이란 점이었다. 며칠 전, 아침 라디오 방송을 진행하는 박은영 아나운서도 올해 9월 결혼한다는 이야기를 자신의 방송에서 꺼냈다. 한국무용을 전공한 사람이라 평상시 눈여겨보던 진행자였다. 둘러보니 의외로 무용학과 출신의 방송인들의 활약이 대단하다. 개인적으로도 방송 프로그램을 제작하면서 무용 전공 진행자들과 일을 한 경험도 꽤 된다. 그 중에는 이미 고등학교 때부터 무대보다는 방송 카메라 앞에 서고 싶어서 학교 선택부터 전략적으로 준비한 사람도 있었다. 무용과 출신 아나운서 중에는 9시 간판 뉴스 앵커 자리를 꿰찬 사람도 있는 걸 보면 무용과 출신 인재에 대해서 방송계의 입장은 상당히 우호적인 게 틀림없다.
무용과 출신의 방송인들 ⓒKBS |
무용인, 방송계의 꽃이 되다
무용인들은 오랜 시간 동안 무대에서 자신을 보여주는데 익숙하기 때문에 방송 진행자로는 적격이다. 대부분 외모가 뛰어난 것도 사실이고 관객 앞에 서는 것이나 카메라 앞에 서는 것이나 대동소이하기 때문에 적응하기도 어렵지 않다. 이런 점이 방송 진행자의 길을 선택하는데 망설임을 줄여주는 것으로 보인다.
요즘 방송가에서는 ‘아나테이너’라는 신조어가 등장했다. 아나운서와 엔터테이너라는 단어를 조합한 이 말이 등장한 건 아나운서들이 각종 프로그램에서 자신의 끼와 재능을 발휘하면서부터다. 과거에는 아나운서들이 천편일률적인 단발머리를 하고 뉴스 진행을 주로 하기 때문에 틀에 박힌 모습을 보여줄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방송국 입장에서는 이렇다. 시청률을 위해 유명한 연예인을 MC나 진행자로 섭외할 경우 출연료가 만만치 않게 들어간다. 그런데 자사 아나운서를 진행자로 내세울 경우는 어떤가. 내규로 정해진 월급 안에서 해결이 된다. 즉, 아무리 유명하고 인기 많은 아나운서라도 연예인 MC가 받는 출연료만큼의 금액을 받기는 어렵고, 그 이야기는 곧 방송국 입장에서는 시청률도 잡고 제작비도 줄이는 가성비 최고의 프로그램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말이다. 잘 키운 아나운서 하나 열 연예인 안 부러운 상황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제작진들에게 연예인 말고 자사 아나운서를 활용하라는 지침이 내려오기도 하고 아나운서의 프로필을 정리한 파일을 건네주기도 한다. 이런 면에서 기본적인 무대에서의 끼와 재능을 지닌 무용인들이 방송계로 진출하는 건 방송국 입장에서나 본인 입장에서나 윈윈 전략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점은 하나 있다. 무용과 출신의 진행자는 있지만 제작자는 왜 없는가. ‘아나테이너’라는 단어가 등장할 정도로 진행자 각자의 색깔이나 역량이 프로그램 안에서 아주 중요해졌지만, MC나 리포터의 역량을 발휘해야 할 시점이 오면 이미 그 방송의 주제나 내용, 다른 출연진들, 모든 것이 결정된 상황이다. 이미 만들어지고 기획된 내용 안에서 진행자의 끼와 재능이 발휘되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한계가 있고, 편집된 내용이나 준비된 내용에 내 입김을 작용시키는 데는 어려움이 있다는 말이다.
‘중학교 2학년’의 시각으로 만드는 방송
신문이나 방송에서 무용과 무용수에 대한 이야기를 다룰 때 메인으로 등장하는 단골 컷이 있다. 발레의 ‘제떼’를 뛰고 있는 장면이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춤을 모르고, 이 동작의 이름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라도 제떼 동작의 이미지는 모두 기억할 것이다. 가장 시원한 그림, 에너지의 폭발이 느껴지는 장면이기 때문에 이 장면을 주로 메인 컷으로 선택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다. 안무가가 표현하고 싶었던 부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과 제작자의 눈에 근사해 보이는 장면이 다를 수 있다는 점이다. 느리고, 조용하고, 움직임이 적고, 표정이나 다른 느낌을 중시하는 장면은 편집당할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다.
다양한 채널들이 등장하고, 리모컨 하나로 쉽게 채널이 바뀌는 환경이 된 이후로 방송에서 장면의 빠른 변화는 필수적인 일이 되었다. 인터뷰는 한 번에 10~15초 안에, 그리고 공연 장면은 카메라 숏이 다양하게 바뀐다는 전제 하에 1분을 넘기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1시간 짜리 무용 공연에서 단 1분만 보여줘야 한다면 어떤 장면을 선택할 것인가. 이 결정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지만 방송가의 대답은 명확하다. 가장 화려하고 시원시원해 보이는 장면을 넣는 것이다. 작품 안에서 웅크리고 있는 장면이나 천천히 팔과 다리가 움직이는 장면이 가장 메인이라 하더라도 편집할 때 이 부분을 고를 가능성은 적다.
방송은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제작돼야 하기 때문에 보통 ‘중학교 2학년’ 수준에 맞춰서 제작해야 한다는 기준점이 있다. 그래서 어려운 이야기, 집중해야 하는 부분은 보통 편집에서 제외된다. 교육방송이 아닌 이상 그렇다. 시청자들이 1초 단위로 리모컨의 버튼을 누르고, 그게 그대로 시청률표에 반영되고 결국은 그게 자신이 방송인으로 계속 제작할 수 있는지, 프로그램의 존폐 여부가 결정되는 상황에 화려한 그림 위주로 편집하는 건 당연한 일일 수 있다.
무용과 무용인을 테마로 제작한 방송 프로그램 ⓒMBC 방송캡처 |
무용과 출신의 제작자, 왜 필요할까
문화 예술 프로그램을 제작, 집필하면서 수많은 아티스트들을 만나다 보니 그들의 목소리를 가장 가까이에서 가장 속내 깊은 이야기들을 들을 기회가 많다. 그들이 표현하고 싶은 이야기, 보여주고 싶은 것들이 자주 방송가에서 선정한 ‘중학교 2학년’의 수준과 맞지 않는 철학적인 이야기인 경우도 많다. 그 내용은 편집될 것 같다고 이야기하면 대부분의 아티스트들은 이렇게 말한다. 시청자의 수준은 그렇게 낮지 않아요! 그리고 예능 프로그램도 아닌 문화예술 프로그램에서 조금은 더 전문적인 시각을 담아주기를 원한다. 이들이 갈증을 해소해주고 시청자들에게도 양질의 프로그램을 선보일 방법은 없는 것일까.
방송 제작진들이 갖고 있는 능력은 ‘해당 아이템에 대한 깊은 이해’가 아니라 그것을 방송으로 잘 포장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이게 이들의 전문 영역인 것이다. 특수한 분야에 대해 전문적이고 깊이 있는 지식을 가지고 방송을 제작하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무용과 출신의 제작자들이 많이 등장하면 좋겠다는 생각은 이런 데서 온다. 춤을 볼 수 있는 눈이 있는 제작자가 있어야 안무가가 강조하고 싶은 장면을 어떤 식으로든 살려서 넣을 수 있을 것이다. 제작 스텝들끼리 다른 의견이 오가며 충돌하더라도 최대한 그걸 살리려는 노력은 하게 될테니 프로그램의 디테일은 달라질 수 있다. 적어도 의견과 목소리는 낼 수 있다. 이건 아주 작은 일 같지만 이런 것들이 쌓여서 시청자들이 방송을 통해 무용이나 예술을 보는 눈을 키우는데, 그리고 문화 예술 애호가들의 시각에서도 충족되는 프로그램이 만들어지지 않겠는가. 전문적인 테마를 다룰 때 전문적인 시각이 담기는 건 중요하지만 방송가에서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일이기도 하다.
아이템을 제안하는 데서도 전문적인 식견은 필요하다. 방송 제작은 제작진이 아이템을 갖고 오는 데서 시작한다. 방송에서 무용을 다루는 경우가 적은 것은 무용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 제작진, 그것을 제안하는 제작진이 적기 때문이기도 하다. 컨템포러리 댄스가 방송에서 잘 다뤄지지 않는 이유는 제작진이 어떤 작품과 어떤 아티스트를 다뤄야 하는지조차 잘 모르고, 작품에 대한 이해가 제대로 안되기 때문에 중학교 2학년 수준으로 잘 소화시켜 전달하는 건 더더군다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무용과 무용인을 테마로 제작한 방송 프로그램 ⓒMBC 방송캡처 |
무용인, 우물 안을 탈출하라
교육부와 한국교육개발원은 '2017년 고등교육기관 졸업자 취업통계'에 따르면 예체능 계열은 전공자는 인문계열과 함께 여전히 낮은 수치의 취업률을 기록하고 있다. 예체능계열이 갖고 있는 전문성에 비해 취업 시장에서 찬밥 신세인 것이다. 취업률 1위를 기록하고 있는 의약계열에 못지않게 예체능 계열도 전문성으로 특화된 분야인데 이런 결과가 나온다는 게 답답한 노릇이다. 더 안타까운 건 예체능계열은 다른 분야보다 어린 나이에 전문 교육이 시작된다는 점이다. 이미 초등학교, 중학교 때 절반 이상의 무용인들이 진로를 정하고 미래를 위한 구체적인 준비에 들어간다.
최근 4년간 계열별 취업률 현황 ⓒ교육부, 한국교육개발원 |
전문무용교육 시작 시기(2013 전문무용수 실태조사 중에서) ⓒ전문무용수지원센터 |
요즘에는 중고등학교 때 홈스쿨링을 하는 무용학도도 많이 등장했다. 이유는 단순하다. 학과 공부와 수업을 모두 소화하면서 이 어려운 춤의 테크닉을 모두 익히기에는 연습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춤이 잔인한 건, 테크닉이 완성됐다고 그게 춤은 아니기 때문이다. 테크닉이 어느 정도 완성되고 이제 진짜 춤을 출 수 있다는 생각되는 그 시점이 왔을 때는 무대에 설 수 있는 시간이 많이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준비 기간은 남보다 길고, 심지어 빠르기도 한데 정기적인 돈벌이, 밥벌이가 되는 무대와 일자리를 갖는 것도 쉽지 않고, 이미 30대 초중반만 되면 은퇴를 고민하게 된다. 직업전환을 위한 준비도 쉽지 않다. 무대에 서 본 경험은 많지만 다른 경험은 별로 없기 때문에 어떤 일을 해야 할지도 잘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런 상황에 과연 무용과를 졸업한 사람은 무용가로서 무대에 서는 일만 바라봐야 할지 의문이 생겼다. 오히려 본인의 다른 특성을 뒤늦게 발견하고 새로운 도전을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교육자, 공연 기획자, 재활 치료사 등 기존에 무용학과에서 배운 지식으로 확대해서 진출할 수 있는 분야는 많다. 여기에 방송이나 언론매체에서 전문 제작자나 기자로 활동하는 업무도 고려해볼 수 있다. 여전히 미디어의 힘은 막강하기 때문에 무용과 공연 전문 잡지 외에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하는 주요 방송국이나 일간지에 무용인들이 활동한다면 그만큼 무용계의 입지도 강해질 수 있다.
방송 제작진들이 깊이 있는 지식보다는 두루두루 전반적인 아이템을 다룰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반대로 무용인들은 너무 한 곳만 바라봤다. 자신의 춤의 세계에만 갇혀있지 않고 책, 공연, 전시, 여행 등을 통해 전반적인 넓은 지식과 정보, 경험이 필요하다. 이건 비단 방송이나 언론 매체로 진출하지 않더라고 춤 자체를 위해서도 필요하다. 오히려 춤 밖으로 나와서 다른 영역을 경험할 때 춤의 깊이가 더 깊어지고 풍부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안무가의 경우 더 그렇다. 관객들은 작품을 통해 안무가가 생각하고 고민하고 경험한 이야기를 나눈다. 단순히 무브먼트를 잘 만든다고 안무가가 되는 게 아니라 작품의 구성, 그 안에 담긴 메시지, 그걸 표현하는 방식, 음악, 조명까지 많은 역량을 요구한다. 무용계에 남아 있더라도, 그리고 어디서 무엇을 하든 이제는 시각과 경험을 다양화하는 건 무용인들에게 필수적인 일이 되었다.
클래식 음악 분야에서는 전공자나 깊이 있는 애호가가 일간지 기자나 방송 제작진으로 활약하는 경우가 많다. 몇몇 제작진들은 자신만의 입지를 굳히며 전문적인 지식과 넓은 네트워크로 좋은 프로그램들을 양산해내고 알찬 기사들을 써내고 있다. 이런 사람들이 이제 무용인들에게서도 나타났으면 좋겠다. 아름다운 외모와 무대 체질을 발휘해 진행자로 활약하는 무용학과 출신은 많지만 제작의 핵심으로 들어가서 내용을 기획하고 만들어내는 사람들도 늘어났으면 하는 바람이다. 꽃은 아름답지만 씨앗은 수많은 가능성을 갖고 있다. 꽃의 존재는 중요하지만 씨앗이 없으면 꽃은 피지 않는다. 이제 무용인들이 꽃이 아니라 씨앗이 됐으면 좋겠다.
이단비
KBS, SBS를 시작으로 다양한 매체에서 방송작가로 활동했으며 현재 MBC에서 문화예술 프로그램을 제작, 집필하고 있다. 발레를 비롯한 공연예술 다큐멘터리 제작과 집필에 매진하고 있으며, 발레와 무용 칼럼을 쓰면서 강연활동도 활발히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