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남정호의 춤 산책 7
나의 춤을 기억한다 - 유희하는 대학교수
남정호_안무가

부산은 내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이다. 예민한 사춘기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냈고 유학을 가기 전에 모교에서 4년 동안 무용 교사직을 하였으니 첫 직장이 있은 곳이다. 결혼도 출산도 이 도시에서 그리고 퇴임할 때까지 안 맞는 옷을 입은 듯이 쭉 어색했던 대학교수의 신분을 만들어 준 곳이기도 하다. 어찌 되었든 이 도시는 활달하고 정겹고 박력이 있고 친근하고 즉각적이다.

대학교수 일은 무용가의 보호막이 된다고 생각했다. 이 땅에서 안정된 수입과 무용수와 연습실이 보장되는 이토록 분에 넘치는 직업을 36년간 가지게 된 것은 엄청 난 행운이다. 게다가 큼직한 책장들과 널찍한 책상을 가진 개인연구실도. 어느 교수는 사비를 들여서 작은 개인 무용연습실로 개조도 하고 또 어느 음악교수는 좀 지나치게 치장을 하여 룸 싸롱같이 보이기도 했던 교수실!

집에 따로 개인 공간이 없던 나는 수업이 있건 없건 출근을 하여 이 장소를 연구와 학생 면담과 응접실 등을 겸한 다용도 다목적 장소로 한껏 활용하였다. 그러고 보니 일본 오차노미즈 대학이나 미국 UCLA의 교수실보다 더 넓고 쾌적한 공간이었던 것 같아 송구스러운데 돌이켜보면 당신은 무용가인가, 선생인가라는 질문을 해가며 위태롭게 줄다리기하면서 살아온 것도 사실이다.



 



헤르만 헤세에 의하면 아버지는 나르치스(Narziss), 엄마는 골드문트(Goldmund)의 성향인데, 금기시되고 불량스럽고 숨겨진 것에 늘 상 매력을 느꼈던 나는 원래 무책임하고 무분별한 골드문트로 태어났다는 자기암시를 쭉 가지고 있어 왔다. 엄마는 그런 나를 위태롭게 주시하면서도 근원적으로 이해하시는 것 같았고 때로는 나의 공모자가 되어 주셨다는 기억이 있다.

무용가는 예술가, 골드문트이고 단순한 약간의 본능과 필요에 의하여 어린아이의 마음을 가지고 아무에게도 복종하지 않고 아무런 목표도 없이 아무것도 갖지 않은 채 우연에 자신의 몸을 맡기며 용감하고 초라하지만 굳센 생활을 하는 존재라고.

생물학적으로 젊은 여자였던 나는 아마? 분명히! 이런 용감하고 가난한 무용가로 버티기가 겁이 났을지 모른다. 무용가라는 사실을 알면 얕잡아보려는 시선으로 온몸을 훑어보는 당시의 세태에 지레 겁을 먹었다고 할까,

누군가를 만나도, 어떤 글을 읽어도 어떤 영화를 보아도 어떤 음악을 들어도 어떤 책을 읽어도 카페에 앉아 있어도 심각한 공식 석상에서도 춤은 항상 나를 따라다녔다.

1년에 작품을 두 개씩만 발표해 보세요라고 고준혁씨가 말해주었다. 강준혁씨는 나를 이 땅에서 무용가로 인정한 드문 이다. 왜냐고? 그는 틈만 나면 나에게 대학교수 옷을 벗어 던지라는 조언을 해 왔기 때문이다. 덕분에 대부분이 현장 예술가들로 이루어졌던 ‘울타리 굿’이나 ‘아비뇽 축제 한국주간’ 등에 무용수로 참여하게 되었는데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나는 시간들이었다.

 



교수직은 떨치지 못했지만, 작품을 만들고 싶은 욕구가 넘친 시기였기에 솔로로 데뷔를 한 후 곧 다른 교수 무용가들처럼 학생들과 함께 작업을 하였다. 수업에서 만난 학생들 중 일부는 방과 후에 나의 작품에 출연하는 무용수가 되니 이들을 좋은 무용수로 만들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가르칠 수밖에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초창기에 만난 부산의 학생들은 좀 투박하지만 대담하고 자유롭고 정열적 기질을 가지고 있어 생각을 공유하고 실현하는 데 안성맞춤이었던 것 같다.

부산 시절에 발표한 작품들이 솔로를 제외한 군무를 열거하여 보아도 제법 된다. ‘다섯 가지 이야기’, ‘비밀의 뜰’, ‘사인무’, ‘유희’, ‘두 번째 유희’, ‘얘들아 나오너라 달따러가자’, ‘무서운 아이들’, ‘아이야 저 산 너머에 무엇이’, ‘도시 이야기’, ‘풍선 심장’, ‘나그네들’, ‘우물가의 여인들’-이 모든 작품들은 지금은 사라진 부산 경성대학교의 오래된 건물 꼭대기 층에 있는 조그맣고 허름한 무용실에서 탄생하였다.

개인 작품활동을 핑계로 학생 지도에 등한하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어쩔 수 없이 전자는 의무이고 후자-작업은 즐거움이었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무용가 역할을 즐거워하는 것에 대한 미안함으로 선생 노릇은 철저하게 하여야 한다는 자각은 잊지 않았다고 할까. 그런데 점차 내 안에 숨어있던 나르치스 아버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골드문트인 줄 알았는데 나르치스인가? 테크닉이 좀 모자라더라도 무용에 대한 순수한 열정으로 가득 차 있는 학생 무용수들에게 나의 비밀 작업 노트가 공개되었고 우리는 공범이 되어 함께 수많은 작전을 짜고 경비아저씨에게 혼나기도 하면서 연습실에서 밤늦게까지 죽쳤지.

 



요한 호이징하의 〈Homo Ludens〉(호모루덴스)를 남편에게 건네받고 읽으면서 작업 과정을 통하여 유희가 가지고 있는 자발성, 재미와 즐거움, 공정한 경쟁, 규칙 준수, 주체성, 상호성의 막연했던 개념이 조금씩 분명해졌다.

그렇지. 춤과 함께 할 때는 골드문트 엄마가 되는구나. 무용수끼리, 그리고 관객과 주고받는 규칙을 가지고 있는 춤. 인생은 어차피 유희이잖은가. 한바탕 잘 놀고 가듯이 무대에서 한바탕 잘 놀아 보자구요. 무대 위의 우리가 즐겁지 않은데 어찌 관객을 즐겁게 하리오. 나와 함께 있는 다른 무용수와 공간과 시간을 놀이의 도구로 삼아 즐기자꾸나. 심각하여야 현대무용이라는 자기암시에 빠진 주변의 개똥 철학자^^들과 다르게 우리는 천진난만한 철부지 아이들이 되어 밤새는 줄 모르고 춤을 추었구나, 유희하였구나.

부산의 음악가, 미술가, 패션디자이너들이 함께하였고 바다 냄새 맡으며 파도 소리 들으며 광안리 해변가에서 시작한 ‘부산여름무용축제’도 있었지. 흠 망원렌즈를 더 깨끗하게 닦아서 들여다보면 첫 시도는 광안리 바닷가에 인접한 대단지 아파트의 꽤 널찍한 시멘트 보도였지. 야외 수업이었다고 할까. 첫해는 행인들이 힐끗 쳐다보며 그냥 지나가고 둘째 해는 지나가다가 멈추어서 구경을 하고 그다음 해는 미리 와서 앉아 있었어!

아비뇽축제서 받은 신선한 충격을 부산으로 전파하고 싶었지. 더 솔직하게 말하면 여름 한 철이라도 서울 중심의 무용계를 부산으로 이동하여 부산에 사는 열등감을 떨치고 오히려 자연 가까이 사는 자부심을 너희들과 함께 갖고 싶었단다. 지금이라면 아르바이트로 간주할 수도 있을 모든 뒷일을 어쩌면 그렇게 자발적으로 헌신적으로 해 주었는지. 그래 참 멋진 유희-놀이판이었구나.

 



대한민국 무용제에서 공식 수상은 하지 못했지만, 그런대로 호평을 받은 〈아이야 저 산너머에 무엇이〉를 학전 김민기씨가 초청해 주었다. 이 공간에서 무용공연은 처음이라고. 그런데 마지막이 된 것 같다. ‘아이’라는 대상에 집착하는 공통점이 있어 그 후에 흥행에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분홍병사’의 안무로 인연을 다시 맺게 되었는데 최근에 김민기 씨의 건강이 안 좋고 학전이 문을 닫으니 격세지감.

인터넷에 의하면 경쟁(Agon), 우연(Alea), 모방(Mimicry), 현기증(Ilinx)의 특성을 가진 유희는 인간이 재미를 얻고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하는 활동을 말한다고. 물질적 보상 또는 대가를 바라지 않고 하는 행위이며 외부의 강제에 의한 행위도 아니라는 면에서 노동이나 일과 구별된다는데, 그동안 일을 유희하듯 하다 보니 보상도 받은 것 같아 미안하구나...

남정호

전 국립현대무용단 예술감독.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명예교수​ ​​​​

2024. 6.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