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혼자 춤추면 외롭지 않아요?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당황하게 된다. 왜냐면 그 질문에는 어쩔 수 없이 이기적인 나 자신을 드러내어야 답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동안 무용가로 살아오면서 많은 무용수들과 작업하면서 누군가를 위한 집을 짓는, 누군가를 위한 요리를 하는 자세로 작업을 해왔다면 혼자서 춤을 출 때는 내가 살기 위한 집을 짓거나 내가 먹는 요리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본다. 그동안 다른 이들을 위하여 소설을 쓰는 데 나의 재능을 사용하였다면 이제는 나 자신을 보살피는 일기를 쓰는 것인데 이 시간을 통하여 자신이 여태까지 해온 것의 허점도 발견하고 성찰하는 시간을 가지게 되는 것 같다.
관객이 현장에서 보는 춤은 빙산의 일각이다. 그 아래에는 무수한 땀과 인내와 절제 그리고 지속적 고통과 간헐적 기쁨의 덩어리가 받쳐주고 있다. 무용가가 혼자서 춤을 출 때는 자신의 몸을 재료로 사용하게 되는데 따라서 혼자 추는 춤을 추는 무용가는 자신의 몸-재료을 적절하게 사용할 수 있게 항상 준비하여야 한다.
준비가 미흡하면 몸의 상태에 따라 적응할 수밖에 없다. 얼마 전까지는 아무 문제 없던 도약이 무릎 통증을 유발하거나 회전하고 나면 어지러워 중심 잡기가 힘들다면 다른 동작으로 대체할 수밖에 없다. 그 전에 필연적 논리를 발견하게 되면 다행이지만 아니면 과거의 이름에 기대어 공허한 무대를 지키며 후배들과 관객들에게 폐를 끼치게 된다.
설혹 다른 이의 눈에는 움막으로 비치더라도 자기만의 특별한 집을 짓는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지 않은가. 올림픽의 열기가 뜨거운 1988년도에 현대춤 작가전에서 발표된 나의 솔로 ‘자화상’은 나를 위한 집, 나를 위한 요리로 시작되었다. 희미한 형광등 불빛 아래서 난방 시설이 없어 두꺼운 스웨터를 걸치고 몸을 데우기 위하여 시작한 스텝들이 자연스럽게 작품에 들어오고 허름한 연습실 바닥의 마루가 고르지 않아 제법 걸려 넘어지기도 했지. 그래, 솔로 작업을 하면서 방과 후 학교 연습실을 사용하는 것이 미안해서 좀 무리가 되었지만 광안리 해변가에 개인 작업실을 마련했단다. 무용가는 거울과 바가 설치된 자신의 연습 공간이 필요해! 밤에도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는 나의 작업실을 가진 덕분에 이제야 자신의 작업을 하는 예술가가 되었다는 자신이 생겼어. 내심에는 그동안 교수 안무가로서 학생 무용수들과 작업하는 것이 불편하였나 봐.
오롯이 혼자 춘 자화상의 탄생에는 다행히 많은 선배들이 있었다. 윤동주, 서정주의 시, 그리고 쿠르베, 렘브란트, 고호, 나혜석, 피카소, 프리다의 그림들. 그중에서 윤동주의 시는 마치 내가 전생에서 쓴 것처럼 친밀했어.
나를 둘러싼 수 많은 역할들 - 선생, 아내, 엄마, 딸, 한국 여자를 오방색에 대립시켜 몸에 걸치고 춤이 진행되면서 하나씩 벗어 낸다. 그리고 그것들로 설치된 사각 안에서 윤동주가 우물 속의 자기를 들여다 보듯이 자신의 모습을 성찰하는 행위를 했지. 시인이 우물 속의 사나이를 미워하고, 가여워하고 그리워 하듯이 나도 여러 화려한 색으로 치장된 그녀를 싫어하고, 연민을 느끼고 그리고 마침내 반성하고 부끄러워하면서 주섬주섬 그 옷들을 다시 걸치고 앞으로의 다짐으로 춤을 추지. 집을 떠나야 집의 소중함을 깨닫듯이 이 작품 속에서 나는 나의 역할을 한번 떠나고 그 역할의 소중함을 되새기는 치유작업을 한거야. 비평계의 분에 넘치는 평가도 받았어^^
그 후 연이어 〈달따는 아이〉 〈가시리〉 〈신부〉를 발표하였는데 이 솔로 작업들이 결국은 나의 자화상 연작이라는 것을 깨달았어. 그러고 보니 이런 솔로들을 있게 한 현대춤협회에 충분히 감사의 뜻을 전하지 못했구나. 지금에 와서 유추해보면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맛을 들인 즉흥이 없었더라면 자화상 작업은 고갈이 되었을 수도 있었어. 즉흥을 통하여 나를 둘러싼 주변 모든 것이 곧 예술이 될 수 있으며 생활 깊숙이 깃들어 있는 것들에 대한 또 다른 해석을 하고 평범한 것에서 영감을 얻고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게 되었지. 어떻게 여기까지 왔냐고? 공공연한 비밀이야. 하늘은 언제나 나를 도와주셔. 하늘에 계신 부모님의 든든한 빽이 있거든.
마티스는 예술가는 탐험가라고 했다. 나는 이 말을 들었을 때 무릎을 쳤다. 그렇지. 자기 발견과 자신의 성장 과정에 대한 관찰로 시작하여 그 후 어떤 제약도 느끼지 않는 자유로운 탐험가. 요란한 피카소에 비해 탐구적인 앙리 마티스. 최근에 그를 제주도립미술관과 도쿄국립신미술관서 연달아 만났다. “나는 항상 내 노력을 숨기려고 노력했고 사람들이 내가 작품을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지를 결코 추측하지 못할 정도로 내 작품이 봄날의 가벼운 기쁨을 가지고 있기를 바랐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이 프랑스 남자가 이미 해버렸다. 내가 태어날 즈음 그는 타계하였는데 그래도 나와 생일이 같으니 같은 별자리를 타고 태어났다는 우쭐거림 정도는 할 수 있겠지.
거대한 파도로 각인된 일본화가 호쿠사이는 73세가 되어서야 간신히 동식물의 골격과 출생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80세에는 더욱 성장하여 90세에 그림의 깊은 뜻을 꿰 뚫어보고 100세에 신묘한 경지에 도달하여 백수십 세가 되면 한 점 한 획이 살아있는 것처럼 될 것이라며 100세가 넘어서도 여전히 화가로서 향상하고자 하는 기개를 가졌다. 또한 죽는 순간에 앞으로 십년 아니 5년만 더 살았다면 진짜 화가가 될 수 있었건만 이라는 말을 남겼다고 전하고 있다.
혼자 춤추기 위하여는 혼자 식사하고 혼자 시장보고 혼자 산책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죠지 무스타키는 그림자처럼 충실하게 따라다니는 고독과 함께 있으니 혼자가 아니라고 노래한다. 자유롭다 못해 고독한 나 자신에게 끝없는 호기심과 기대를 갖고 춤을 통하여 짧고, 덧없고 위협받는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다. 춤추자, 아무도 바라보고 있지 않은 것처럼!
남정호
전 국립현대무용단 예술감독.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