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남정호의 춤 산책 9
〈빨래〉가 탄생하던 때
남정호_안무가

작품은 작품과 작품 사이에서 만들어진다고. 그렇다. 〈빨래〉라는 작품의 탄생은 90년도 동경에서 발표한 솔로 작품 〈외출〉과 평소 눈여겨보았던 신윤복, 김홍도, 박수근등의 그림들에서 씨가 뿌려졌다고 말하고 싶다.

당시 안식년을 맞아 일본어와 일본문화를 본토에서 익히기로 작정하고 동경에서 반년을 살았는데 방문자로서가 아닌 거주자로서 사는 생활이 생각보다 단조로운 일상으로 다가와 거기서 벗어나고픈 욕구가 자연스럽게 표출된 작품이 〈외출〉이다. 지금은 고인이 된 이시이 가오르씨의 소개로 새로 개관한 소공연장에서 할 공연 준비로 이시이씨의 연습실을 사용할 수는 있었는데 다른 스케쥴이 있는 낮 시간이 아니고 밤 시간만이 가능했다. 밤에 잠들지 못하는 신세가 된 그 상황은 미처 알지 못했던 밤 시간이 주는 여유로움과 상상력을 가지고 나를 자극시킨 것은 분명하다.

외국에 나오면 새삼 한국인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공항서부터 외국인 줄에 서는 신분이 되고 언어장애나 문화차이로 당황하다가 어쩔 수 없이 적응하는 단계로 오는데 얌전하게 이 문화 체험을 하며 경험을 넓히다가도 때로는 치밀어 오르는 자존감을 지키려는 자기 합리의 도구를 사용하게도 된다. 이럴 때 기다렸단 듯이 한국 춤의 호흡이 슬며시 들어온다. 〈외출〉을 만들면서 나는 어쩐 일인지 평소 고리타분하고 가부장적이라며 외면했던 나의 조상들을 부르고 있었다. 귀를 간질이는 힐난과 염려 - 몇십 년간 서양인들의 우수한 기술을 연마하던 노력이 헛수고가 되는데. 너는 세계인이 되는 힘든 노력보다 평소에 경멸했던 국수주의자가 되는 손쉬운 처신을 하는구나. 김치와 된장을 먹고 자란 몸이 자연스럽게 반응하는 것을 어떡해요. 더 이상 흉내 내고 싶지 않아요. 현대무용 한국무용 장르가 뭐가 중요해, 내가 하고 싶은 거 할래.



ⓒ남정호



“잠이 오지 않을 때 빨랫감을 들고 우물가로 가서 빨래하고 그것들을 널어놓고 다 마를 때까지 목욕도 하고 신세타령도 하고 소원도 빌고 그리고 새벽이 되어서야 다 마른 빨래를 걷어서 집으로 돌아온다.”

연습을 참관해 준 이시이씨가 일본에서도 얼마 전까지 같은 풍경이 있었다고 응원해 주었다. 그렇지. 빨래는 한국인만 하는 게 아니잖아. 멕시코의 시인 무용비평가의 말처럼 ‘전 세계의 변두리와 시골에 있는 모든 강과 시냇물에서 행해졌고 품격 있는 것으로 여겨지지 않던 대대로 전해져 내려온 세상의 모든 여자들이 하던 노동’이다. 오래된 프랑스 영화 〈La veuve Couderc〉(쿠테르 부인)에서 시몬느 시뇨레가 빨래터에서 남자 바지를 세탁하는 장면이 나온다. 빨래터 주위에 있는 여인들의 질투심을 자극하는 대담하고 행복한 표정으로 그 빨랫감을 과시하는 장면은 숱한 메타포를 함유하고 있었다.

〈외출〉의 음악은 당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스티브 라이히의 ‘Music for 18 mucisians’으로 작정하고 연습을 하였는데 리허설 날 극장 측에서 작곡가와 로열티 문제를 해결하였냐는 문의를 받았다. 로열티, 지적 재산권이라고? 당시 한국에서 한 번도 봉착하지 않은 문제. 거대한 프로덕션에서만 오가는 단어인 줄 알았는데 바다 건너 일본에서는 이미 그 원칙이 어느 공연장에서나 통용되고 있다고. 무음악으로 한다는 배짱으로 체념하던 중 구세주가 나타났다! 일본인 사진가 시미즈 이치로씨가 동해안 별신굿 명인 김석출씨를 모시고 온 것이다. 리허설 때 잠시 들러 인사라도 나누려던 것인데 사정을 듣고 바로 생음악 연주를 해주었다. 스티브 라이히의 미니멀뮤직에 맞춰 연습하다가 당일 김석출의 호적소리와 함께 춤을 추면서 나는 보이지 않는 힘의 안내를 받아 조상님들과 만나고 있었다고 믿고 싶다.

솔로를 마치고 나니 바로 예술의 전당 자유소극장 개관공연을 위한 작품 의뢰가 왔다. 혼자서 가진 그 특별한 경험을 무용수들과 나누는 데 주저할 필요가 없다. 그동안 남자무용수 없다고 투덜댔는데 이제는 남자가 필요 없는 작품을 작정하고 만들어 볼거야!(웃음) 극작가이며 연출가인 김광림씨가 대본을 쓰고 김현주 무대미술, 박원근 연출로 호화로운 스탭들과 함께 한 이 작업은 〈우물가의 여인들〉이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다. 음악은? 시미즈씨가 소개한 일본 작곡가며 콘트라베이스 주자인 사이토 테츠씨가 자유소극장 객석과 무대 사이에 걸터앉아 현장 연주를 하였다. 이 인연으로 사이토씨와는 그가 얼마 전에 작고하기 전까지 크고 작은 무대를 함께 했지.



ⓒ남정호



〈빨래〉라는 제목은 1993년 예술의 전당 토월극장에서 주최한 ‘우리 시대의 춤’이라는 기획공연을 할 때부터 사용되었다. 다른 안무가들과 한 트리플 공연이라 작품 길이를 애초 1시간에서 30여분으로 줄이게 되었는데 이 버전이 나쁘지 않아 쭉 유지하게 되었고 이후 이 작품은 나의 작품 중에서 가장 많은 해외 공연을 하게 된다. 뉴욕 라마마극장, 일본 사이타마 예술극장, 오도루 아키타, 프랑스 파리, 러시아 모스크바, 벨라 루시, 조지아, 루마니아 시비우연극페스티발 그리고 멕시코 6개 도시 투어 등.

꽤 실험적이고 반항적이었던 나의 종래의 작품들과 현저히 다른 이 작품 초연에 국내 비평계는 고 김영태 시인님을 제외하고는 침묵하였다. 게다가 웃통을 벗은 목욕 장면에 집중한 매스컴 보도로 위축이 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비평가 Tatiana Kuznetsova의 ‘평범한 과정을 고결한 장면으로 승화하였다’는 언급과 사회인류학자 조한혜정씨의 여성연대에 대한 코멘트를 계기로 이 작품은 공연될 때마다 수정과 보완의 기회를 거치면서 점점 더 풍요로워졌고 많은 비평가들의 평문이 나오기 시작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남정호



2022년 국립현대무용단에서 이 작품이 초연된 같은 장소인 예술의 전당 자유소극장에서 하게 된 것은 우연인가. 드디어 원래의 길이로 돌아갈 수 있었다. 30년이 걸렸구나! 어쩌면 마지막으로 공연될지도 모를 이 기회에 그동안 마음속으로만 생각해 왔던 미얄할미도 모셔올 수 있었고 박성선 음악감독이 작곡하고 멋진 음악가들이 연주한 참으로 아름다운 현장 음악과 함께 하게 되었다. 누가 무어라 하여도 소원성취!!

30년 전 첫 작업에 함께 한 조미옥, 김광순, 강미라, 이은경, 안혜진이 없었다면 이 작품은 이리도 긴 생명력을 가질 수 없을 것이라 확신한다. 함께 연습한 어느 순간에 나는 허름한 연습실이 신화에서 나오는 샘터로 바뀌면서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들을 보는 나무꾼같이 숨을 죽이며 너희의 몸짓을 보고 있었단다. 그대들은 김채현 평론가의 말처럼 ‘일상을 극복한 후 생겨난 힘과 아름다움을 가진, 이 세상이 아니라 우주 및 다른 세계의 여인들’로 변모하였지.



ⓒ남정호



그간 팜플렛에 쓴 말들을 되새겨 보고 싶다. 시간이 흘러가도 변치 않는 것이 있다.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성이다. 역사의 천사는 얼굴을 과거로 향한 채 미래를 향하여 억지로 나아간다고. 시간을 정지시켜서 소홀하게 지나치는 것들의 아름다움과 중요성을 나누고 싶은 것은 변하지 않았다. 이 작품은 외로움을 해소하기 위해 혼자 하던 빨래를 같은 처지의 사람들과 함께 하는 상상으로 시작되었다.



누군가를 기다려본 적이 있는가.
무언가를 기다려 본 적이 있는가.
그 초조하고도 권태로운 시간들을 어떻게 보내었는가..
사방이 닫혀 꼼짝 할 수 없는 좁은 공간에서 어떻게 버티었는가.
낮 시간은 그럭저럭 지낸다 치더라도 그 긴 밤 시간을 어찌하는가.
우물가에 갑니다.
빨래를 합니다.
목욕을 합니다.
같이 춤을 추고 놀기도 합니다.
그러고 보니 기다리는 팔자를 가진 이가 나 혼자만이 아니더이다.


언제나 새로운 것이 우선되는 현실에서 내가 아직도 빨래를 하는 이유는 과연 무엇인가. 빨래는 나의 마음도 깨끗하게 만들어 준다. 그리고 이 작품을 하는 과정에서 만나는 나의 여자 조상들- 고조할머니, 증조할머니, 엄마, 고모 그리고 동무들을 만나는 것이 매번 흥미롭기 때문이다. 이들은 함께 작업하는 무용수들을 통하여 모습을 드러내고 스스로들의 이야기를 들려줄 뿐만이 아니라 내 이야기도 들어준다. 가부장제의 희생양인 망부석의 주인공 같았던 그녀들의 내면에 존재하는 강인하고 자주적인 삶의 에너지는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가 쓴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의 여자전사들과 교차된다. 이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들은 나에게 삶의 신비에 대한 감수성을 바탕으로 아직도 가보지 않은 길을 발견하는 재미를 준다.

춤을 추는 것은 지구상의 시끄러운 일들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살아가면서 불가피하게 만나는 거절과 굴욕에 대처할 수 있는 유쾌하고 무사태평한 미얄할미의 유전자 일부분을 일깨우고 삶을 격려시켜 주는 것이다. 움직임 뒤에 숨지 않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독창적 캐릭터를 만들어 낸 개성적인 다섯 무용수가 큰 힘이 되었다. 서로의 존재로부터 기쁨을 얻고 하나로 뭉쳐 서로 돕는 친밀한 관계가 되어 갔다. 〈빨래〉는 시간과 함께 진화하였다. 꽤 오랜 시간에 걸쳐 감상한 수많은 시선들이 쌓여 이 작품은 풍요로워졌으며 오랜 시간을 걸쳐 형성된 가치와 아우라를 비로소 갖추게 되었다.

나의 과제는 조상들의 지혜를 총동원하여 빨래의 영혼에 새 생명을 불어넣는 것, 새롭게 길을 개척하고 혁신하고 탐구하여 조상을 새롭게 창조하는 것, 그래서 쉬지 않고 흐르는 시간과 다시 만나 미래를 향한 멋진 삶을 열 수 있는 용기와 의미를 나누는 것이다.

남정호

전 국립현대무용단 예술감독.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명예교수​ ​​​​​​

2024. 8.
사진제공_남정호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