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국내 무용계에서 즉흥춤이라는 단어가 이제는 생소하지 않게 된 요인으로 1996년 개교한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창작과에서 개설한 즉흥 과목과 2000년도에 시작된 국제즉흥춤축제의 영향력을 들 수 있겠다. 이 두 곳에서 땀을 흘려 왔던 입장에서 보면 급하게 변모한 한국사회의 현상과 맞물려 즉흥춤도 빠르게 한국 춤계에 들어와 자리를 잡은 것 같다. 자리를 잡았나? 모던댄스와 컨템퍼러리 댄스의 본질적 차이를 외면하고 무턱대고 모던댄스가 있던 자리에 컨템퍼러리 댄스의 칭호만 갈아 붙인 것처럼 어쩌면 외형만, 단어만 사용하는 것은 아닌가. 오호통재라. 이제 와서 어차피 외래문화에서 태어나서 수입된 이 명칭들에 까탈스럽게 굴다니. 현직에 있을 때 했어야 할 과제들이었잖니.
다시 즉흥춤으로 돌아오면 사실 한국춤, 특히 민속춤은 추는 사람의 즉흥적 판단에 많이 좌우되는 춤이다. 부산에서 거주한 시절에 고 이매방님의 춤을 꽤 자주 접할 수 있었는데 목포가 고향인 무용가이지만 사변 이후 꽤 오랜 기간을 부산 범일동에 연구소를 둔 시기인 듯 싶다.
이실직고하자면 조지훈의 시 〈승무〉를 연상하고 싶은 나의 기대를 배반하는 듯한 세속적 감각과 화려한 기교가 넘치는 그의 승무를 나는 꽤 오랜 시간 동안 반감을 가지고 관찰하였다. 팜플렛에는 불교의 의식무에서 유래되었다고 기재되어 있는데 그의 춤은 번뇌를 이겨내려는 승려의 춤이라기보다는 그 승려를 세속으로 소환하려는 위험스런 교태로 넘쳐 있었다고 할까. 그런 중에 1994년 고 강준혁 예술감독과 최준호 행정감독의 책임 아래 이뤄진 아비뇽 페스티벌에 공식 초청된 ‘한국의 밤’(La soiree de Coree de Sud) 에서 장장 4시간에 걸쳐 이루어진 한국공연예술의 전통과 현대를 소개하는 무대를 함께 하면서 지켜본 그의 승무는 한국서 볼 때와는 다른 진중한 면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검은색과 옥색 장삼 둘 다 다림질해놓고 마지막 순간에 실시간 선택을 하는 즉흥적인 면모도^^
같은 행사에 출연하는 탓에 분장실을 공유하면서 언젠가 극장 관계자의 이목을 피하여 보온병에 담아 온 술을 한 모금 들이키고 무대에 나가는 것에 놀란 적이 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했다. 상황에 따라 춤의 길이, 복식, 북 장단의 유무도 다르지만 출 때마다 다른 즉흥적 감흥을 가지고 있는 그의 춤 비밀의 귀퉁이를 훔쳐보았다고 할까. 어찌 비단 이매방뿐이랴. 대부분의 한국춤 고수들은 즉흥춤 대가들이었다.
오늘날 전세계에서 보편적으로 행해지는, 서양에서 발전된 즉흥춤은 재즈 음악과 일맥 상통하는 점이 있다. 재즈 음악이 백인 주류와 동떨어진 흑인들을 중심으로 발전했듯이 즉흥춤도 자의적으로나 타의적으로 주류 무대에서 제외된 1960년대 미국 뉴욕의 저드슨교회에서 탄생한 포스트 모던 댄스의 주자들에 의해서 확산되었다. 그들은 ‘누구나 춤출 수 있다’와 ‘어떤 움직임이든 춤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던 이들이며 기교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현대무용을 해방시키고 또 다른 탈출구를 제시하였다.
한국의 현대무용도 완고한 그레이엄 테크닉 기교의 감옥을 오랫동안 견뎌왔다. 나는 어쩌면 즉흥춤이 이 딜레마를 극복하고 그동안 현대무용이 다하지 못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아직도 그 기대는 유효하다. 발레의 기교에 반발하여 나온 현대무용이 이 땅에서 어찌하여 또 다른 기교의 늪에 빠지게 되었는지. 남과 다른 개성과 자유로운 상상력을 추구하는 현대무용이 어찌하여 정신을 뒷전으로 하고 기교에 매달리게 되었는지. 어찌하여 창의성이 이토록 낯선 것이 되었는지. 같은 시대를 거친 공범자로서 자책을 하면서 약간의 분노를 동반한 진단을 해보자.
1. 교육에서 정신보다는 기교에 가치를 두지 않았나?
2. 현대무용을 전공하는 학생이라도 자유로운 사고를 하게 되면 내심 통제가 힘들다고 생각하지 않았나?
3. 뭉치면 살고 헤어지면 죽는다는 분위기로 남과 다른 개성을 가지면 획일주의 사회적 문화환경에서 살아남기 힘든 환경을 만들지 않았는지.
즉흥을 가르치다 보면 개인이 가진 고유함, 개성, 창의력이 드러나는 것을 보게 된다. 버릇없는 아이, 엉뚱한 아이, 산만한 아이, 주눅 들린 아이, 고집불통인 아이가 남과 다른 자기 소리를 낼 수도 있는 시간이다. 자신의 이성으로 주체적 선택을 하고 상황에 대응하는 즉흥춤을 경험하고 나면 자기 스스로를 진지하게 탐구함과 동시에 함께하는 타인을 배려하고 준중하는 태도를 서서히 갖추게 된다. 즉, 춤을 통해 삶의 가치관을 재정립하게도 된다.
즉흥춤은 안무를 위한 도구로 많이 사용된다. 최근에 와서 안무가는 무용수에게 상황을 제시하고 자신이 원하는 어떤 것이 나올 때까지 기다린다. 따라서 좋은 무용수는 그 주어진 상황에서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움직임을 찾아낸다. 이 작업은 골치 아픈 리서치가 될 수도 있지만 ‘또 하나의 나’를 만나는 작업이기에 제대로 발을 들여놓으면 이 놀라운 자기 탐험을 계속하고 싶어지게 된다. 즉흥 기법을 통하여 나온 움직임들은 안무가의 개성적 연출 감각을 거쳐 안무의 독특한 재료가 되고 그리하여 창의적인 무용수는 안무가와 종래의 수직관계와는 다른 수평관계로서 함께 작품을 만드는 공동투자자로 변신하게 된다.
모던 댄스에서는 기교가 능숙한 무용수가 인기가 있었다면 컨템퍼러리 댄스에 와서는 예술적인 동반자로서의 창의성이 있는 무용수가 우선이 되는데 창의성에 접근하기 위한 바람직한 도구가 바로 즉흥기법이라 하겠다.
ⓒ남정호 |
즉흥춤이 공연 자체로 행하여질 때는 적절한 연출 및 작전이 필요하다. 즉흥춤은 몸이 가는대로 마음대로 추는 춤이 아니라 매 순간의 공간, 시간, 움직임 그리고 파트너와의 관계를 고려해야 하는 실시간 구성(realtime composition)이며 현장에서 완성되는 이 춤은 스튜디오 같은 열린 공간이나 야외에서 이루어질 때 재래극장공연과는 다른 생명력을 갖는다.
혹자는 즉흥춤을 막춤으로 취급한다. 막춤은 막말처럼 타인을 배려하지 않고 아무렇게나 흔드는 몸짓이라고 할까. 아마 실컷 욕을 해대고 나면 울분이 풀리듯이 막춤을 추고 나면 속이 후련할 수도 있으니 막춤은 스트레스 해소나 치료용으로는 적절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보는 이가 있는 곳에서 자기 존재의 고귀함을 지키려는 이라면 그 방법 외에도 수많은 다른 방법이 있다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
ⓒ남정호 |
즉흥을 통하여 자신을 발견한다.
즉흥을 통하여 자신의 움직임을 모색한다.
즉흥을 통하여 공간과 시간, 그리고 관객과 교감한다.
즉흥춤을 추면서 무거운 것을 가벼움으로 고통을 기쁨으로 전환시킨다.
ⓒ남정호 |
24년전 서울에서 시작한 국제즉흥춤축제가 제주에서도 9년째 개최되고 있다. 자연생태계의 신비함과 돌 자원의 기묘함, 자연이 뿜어내는 영적인 분위기로 가득 찬 제주도 돌문화공원의 놀라운 경관에서 세계 곳곳에서 모인 춤꾼들과 국내의 무용가들. 일반인들이 즉흥춤을 춘다. 프로와 아마추어가 자연 앞에서 대등한 한 인간으로 공존하는 춤판은 국내에서는 아마 여기밖에 없을 것이다. 이곳이 아니면 볼 수 없는 춤.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춤.
제주, 돌과 바람과 여자라고? 돌과 바람과 대화하는 춤이 여기에 있다.
전 국립현대무용단 예술감독.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