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지원서를 준비하는 당신에게
정옥희_춤비평가

춤계에서 겨울은 지원서 쓰기의 계절입니다. 연구자와 창작자 모두 내년도 지원사업에 접수할 지원서를 쓰느라 골머리를 앓습니다. 글쓰기는 연구자의 영역이라 여겨지지만 예술 활동을 지속하기 위해 공공지원금에 의존해야 하는 창작자에게도 글쓰기가 중요합니다.

창작자의 지원서 쓰기는 연구자의 지원서 쓰기에 비해 훨씬 힘듭니다. 샘플이 없기 때문입니다. 연구자가 쓰는 논문, 혹은 논문 프로포절은 시중에서 해설서나 강의 자료를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연구 소재를 찾는 법부터 참고문헌 작성까지 세세하게 설명하고 다양한 예시를 보여줍니다. 하지만 창작 지원서는 이러한 샘플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 이유는 논문만큼 엄격한 형식성이 요구되지 않는 데다 작품이나 사업마다 작성 내용이 매우 달라서 하나의 틀에 끼워 맞출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여러 번 지원금을 받은 예술가라 해도 자신의 지원서를 공개하지 않는 분위기이니 신진 예술가로선 더욱 막막합니다.

예술 활동에서 지원서의 중요성이 날로 커지지만 자료는 턱없이 부족한 상황에서 창작자는 막막하고 위축된 나머지 타인에게 위탁하기도 합니다. 최근엔 지원서를 대신 써주는 전문 인력의 존재가 공공연해졌습니다. 하지만 타인이 써준 지원서는 자신의 작업을 담아내는 데 한계가 있습니다. 지원서를 앞에 두고 머리를 싸매고 있을 당신에게, 역시나 이런 저런 지원서를 쓰는 제가 감히 소소한 팁을 드리고자 합니다.

지원서 쓰기의 궁극적 목표는 선정입니다. 그렇다면 평가 기준부터 살펴보아야 합니다. 주요 지원사업의 평가 기준을 살펴보면 작품성-사업 계획의 타당성-기대효과(한국문화예술위원회 공연예술창작산실 올해의 신작), 우수성-구체성과 실현가능성-예술계/관람자 대상 기대효과-발전 가능성-예술적 역량(서울문화재단 예술활동지원사업) 등으로 구성됩니다. 평가 항목 구성과 비율이 기관 및 사업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다음과 같이 구조화할 수 있습니다.




 



평가 요소는 크게 본 작품과 기존 활동으로 나뉘고 본 작품은 작품 내적 요소와 외적 요소로 나뉩니다. 내적 요소는 시놉시스/컨셉, 연출, 안무, 무대 디자인, 음악 등 작품의 내적 요소를 전반적으로 평가합니다. 예술성이 작품의 내적 완성도나 미적 가치에 초점을 둔다면 차별성과 독창성은 작품이 예술의 흐름 속에 어떻게 위치 지우며 자신의 기존 작업 및 예술계의 관행과 어떻게 차별화되는지 외적 타당성에 초점을 둡니다.

작품의 외적 요소는 구체성, 타당성/실현가능성, 기대효과로 나눠집니다. 구체성은 작품을 구현해가는 과정, 절차, 인력, 예산, 일정 등이 구체적으로 계획되었는지 살피고, 타당성/실현가능성은 예산이나 제작, 무대 운용 등이 적절하고도 무리 없이 성사될 수 있는지 살핍니다. 기대효과는 이 작품이 예술계나 대중에게 미칠 영향과 가치를 봅니다.

이것만으로도 종합적인 평가라 하겠으나 최근엔 지원자의 기존 활동을 평가요소로 포함하여 더욱 다각화되었습니다. 신인에서 벗어난 창작자라면 그의 기존 작업이 어떠했는지, 이번 작품이 기존 작업 및 앞으로의 활동에서 어떤 의미와 역할을 하는지 고려합니다. 영상물이나 인터뷰, 실연 심사를 통해 지원서 기반 심사의 한계점을 보완하여 보다 종합적인 평가가 이루어지는 추세입니다.

결국 지원서는 글쓰기로만 평가되지 않습니다. 혹자는 지원서 쓰기에 지친 나머지 ‘글재주가 작품이랑 무슨 상관이냐’고 불평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평가는 지원서를 기반으로 하되 글쓰기 너머의 요소를 복합적으로 고려합니다. 달리 말해 창작자는 작품과 관련된 수많은 요소들을 글로 녹여내야 합니다. 여기서 지원서라는 글의 독특한 성질이 드러납니다.

지원서는 예측이자 번역입니다. 글 자체가 결과물인 논문과는 달리 지원서는 종이 위에서 춤을 상상해야 하는 매개적 작업입니다. 창작자는 지원서에서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작품을 예측하고 퍼포먼스를 문자로 번역해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창작자가 무엇을, 어떻게, 왜 할 것인지 설득하는 것입니다. 이번 작업이 어떤 모습이고, 어떤 예산적, 기술적, 작업적 과정을 거쳐 완성되며, 왜 공공기금의 지원받을 가치가 있는지 증명해야 합니다. 평가자는 창작자가 어떤 관점을 지녔으며 어떻게 구현할 것인지 듣고 싶어 합니다. 미래를 상상하며 설득을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논문 프로포절과 상통합니다.

지원서가 글재주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지만 평가자를 설득하려면 자신의 의도를 명확히 담아내는 글쓰기 실력이 중요합니다. 글쓰기에 도움 되는 몇 가지 원칙들을 제언하고자 합니다.

첫째, 문장을 짧게 쓰세요. 글자가 빽빽한 지원서가 성의 있게 보인다는 것은 수긍하지만 실제 문장을 읽어보면 불필요한 글자로 가득합니다. 중언부언 길게 늘어놓지 말고 핵심을 바로 말하세요. 문장에서 필러(filler)와 클리셰(cliché)를 지우는 훈련을 하세요. 저는 의미값 없이 자리만 채우는 단어를 필러라고 부르는데요, 불필요한 단어는 한 글자라도 지울수록 가독성이 높아집니다. 어디서 들어본 듯한 표현들도 지우세요. 여러 지원서에서 반복되는 클리셰들은 의미값이 낮을 뿐 아니라 창작자의 관점을 읽어내는 데 방해가 됩니다.

둘째, 문장을 쉽게 쓰세요. 뭔가 중요하게 보여야 한다는 생각에 한자어를 늘어놓으면 잘 들어오지 않습니다. 멋진 개념을 빌려와 지원서를 꾸미지 마세요. 동시대 예술에서 개념적인 작업이 중요하지만 충분히 소화되지 않은 개념들을 이리저리 붙이면 역효과가 납니다. 온갖 개념이 떠들게 놔두지 마시고 자신의 목소리로 끌고 가세요.

셋째, 작품 내용과 작품 의도를 구분하세요. 작품 내용은 작품을 충실히 설명해야 합니다. 시놉시스로 채워지는 경우가 많은데 문학적, 시청각적 요소 등 다양한 장치를 활용해 각 장면을 구체적으로 묘사할 수 있습니다. 작품 의도는 작품에서 빠져나와 외부에서 논해야 합니다. 작품 내용에서 묘사한 결과물이 어떤 의도에서 출발했고 어떤 의의가 있는지 설득해야 합니다. 작품 내용이 상징적이고 문학적인 언어로 서술된다면 작품 의도는 논리적이고 분석적인 언어, 혹은 개인적이고 성찰적인 언어로 서술될 수 있습니다.

넷째, 자신의 작품을 예술계의 전통이나 동시대적 담론에서 맥락화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작품에 대해 예측하고 평가하는 데 한계가 있기에 이 작품이 어떤 흐름 속에, 혹은 어떤 관습과 전통을 성찰하여 이야기하는지 설득해야 합니다. 논문이 무수한 선행 연구 위에 돌멩이 하나를 올려놓는 작업이듯 춤 작품 역시 예술계의 길고 복잡한 흐름 속에 물줄기를 하나 내는 작업입니다. 자신의 작업이 어디에 위치하며 어떻게 차별화되는지 말할 수 있다면 강렬한 설득이 됩니다.

다섯째, 경력이 쌓인 예술가일수록 작업의 연속성을 의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부분에선 저도 부끄럽습니다만 작업마다 유행하는 소재를 따라 이리저리 옮겨 다니기보다는 관점의 일관성이나 흐름을 유지하며 꾸준히 이어가는 방식이 유리합니다. 예술가는 늘 새로움을 추구하고 개인적인 경험이나 상황에 따라 소재가 바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기저에 흐르는 관점을 긴 호흡으로 끌고나가며 작품세계(oeuvres)를 쌓아갈수록 설득력이 높아집니다.

결국 좋은 지원서를 쓰려면 좋은 창작자가 되어야 합니다. 좋은 창작자는 많이 보고, 많이 생각하고, 많이 실행하며 성장하겠지요. 지원서 쓰기를 글재주 부리기로 취급해선 안 됩니다. 글쓰기를 생각의 도구, 발견의 도구, 성찰의 도구로 삼아 자신의 작업을 벼리는 과정으로 활용하세요. 자기 작업을 글을 통해 설득하는 행위는 작업의 질을 높여주고, 작업의 질이 높아지면 글도 명료해집니다.

마지막으로, 지치지 마세요.

정옥희

춤 연구자 및 비평가. 이화여자대학교 무용학과에서 학사와 석사 학위를, 미국 템플대학교에서 무용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유니버설발레단과 중국 광저우시립발레단의 정단원으로 활동했다. 현재 Dance Chronicle 자문위원이며 이화여자대학교 무용학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대표 저서로 『진화하는 발레클래스』(2022), 『이 춤의 운명은: 살아남은 작품들의 생애사』(2020)가 있다.

2025. 2.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