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남정호의 춤 산책 16
강미희를 그린다
남정호_안무가

일흔을 넘기니 주위에서 죽음 소식이 자주 들리지만 제자의 경우는 강미희가 처음이다.한 달이 지났는데도 문득문득 너의 눈망울이 나를 쳐다보고 있구나. 마지막 통화에서 일본에 가고 싶다고 보채던 그 목소리가 아직도 들리고. 아이 먼저 보낸 어미의 심정을 이제야 알 것 같기도 하고, 왜 이리 안타까운지.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러니까 너를 처음 만난 그때로, 40년 전으로 돌아가 보는 것 외에 다른 방도가 없다.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지만 선생이라기엔 많이 미숙한 내가 당시에 부산에서 만난 학생들은 대부분 나보다 어른스러웠는데 그중에서 미희가 있었구나. 입학식을 치루고 나서 어릴 적부터 한국춤을 추었다는 너가 현대춤을 전공으로 하겠다고 찾아 온 기억이 난다. 당시 현대춤이 생소하던 부산에서는 발레나 한국춤을 연마하다가 자의반 타의반으로 새로 생긴 현대춤이라는 장르를 전공으로 택하여 오는 아이들이 드믈게 있었는데 대부분 신체 조건이나 기질적으로 발레나 한국춤에는 어울리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 납득을 하고 있었어.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처음부터 현대춤을 지망한 아이들보다 이런 고민을 거치고 온 아이들이 더 반가웠단다. 솔직히 말하자면 발레를 신봉하다 현대춤으로 방향을 튼 나의 분신을 보는 듯했어. 더 공감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꽤 확신에 찬 말도 해 줄 수 있었고. 하기야 40명 정원에 현대춤 전공이 두세 명이면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지.

너는 꽤 큰 얼굴을 가날프고 기다란 목 위에 얹고 있어 가끔 안쓰럽게 보이기도 했단다. 그러나 한 걸음 물러서서 자세히 보면 잘 발달된 어깨 골격으로부터 길게 뻗어 나간 섬세한 팔이 있었고 목만큼이나 가늘고 기다란 허리의 뿌리와 같은 엉덩이 아래로 땅을 단단하게 밟는 튼튼한 다리를 가지고 있었어. 처음에는 너가 몸을 쓰는 방법이 다른 아이들과 다른 것은 신체적 상황이나 그간의 춤 수련이 다른 아이들과 다르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했는데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그 생각을 수정하게 되었지. 어디에 있어도 같은 동작을 하여도 다른 이들과 다른 호흡을 하는 말하자면 너는 기본기를 무시해도 상관없는 개성이 남달랐고 그것이 대견하여 나는 은근 내버려두는 쪽을 택하기도 했단다. 일찍부터 너는 다른 아이들처럼, 아니면 선생인 나처럼 움직이는 대신에 가장 너답게 신체를 움직이는 학생이었고 획일적 미모가 기승을 부리는 한국 사회에서 표준형 체격이 아니라는 이유로 조금도 주눅들지 않고 타고 난 신체의 모든 부분에 가치를 부여하면서 움직였지. 춤을 추었지.

신입생인 너가 바로 투입된 작품이 〈비밀의 뜰〉이었는데 점차로 너는 함께 하는 선배들을 압도하는 존재감을 드러내었어. 그것은 아마 오랜 동안 관객 앞에서 춤을 추어 온 이들만이 가진 여유와 자신감 그리고 남다른 진지함이라고 생각해. 사실 춤 경력으로 보면 다섯살 때부터 춤 춘 너가 가장 선배였을 수도. 연습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서도 그 작품과 함께 있었다는 것을 다음 연습 때 보여 주곤 했었지. 당시 내가 되뇌던 ‘연습은 공연처럼, 공연은 연습처럼’을 잘 실천해주었는데 때로는 지나친 열정을 쏟아내어 나를 긴장시키기도 했었지.

그 다음 작품 〈도시 이야기〉를 만드는 중에 작품에 관한 질문을 하는 무용수가 바로 너였구나. 대화를 하지 않고 순서를 나가는 것이 불문율이었던 연습 과정이 너로 인하여 바뀌었나. 당시 너는 경성대 교정에서 무용과 근처에 있는 회화과 학생들과 친구가 되어 어울리면서 또다른 예술작업의 현장을 발견하고 그것을 너가 하고 있는 춤과 대비시켜서 들여다보기 시작했어. 다른 아이들이 학생대표나 선배나 조교를 통하여 보내는 메시지를 직접 내밀었고 또래의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좀 더 근본적인 삶과 예술에 관심을 두고 그런 과정에서 얻는 질문과 자신의 변화를 곧잘 드러내었는데 나는 그런 너를 골드몬트를 보는 나르치스처럼 기꺼워했단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학교연습이 마치면 부모님이 계시는 집으로 돌아가는데 충무에서 부산으로 유학 온 너의 혼자 숙소가 궁금하기도 하고 걱정이 되었는데 이런 오지랍을 부린 내가 받은 충격을 잊지 못하겠구나. 학교 근처의 오래된 빌라의 꽤 넓은 지하공간을 빌려 베니아 합판을 깔고 있었어, 한 모퉁이에 칸막이 커튼을 치고 메트리스 놓고 잘 거라고 했지. 겨우 대학 2년생 여자 아이가 자기 연습실을 가진다고? 당시 옆에 있었던 미술전공 학생들과 교류하며 그런 발상을 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되었는데 생활에서 춤을 일 순위로 두는 너의 순수한 용기와 정열, 배짱이 염려는커녕 참으로 부러웠단다.

창무춤터와 바탕골 소극장서 펼쳤던 〈풍선심장〉이 생각나는구나. 웬일인지 원형 탈모증이 생겼다고 해서 감추지 말고 두피가 공기를 만나게 하라는 조언을 했더니 다음날에 정성스럽게 기르던 긴 머리를 몽땅 자른 숏커트를 하고 연습실에 나타났구나. 선생이라는 처지에 학생들에게 여러 조언을 하지만 그렇게 빨리 아무 망설임 없이 실천해주는 학생을 만나 기분이 좋았단다. 이 작품을 하면서 나는 너가 진작 무용수로서뿐만 아니라 안무자로서의 촉을 세우며 호기심있게 나의 작업과정을 훔쳐보고 있다는 것도 눈치채었지.

그리고 〈아이야 저 산너머에 무엇이〉도 함께 하였구나. 이 작품은 서울 문예회관(지금의 아르코대극장)에서 한 후에 작년에 작고한 김민기씨의 학전소극장에서도 초청공연을 했었지. 조항애 선생을 비롯하여 대선배인 이은규, 김현숙, 그리고 기량이 뛰어났던 조미옥, 김남진, 강희정과 함께 연습하면서 너는 좀 기가 죽은 듯했어. 사실 그 작품은 너의 기질과는 별로 어울리지 않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하는 즐거움을 깨닫는 시간이 아니었을까.

내가 너의 인생에 가장 크게 개입한 것은 졸업한 너를 친분이 있던 일본인 부토무용가 다나카 민에게 소개한 것이었나. 그리고 그 마이주쿠컴퍼니에서 단번에 수년간 주역을 하던 무용수와 듀엣을 한다고 자랑했었지. 그래, 얼마전에 빔 벤더스가 일본인 배우들과 만든 영화 〈Perfect Days〉에서 공원에서 춤추는 홈리스 역을 대수롭지 않게 해내는 다나카 민을 보며 너를 생각했구나. 진득하게 좀 버티고 있었음 좋으련만 2년 후에 바로 돌아왔구나. 그래도 타고난 진지함이나 흡습력을 간주하면 다른 이들 보다는 일본 시골 학슈에서의 생활과 춤의 진수를 몇배로 경험하였을 것을 의심하지 않아. 안무를 하고 싶어 돌아왔다고? 돌아온 후에 바로 만든 작품을 보면서 사실 그동안 섭취한 것이 놀라울 정도로 풍요로웠다는 것을 확인했지. 아니 잠재된 창의력에 대한 확신을 할 수 있었던 시기였을 거야. 베낀 것이 많다고? ‘유능한 예술가는 모방하고 위대한 예술가는 훔친다’고 오스카 와일드가 말했던가. 그후 본격적 춤작가로서의 길을 걸으며 작업하면서 때로는 건방을 떠는 너가 밉지 않았고 내심 자랑스러웠는데.

내가 서울로 옮긴 후에 생계를 위해 교직을 택해야 한다는 너의 소식에 수긍하면서도 반감을 가진 것도 숨기고 싶지 않구나. 나도 교직에 있으면서 너는 순전한 예술가가 되길 은근히 바란것 같아. 모순덩어리!

오년 정도 부산브니엘 예술고등학교서 가르치다가 드디어 나와서 너는 본격적인 독립무용가의 길을 걸었지. 미야아트댄스컴퍼니를 창단하고 자유로운 춤, 치유의 춤을 앞세우고 개성이 선명하고 사유가 깊으며 질문이 날카로운 작품을 남겨 중요한 춤작가로 꼽혔다고 평가받았구나.

그리고 학교 현장에서의 경험으로 일반인들에게 그리고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에게 움직임을 통하여 치유할 수 있는 춤 교육프로그램을 수행하는 수업교재, ‘일상의 몸과 소통하기’를 참으로 훌륭하게 만들어 나에게 내밀었지. 사실 그 책은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책! 한동안 너는 마치 홀린 것처럼 몸짓프로그램을 전파하고 즉흥춤 프로그램으로 성폭력, 가정폭력, 학교폭력 등의 피해자는 물론 보호관찰소에서 교육명령을 받은 성폭력 가해 남성들까지 만나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동작치유, 춤치유에 적극 나섰구나.

미희야, 우리는 겨우 12살 나이 차이 나는 띠동갑이었어. 작가로서, 무용교육자로서 너는 나보다 더 항상 위를 보고 있었지. 이상주의자! 나는 너를 더 칭찬 했어야 했어. 그리고 이런 학생을 나에게 보내어 준 신에게 더 감사도 드려야 했고.

내킨 김에 뒤늦게라도 나르치스가 골드몬트에게 한 말을 읊고 싶구나. ‘우리가 사는 세상이 대체 왜 이 모양인가. 이게 지옥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화나고 혐오스런 세상이 아닌가. 하긴 그래 이 세상은 그럴 수밖에 없어. 아 모든것이 흔적도 없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다. 모든 인간 모든 사물이 그렇게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순식간에 꽃처럼 피어났다가 어느새 시들어 버리고 그리고 그 위로 눈이 내린다. 인간은 사라질 존재이고 변화하는 존재이고 가능성의 존재지. 우리 인간에게는 완전함도 완벽한 존재도 있을 수 없어. 그렇지만 잠재적인 것이 실현되고 가능성이 현실로 바뀔 때 우리는 참된 존재에 더 가까이 가는 셈이지. 그것이 곧 자아실현이라 할 수 있겠지’.

천상에서도 춤을 추고 있을 미희야. 조만간 만나 함께 손잡고 춤추자구나. 그때는 너가 선생 역할을 하려무나.

남정호

전 국립현대무용단 예술감독.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명예교수​ ​​​​​​​​​​​​

2025. 5.
*춤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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