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죽음 소식이 빈번한 터이지만 조숙자 선생님의 부고 소식은 나를 꽤 오래 우울하게 했다.
가을 단풍이 절정인 2025년 11월 14일 금요일이다. 밤 11시가 다 되어서 온 전화는 기쁜 소식보다 불길한 소식일 가능성이 높다. 전화기에 떠오른 보낸 이의 이름을 본 순간 그 예감은 적중했다. 주무시다 가셨다고.
공적으로는 1929년생이지만 실제로는 1928년생인 선생님과 나는 같은 용띠. 아침에 눈뜨면 보는 ‘오늘의 운세’의 애독자^^인 나의 입장에서 선생님과 나는 같은 기운을 타고 태어나서 살아 왔다고 마음대로 생각하면서 퍼즐을 맞추고 싶다.
내가 무용의 길을 선택한 것은 조숙자 선생님의 한마디 ‘너 무용 잘하게 생겼구나’.
기다리던 말이었다. 1966년 가을. 중학교 2학년이 되어 그동안 재미붙인 펜싱을 그만두게 되어 저녁시간만 되면 몸이 근질거리던 차에 친구를 따라 간 부산 서면에 위치한 조예경무용학원. 그전에 단체로 부산 동보극장에서 본 조예경무용발표회가 난생 처음 본 발레공연인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 무대를 그리워하게 되었고 어쩐지 내 마음 깊은 곳에 숨어 있던 잃어버린 고향을 만난 듯 친근하였다. 환한 조명 아래서 아름다운 음악에 맞추어 춤추는 그곳은 내가 사는 구질구질한 이곳과는 다른 세상이다.
그런 춤을 추는 세상에 들어갈 수 있다면 하기 싫은 공부쯤이야 참을 수 있다!
‘야녀’라는 작품에서 주역으로 춤추던 여인의 카리스마. 누가 무어라고 한들 아마 이 존재감이 내가 무대에 설 때마다 환기하게 되는 힘이다. 당시 38세였던 조숙자선생님.
경성대를 졸업하고 미국 일리노이 대학서 공부한 조영미가 부산에 정착하여 ‘문화와 예술 다다’라는 이름을 걸고 2022년 부산 문화예술아카이빙의 프로젝트로 김석출(전통), 송혜수(미술), 조숙자(무용)를 조사 연구한 자료를 참고하면서 선생님을 다시 불러 모셔볼까나.
선생님은1928년 부산 사하구 장림동에서 태어나 한의원을 하시던 부친을 따라 만주로 이주하셨다.
8세 때 당시에는 요시코라는 일본 이름을 가지고 있었고 화원재만초등학교 무용부에서 당시 12세에 다카시마 테루오라는 선생에게서 신무용을 배우고 학예회 때에는 ‘바다의 리듬’, ‘달의 사막’, ‘황성의 달’ 등 당시 일본의 유행가에 동작을 입힌 아동무용을 했다. 11세때 최승희, 조택원의 만주공연을 보고 크게 감명을 받아 최승희의 보살춤 사진을 구입하여 오랫동안 보관하기도 하였다고. 1942년 14세에는 만주 영구여학교에 입학하고 그곳에서 일본여자단기체육대학 출신의 교사에게 뽑혀 동급생들을 지도하기도 했다니 그때부터 무용에 대한 열정과 재능이 남달랐다고 짐작된다.
전쟁이 끝난 1945년 졸업을 하였고 그다음 해에 가족이 부산으로 귀향하였다. 패전 후에 만주에 있던 사람들이 귀향하면서 겪었을 것 같은 고생에 관한 이야기는 선생님께 들은 적이 없다. 지난 시절에 대한 사연을 늘어놓을 여유없이 앞으로의 일에 더 비중을 두던 선생님이었던가.
귀향 후 결혼하여 첫 아이를 키우면서 서점을 운영하기도 하고 잠시 부산진국민학교에서 교직생활도 하였는데 무용에 대한 열정을 잊을 수 없어 당시 부산에 있던 박성옥(최승희무용단 전 음악감독)의 ‘대한음악무용연구소’에서 3년 정도 한국무용을 배웠다. 그렇다. 내가 학원을 다닐 때 일주일에 한번은 한국무용수업이 있었고 선생님이 직접 지도를 하셨다.
당시에 선생님은 이미 발레분야의 전문가로 알려졌던 시절인데도 본인의 학원에서 일주일에 한번이나마 한국무용을 가르친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지금도 기억한다. 장구채를 들고 장단을 두드리던 선생님. 나중에 자료를 통하여 알았지만 ‘박성옥 제1회 대한무용음악연구소 신작발표회에서 〈고독〉이라는 제목이 붙은 솔로를 추어 당시 강이문 무용평론가로부터 ‘기품이 있는 자세’라는 평가를 받았고 부산무용협회 제1회 공연에서는 박성옥에게 사사받은 산조춤외 다수 작품에도 출연하였다고 한다.
덕분에 나는 처음부터 발레와 한국무용을 수련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아마 매주 수요일. 그날은 타이츠 위에 긴 치마를 걸치고 치마자락이 흩날리는 감각을 즐기면서 편안하게 몸을 움직일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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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숙자무용학원생 시절 |
사실 말이지 이 춤은 발레보다는 몇배나 수월하고 멋있으면서도 나를 황홀하게 하여 더 많이 제대로 배우고 싶은 마음에 한국무용연구소를 찾아가 본 적도 있었다는 것을 이제야 고백한다.
아마 나는 처음부터 본능적으로 발레리나가 될 수 없는 것을 알아챘는지 모른다. 발레리나 정보는 있는 대로 끌어 모으고 동경하였지만 내가 가지고 태어난 작은 체구와 납작한 얼굴은 내가 수집한 사진들의 주인공들과는 너무 달랐다. 거리가 멀었다. 학교에서 영어, 불어를 가르치는 서양 수녀님들과 비교하여도 발레는 그들의 것이고 나는 평생 그들의 흉내만 내는 신세가 될지도 모른다. 그런데 큰 맘먹고 찾아 가서 상담한 한국무용학원에서 남자 선생님의 짙은 화장과 여성스러운 제스추어 그리고 꽤 상당한 수업료에 질겁을 하고 포기하였지. 이미 화살은 발레로 당겨져 버렸다.
미래의 무용가가 될 학원생들에게 자신의 뿌리를 잊지 않게 해주고 싶어서였었나 아니면 학원인가를 낼 때 기재한 종목을 따라야 하기 때문이었나. 그건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 어쨌든 나는 그 상황의 수혜자였잖아. 그나마 대학 입시 때 부전공으로 한국무용을 택할 수 있었던 것은 조숙자무용학원의 정규적인 한국무용 수련과정을 제대로 거쳤기 때문이라 확신한다.
몇 아이들은 노골적으로 한국무용 수업을 하는 수요일에는 결석하기도 했는데 이상하게도 엄격한 선생님이지만 야단치지는 않으셨다. 어느 비오는 수요일 날 두세명만 출석하게 되었는데 수업을 좀 빨리 마치고 이층에 있는 선생님의 거처에 처음으로 초대받아 맛있는 과자를 대접받은 기억이 나는구나. 항상 아래 위 검정타이츠를 입고 그위에 검정색 얇은 천으로 된 짧은 치마를 두르고 수업을 하신 선생님처럼 검소하면서도 깔끔한 집안 내부가 떠오른다. 치맛바람이 쎈 풍토에서 등록금만 간신히 낼 수 있는 처지였던 나는 그냥 선생님과 가까운 거리에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족했고 그런 마음이 전해졌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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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대학교 신입교수 환영 경주연찬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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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정호 에세이 게재 3 경성대학교 무용과 사은회 |
대학 시절 방학 때 부산으로 내려 와서 전공을 현대무용으로 바꾸었다고 말씀을 드렸지. 발레를 생명처럼 생각하시는 선생님께 내가 생각하고 있는 발레 장르의 한계에 대하여 설명하기가 거북하고 힘들어 다른 핑계를 대었는데 수긍하시는 것 같았지만 그다지 밝은 반응을 보이시지는 않으셨어.
선생님은 일본에서 제대로 발레를 배우고 귀국한 임성남씨의 서울 낙원동연구소에서 서울-부산을 오가며 본격적으로 발레를 연마하기 시작하였다. 54년부터 2년간 매주 다녔다고 하니 내가 대학졸업 후에 부산서 고교무용교사로 있으면서 서울로 대학원을 다닌 것과 빼박았다. 그러고 보니 당시의 연령도 흡사하구나. 선생님이 밟으신 ‘사서하는 고생’ 같은 전적(前跡)을 나도 수행한 것을 어찌 설명할까.
1957년 본인의 이름을 내걸고 학원을 운영하여 드디어 텃세 있던 부산무용가 협회의 회원으로 등록하여 본격적인 발레전문무용가로서 활동을 시작한다. 1966년 이후는 거의 매년 ‘발레공연’이라는 타이틀을 내걸고 개인 무용발표회를 열어 부산을 중심으로 한 경상도 지방에서 거의 독보적인 발레무용가로 왕성한 활동을 하셨다.
부산대 영문과 교수로 재직했던 부군의 영향일 수도 있겠지만 선생님은 대학교원의 길을 준비하면서 만주에서 취득한 고등학교 졸업장밖에 없는 자신의 학력을 점차 보충하기 시작하셨다.
1963년에 한성여자실업초급대학 유아교육과에서 강사로 무용을 가르치면서 동시에 체육무용과에 학생으로 입학을 하였고 65년에 졸업하였다. 그후 초급대학 학위를 만회하기 위하여 74년에는 동아대학교 체육학과에 편입하고 같은 대학원을 거쳐 79년에 동아대학교 체육대학 무용전공으로 졸업한다. 16년에 걸쳐 드디어 당시 국내 교육부(문교부)가 요구하는 정식으로 대학교원에 응모할 자격이 있는 석사학위까지 취득한 것이다. 학위를 따지는 세태에서 어느 과정하나 생략하지 않고 선생님이 거쳐야 했던 교육계의 형식적 환경에 대해서는 송구하기만 하다. 참고로 같은 시기에 박외선 선생님은 일본문화학원 학위만으로 이화여자대학교 교수가 되었으니 개화여성인 김활란총장을 만난 행운이었나.
2년제인 한성여자실업초급대학은 4년제인 산업대학으로 변신하고 그후 종합대학교로 탈바꿈하여 경성대학교로 이름을 바꾸고 체재가 개편되어 예술대학 안에 무용과가 위치하게 되었다. 드디어 선생님은 명실공히 부산에서 독보적인 발레 교육자로 자리를 굳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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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숙자 부산발레단 창단기념 |
내가 선생님을 다시 만난 것은 프랑스 유학 후에 인사차 잠시 들른 자리에서였다. 당시에 국내에서 취직할 준비 따위는 하지 않고 엉거주춤하게 돌아온 나를 받아 준 유일한 분이 조숙자 선생님이다. 이 분으로 인하여 나의 대학교수 이력이 시작되었다.
버지니아 울프가 말했던가. 여자가 창작을 하려면 경제력과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한다고. 월급과 연구실이 제공되고 연습실도 사용할 수 있는 멋진 신세계를 선생님이 나에게 주셨다. 작고한 조동화 선생님이 농담같이 말씀하셨다. ‘대학교수 자리 얻으려고 007가방에 현금을 가득 갖고 다니는 사람도 많다는데 어찌 가난한 유학생이었던 남정호가 대학교수가 되었으니, 아직 한국 사회가 괜찮은가 봅니다.’
학교의 발달변천 과정에서 선생님은 부군의 힘까지 빌려 고군분투하였다고 나중에 듣게 되었다. 그런데 선생님은 그렇게 힘들게 일구어 놓은 학교에서 15년 근속상을 받으신 다음 해에 부산대학교 무용과로 거처를 옮기셨다. 그 전날 통고를 받고 나는 아연실색했지만 어느 정도 수긍할 수 있었다. 그동안 나에게 설명하지 않은 고초가 있었다는 것을 감지했지만 모르는 척했다. 많이 힘드셨을 것이다. 혹시 제자였지만 동료가 된 철없는 나로 인하여는 마음고생이 없으셨을까. 처음으로 그 앞에서 무릎 꿇고 눈물을 흘리게 되었고 선생님은 나를 얼싸안아 주셨다.
빈말하지 않으시고 본인이 한 약속을 꼭 지키고 매사에 진지하신 분이었다. 춤을 신앙으로 여기고 춤에 임할 때는 엄숙한 가운데 희열을 느끼는 자세가 조금은 전수되었답니다.
사실 그동안 옆에서 지켜 본 동료로서 어쩌면 독단적으로 보일 수도 있던 선생님이 하신 결정들은 위화감이 없었다. 구질구질한 설명없이 심사숙고한 후에 책임지고 그리고 마지막에는 본능을 따르는 듯한 그 단호한 결정은 공과 사가 분명한 이기적이지 않은 어른이 하는 신뢰할 수 있는 판단이었기에…
학교에 매일 아침 출근하여 저녁까지 때로는 밤까지 머물면서 무용과를 지키셨던 선생님에게 있어서 81년부터 92년까지 방학 때마다 도쿄시티발레단에 연수를 하러가는 프로젝트는 아마 본인이 자신에게 선물한 시간이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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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대 졸업생 김현숙, 김옥련 그리고 부산무용가들과 |
2000년대 초였겠다. 국립발레단 〈지젤〉 공연이 보고 싶다고 오랫만에 연락을 해오셔서 부랴부랴 초대권을 구하여 선생님을 모셨는데 함께 공연 보고 예술의전당 근처에서 저녁 식사하고 부득이 밤차로 가시겠다고 하여 서울역까지 배웅한 것이 유일무이한 제자 역할이었나.
선생님이 입원하셨다고 하여 부산에 일이 있는 길에 머무시는 요양원에 면회를 간 것이 코로나 전이었다. 너무 반가워하시면서 누군가로부터 받은 속옷을 나에게 주셨고 나는 그것을 부적처럼 아직도 가지고 있다. 내가 발레 팔동작을 전문용어로 뇌이니 선생님이 청아한 표정으로 따라 하셨는데 그 눈부신 영상은 너무도 개인적인 광경이라 공개하기는 힘들구나. 그리고 코로나가 터졌고 나는 경성대 동료였던 최은희 선생과 함께 요양원 유리문을 경계로 눈인사를 할 수밖에 없었고 그후로는 무너져가는 본인의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면회가 사절되었다.
동경에 있는 나는 장례에 참여하지 못했다. 부군께서 먼저 돌아가시고 하나뿐인 아들도 외국에 있는 선생님. 후반부 생애를 보살펴준 박귀숙 선생이 너무 고맙다. 국립발레단원을 거친 부산대학교 제자이다. 아마 나만큼, 아니 나보다 더 많은 인연을 선생님과 지속해 온 사람일 것이다. 마지막을 지켜주는 제자를 가진 선생님을 부러워하면서 평생을 무용과 함께 지내신 분이시니 충분히 자격이 있으시다고 생각한다.
사랑하는 선생님,
그동안 참으로 감사했습니다.
저는 그나마 선생님께 배운 정확한 기초가 있어 지금까지 춤을 출 수 있답니다.
거기서는 다시 ‘야녀’가 되어 좋아하던 춤 마음껏 멋들어지게 추시기 바랍니다.
제자 정호드림
남정호
전 국립현대무용단 예술감독.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명예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