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오늘날 컨템퍼러리 댄스(Contemorary Dance)는 한 나라의 문화ㆍ예술 수준을 가늠하는 척도의 하나가 되었다. 인간의 상상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사람의 몸으로 표현하는 창작 춤인 컨템퍼러리 댄스는 AI 시대에 그 중요성이 더욱 대두되고 있다. 예루살렘 국제춤주간(Jerusalem International Dance Week 2025) 참관은 이스라엘이 세계 컨템퍼러리 댄스의 선도 국가 중 하나임을 깨닫게 해주었다. 이스라엘은 회자되는바, “세계 춤예술의 실리콘밸리”였다.
기회는 우연히 왔다. 나는 작년 2025년 9월 하순, 부산에서 열린 국제공연예술마켓(Busan International Performing Arts Market 2025)에 참가했다. BPAM 주최 측은 부산역 근처, 한 호텔 ’루프탑 바‘를 빌려 행사 기간 중 매일 밤, 참가자 간 교류를 위한 생맥주 파티를 열었다. 어느 저녁, 루프탑 바에 들렀던 나는 내 앞을 지나가는 까만 눈이 서글서글한 한 여인과 마주쳤다. 나는 별생각 없이 그녀와 의례적으로 명함을 교환했다. 그런데 상대의 명함을 들여다보니 그녀는 이스라엘 예루살렘 매쉬 댄스하우스(MASH Dance House)의 오프라 이델 예술감독이었다. 영어로 대화하기도 귀찮고 해서 나는 생맥주를 들이키며 지나치려고 했다. 그런데 그녀는 뜻밖의 말을 했다. “나, 당신 예루살렘으로 초청할 거야.” 나는 다짜고짜 “왜 나를 초청하겠다는 건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래, 막연히 던진 립서비스(lip service) 정도로 생각했다. 나도 건성으로 한마디 툭 던졌다. “고맙다.”
잊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통의 이메일을 받았다. 내용인 즉슨 12월 7일부터 11일까지 매쉬 댄스하우스에서 열리는 예루살렘 국제춤주간(JIDW 2025)에 참가 신청하라는 것이었다. 그 이후 JIDW 민완 코디네이터인 길리 라핫(Gili Rahat)과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모든 것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오프라 이델은 부산에서 한 약속을 어김없이 지킨 것이다.
항공사를 고른 것이 에티오피아 에어라인이었다. 에티오피아의 아디스아바바(Addis Ababa)를 경유하여 12월 6일, 텔아비브 벤구리온 공항에 내렸다. 꿈 같았다. 나는 젊은 시절, 이스라엘의 바로 옆 나라인 요르단에서 일하면서도 당시 아랍 국가들의 엄격한 이스라엘 보이코트 조항(이스라엘을 여행한 사람은 아랍 국가에 입국할 수 없다는 조항) 때문에 이스라엘을 방문할 수 없었다. 또 오래전 일이지만 내 대학원 전공이 국제정치학 중에서 아랍-이스라엘 갈등(Arab Israeli Conflict)이니 감개무량했다. 나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이스라엘을 좀 더 깊이 알고 싶었고, 간 김에 매쉬 댄스하우스 외에도 텔아비브의 수잔 델랄 댄스하우스(Suzanne Dellal Centre for Dance and Theatre)와 키부츠현대무용단(KCDC)의 거점이며 국제춤마을(International Dance Village)을 이루고 있는 가톤(Ga'aton)을 방문하고 싶었다. 따라서 JIDW 전후로 24일여를 이스라엘에 머물렀다. 전쟁이 발발하기 전, 이스라엘을 다녀왔으니 나는 운이 좋았다. 여러 민족과 문화가 공존하는 구시가가 있는 예루살렘, 지중해의 해변 도시 텔아비브, 예수님의 고향인 나사렛 등 모든 지역이 내가 있는 동안은 한국보다도 더 평화스럽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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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rusalem International Dance Week 2025 개막식 ⓒ이만주 |
예루살렘 하파르사(HaParsa)에 있는 매쉬 댄스하우스(예술감독: Ofra Idel, CEO: Ruby Edelman)는 이스라엘 컨템퍼러리 댄스의 허브(Hub)라고 할 수 있었다. 실험적이고 다문화적인 예루살렘의 특성을 담아내는 춤의 요람이었다. 하파르사는 히브리어로 편자(Horseshoe)를 뜻했다. 편자가 말의 발을 보호하듯, 매쉬는 이스라엘 독립 안무가들을 후원하고 그들이 안정적으로 작업할 수 있는 보금자리 역할을 한다. 그리고 앞서가며 가상현실(VR)과 미디어를 결합하여 360도로 춤 공연을 감상할 수 있고 시공간의 제약을 넘어 춤을 관람할 수 있는 기술적 혁신을 선도하고 있었다. 디지털시대, AI시대에 맞게 춤예술의 지평을 넓히고 있었다.
매쉬는 대규모 상업적인 공연장과는 분위기가 다르다. 안무가의 창작과 실험에 최적화된 스튜디오형 전문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가변형 좌석을 갖춘 블랙박스형의 홀이 6~7개 있다. 이번 JIDW에서는 4개의 홀이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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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막작 Yossi Berg & Oded Graf 〈4 Fantasies and a Monkey〉 ⓒ이만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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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ris Erez 〈The War Within〉 ⓒ이만주 |
JIDW는 이스라엘 컨템퍼러리 댄스의 쇼케이스이자 마켓이다. 춤의 국제적인 플랫폼이다. 이번 JIDW에는 주로 유럽이 주류를 이루면서 세계 각국의 춤과 공연예술 축제의 예술감독, 프로그래머, 춤 제작자들이 70여 명 초청되었다. 나는 얼마 되지 않는 아시아 쪽, 피초청자의 한 사람이었고 특히 춤비평가로서는 단 한 명의 참가자였다.
12월 7일 밤부터 11일까지 닷새 동안 이스라엘의 춤 작품 20여 편이 무대에 올랐다. 주제가 다양했고 안무 역시 다채로웠다. 별다른 소품이나 무대 장식 없이 안무와 기량만으로 완성도 높은 작품을 만들고 있었다. 세계 톱클래스 수준이었다. 이스라엘 무용 특유의 역동적인 움직임, 폭발적인 에너지가 돋보였다.
20여 편이 모두 개성 있는 독특한 작품들이었으나 예로 네 작품에 대한 느낌을 짧게 적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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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lit Liss 〈Blue Zone〉 ⓒmacholshalem.co.il |
현대예술의 역사는 끝없는 도전의 역사다. 컨템퍼러리 댄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갈릿 리스(Galit Liss)가 안무하고 오릿 그로스(Orit Gross)가 공동 창작한 〈블루 존(Blue Zone)〉은 컨템퍼러리 댄스의 모든 고정관념을 깬다. 67~85세까지 여성으로 이루어진 비전문 무용수 13명 등장부터가 충격을 준다. 그들의 동작들에서는 기존의 춤 동작을 찾을 수 없다. 그들은 세월의 층위가 겹겹이 쌓인 주름진 피부와 비무용적인 움직임으로 개인의 욕망이 사회와 어떻게 충돌하고 화해하였는지를 보여준다. 관객들은 지금까지 가졌던 미학 개념 대신, 존재 그 자체에 대한 경외감을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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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smin Gariv 〈Barely〉 ⓒmacholshalem.co.il |
야스민 가리브(Yasmin Gariv)가 안무하고 그녀와 로템 사피르(Rotem Sapir)가 출연하는 듀엣 작품인 〈베얼리(Barely)〉는 공중에 달린 둥근 테(hoop)를 사용하여 공연된다. 두 무용수의 기량이 곡예에 가깝다. 안무자의 변에 의하면 “공중과 땅 사이에서 그들만의 신체적 언어를 통해 친밀함, 의존성, 여성의 강인함, 그리고 권력과 연약함 사이의 미묘한 긴장감을 탐구한다”고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작품은 고혹적인 아름다움과 완성도로 환상을 선사한다. 야스민과 로템은 마치 동아시아 신화에 나오는 달에 사는 두 선녀같았다. 〈RADICAL_ARCHIVE〉는 무대 전체를 요란하게 뒤흔든다. 난리굿도 그런 난리굿이 없다. 안무와 연출과 작곡까지 도맡아 한 아나벨 드비르(Annabelle Dvir)는 신체를 단순한 표현의 도구가 아닌, 기억과 트라우마가 새겨진 ‘살아있는 기록소’로 상정한다. 전기 기타와 금속 악기가 만들어내는 차갑고 날카로운 음향은 출연자들의 보컬과 충돌하며 무대를 하나의 현대적 제의(祭儀) 공간으로 탈바꿈시킨다. 유기적인 신체와 무기적인 기계음. 그 둘 사이의 불협화음을 통해, 현대인이 마주한 실존적 균열을 감각적으로 가시화한다. 작품은 개인의 고통을 공동체의 황홀경으로 승화시키며 출연자와 관객 모두를 거대한 카타르시스의 용광로에 쏟아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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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fra Idel 〈Sounds Alive〉 ⓒmacholshalem.co.il |
〈사운즈 얼라이브(Sounds Alive)〉는 매쉬 댄스하우스 예술감독인 오프라 이델 안무작이다. 예기치 못한 분쟁이나 폭력으로 인해 관계와 일상이 단절되는 인간의 고통스러운 순간을 춤 언어로 묘사한다. 두 여성은 같은 배를 탄 운명 공동체로서 서로를 지탱하지만, 동시에 그 안에서 발생하는 마찰과 갈등을 숨기지 않는다. ‘흰옷에 땋은 머리’는 한국 여인을 상기시키기도 한다. 고통의 틈새에서 언어는 거세되고 외마디 소리만이 터져 나온다. 그 비언어적인 소리 안에 얼마나 많은 슬픔과 함께 생존의 의지가 응축되어 있는지를 강변한다. 그 소리는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원초적 공명이기도 하다. 두 여성 무용수인 율리아 메제츠카야와 야스민 가리브는 인간의 한(恨)을 처절하리만치 연기한다. 이 작품은 ‘결국은 극한 상황 속에서도 놓지 않는 여성의 생명력과 회복력’을 춤 미학으로 표현하며 끝난다.
10일 밤과 11일 밤에는 ‘예루살렘 국제안무경연(Jerusalem International Choreography Competition) 10작품이 각축을 벌였다. 그중, 중국이 한 편, 홍콩이 두 편, 대만이 한 편으로 중국세가 두드러지는 것이 이채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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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구시가 관광 ⓒ이만주 |
주최측은 JIDW 기간 중, 참가자들에게 예루살렘 구시가지, 예루살렘 전통시장(Mahane Yehuda), ‘이스라엘 박물관’ 관광을 시켰다. 박물관의 어느 한 홀에서 스피드데이트(Speed-date)라는 프로그램을 가졌다. 이번 JIDW 공연자와 참가자 모두가 상대를 바꿔가며 명함을 교환하며 짧은 대화를 나누는 방식이었다. 어느 날 오후에는 지금은 고적이 되어버린 옛 기차역에서 모두가 참여하는 디스코 파티도 열어 주었다. 행사 기간 중, 가능한 한, 점심이나 저녁을 제공했다. 식사가 채식 위주인 것이 인상 깊었다. 되도록 육식을 하지 않는다는 거였다. 이스라엘인들은 음식에 대한 그들 나름의 철학이 있는 것 같았다. 매쉬 댄스하우스 로비 중앙에 바가 있어 참가자들은 술을 무제한으로 마실 수 있다. 술을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저항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이스라엘이 세계 컨템퍼러리 댄스 주류의 한 갈래로 자리 잡은 배경에는 담대함과 도전정신을 의미하는 특유의 ‘후츠파(Chutzpah)’문화가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형식미에 집착하기보다 파격적이고 본질적인 에너지를 중시하는 이 문화는 이스라엘 춤의 끊임없는 혁신을 가능케 했다.
수잔 델랄 댄스하우스의 ‘커튼 업(Curtain Up)’은 신진 안무가들을 위한 혁신적 인큐베이팅 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들에게 제작비, 연습실, 기술 스태프 및 공연 기회를 패키지로 제공하며 확실한 후원을 한다. 이스라엘 정부는 춤예술을 국가 핵심 문화자산으로 인식하고 전략적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예술고등학교 교육이 매우 탄탄하다고 한다. 뛰어난 인재들에게는 군 복무 중에도 훈련을 병행할 수 있는 ‘예술 병과 특례제도’를 운영하여 경력 단절을 최소화한다. 결과로 세계 주요 무용축제에는 다수의 이스라엘 작품이 포함된다.
북부 지역인 가톤에는 ‘키부츠현대무용단’을 중심으로 ‘국제춤마을’을 이루어 무용수들이 거주하며 창작하는 환경이 조성되어 있다. ‘댄스 저니(Dance Journey)’ 프로그램에는 전 세계 청년 무용수들이 모여든다.
앞의 모든 사실들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세계 속, 컨템퍼러리 댄스의 실리콘밸리’라는 명성을 얻게 한 것이다.
“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사무엘하 6:14)”라는 구절은 ‘열정’과 ‘자기 검열의 포기’와 맥을 같이 한다. 체면을 던지고 본능에 몰입했던 다윗의 모습은 현대 이스라엘 무용수들에게도 그대로 계승되었다.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시편 30:11)”는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됨을 의미하며 고난의 역사 속에서 춤을 통해 희망을 노래하는 치유와 연결된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의 춤예술은 일찍부터 뿌리 깊은 영성에 닿아 있었다. 이스라엘이 오늘날 컨템퍼러리 댄스 혁신의 발원지이자 트렌드 선도자로서 인정받는 것은 이러한 영성과도 관계가 있다.
나는 습관대로 갖고 다니는 셀폰(핸드폰)으로 JIDW 행사의 전 과정을 스냅 사진으로 찍어 이메일로 주최측에 전달했다. 그리고는 얼마 후, 답신을 받았다.
이만주 님께,
아름다운 사진들을 보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정말로 큰 감동과 기쁨으로 받았습니다.
선생님의 사진에는 행사 그 자체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서 이루어진 수많은 개인적이고 인간적인 만남들까지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그 순간들을 다시 떠올릴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멋진 일이며, 현장에 함께하지 못했던 이들에게도 그 치열하고도 잊을 수 없는 JIDW의 시간들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게 해줍니다.
(중략)
앞으로도 계속 연락을 이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따뜻한 인사를 전하며,
오프라 아이델매쉬 댄스하우스 예술감독
이만주
춤비평가. 시인. 사진작가. 무역업, 건설업 등 여러 직업에 종사했고 ‘터키국영항공 한국 CEO’를 지냈다. 여행작가로 많은 나라를 여행하며 글을 썼고, 사진을 찍었다. 사회성 짙고 문명비평적인 시집 「다시 맺어야 할 사회계약」과 「삼겹살 애가」, 「괴물의 초상」을 출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