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프랑스에서 보내는 엽서 속 에피소드 2
춤추는 기계 인형의 뼈저린 참담함
남영호_재불무용가

무용단에 입단한 1992년 9월, 자키타파넬무용단은 그 당시 프랑스 북부 지방 스트라스부르그(Strasbourg)에 있는 폴쉬드대극장(Pole Sud)에서 3년차 마지막 레지던시를 하고 있었다. 한국식의 ‘상주단체’라 하겠다.

그때 새 작품을 아직 시작하지 않았지만 자키는 나를 레지던시 기간에 초대하였다. 무용수들과 직원들과의 만남을 만들기 위함이었던 것 같다.

여기에서 레지던시라는 말은 그 도시에 수시로 (짧게는 3주, 길게는 6주씩) 체류(임대 아파트나 큰 주택들에서)하면서, 주중에는, 극장 연습실에서 새 작품 준비 및 레퍼토리 공연 연습, 오전의 오픈 트레이닝, 그리고, 극장측이 주관하는 관객을 위한 오픈 연습도 하고, 때로는 주말에 안무자 자키 타파넬이 그 도시의 현지 무용수 들에게 주는 워크숍이 있었고, 또 어느 날 무용수들은 주중에 각각 학교에 가서 어린이 및 중고교생들에게 ‘몸 움직임 감성 아틀리에’를 주는 등, 레지던시 기간에 작품 준비와 공연 연습 외 여러 활동들을 하고 있었다.

나는 무용수들이 학교에 찾아가서 하는 몸 움직임 감성 아틀리에’에 관심이 있어서 몇 무용수들의 동의로 함께 참관할 수 있었는데, 각각의 무용수들이 느끼고 체험하는 움직임들을 각 학교 학생들의 나이에 맞게 적용해서 만들어 1시간씩 진행을 했었다. 어린이와 청소년들의 감성을 끄집어내는 걸 보면서, 무용수들의 기량은 물론 가르치는 방법이 다양하고 탁월한 느낌이었다. 한국에서의 무용수업과는 진행 방법이 아주 달랐다.

어느 초등학교 반에서 진행한 아틀리에 수업 후, 그 반의 담임선생님이 가르쳤던 무용수에게 “이 아틀리에 진행을 밖에서 보면서, 우리 학생들의 자세들을 다시 보게 되었다. 우리 학생들에게 이렇게 다른 에너지와 감성들이 있었는지 몰랐다. 이번 기회에 알게 되어 너무 기쁘고, 고맙다. 그리고 이 아틀리에를 우리 학생들이 할 수 있었던 건 너무 행운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번을 계기로 1년 에 한 두 번씩은 이런 기회를 만들 필요성을 느낀다”고 하였다. 난 무용수들이 제시하는 아틀리에를 보면서, 그들의 아틀리에 방법들을 조금씩 분석하고 적기도 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몸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각자의 고유한 경험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거였다. 자기들의 고유한 경험을 전달하는 것이니, 설명과 전달도 간명하면서도 정확했다. 나는 자키타파넬무용단의 이런 레지던시 진행들을 보면서 놀랬고, 그것은 새로웠으며, 더욱 관심이 커졌다. 프랑스 직업 무용단이 어떻게 가동되고 있는지 처음으로 관찰할 수 있었다. 이렇게 몸 감성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공연도 보러 오게 되고, 그렇게 관객들이 조금씩 만들어지면서, 춤을 사랑하는 관객이 된다는 걸 감지할 수 있었다.

난 그때 안무가가 주는 무용특강에 보조 무용수로 있었다. 키도 작고 가벼워서 안무가는 워크숍 때, 내 몸을 통해 사람들에게 보여주며 설명하였다. 덕분에, 그 후로 4년 동안 나는 타파넬 안무자의 워크숍 보조 무용수를 하면서 그로부터 몸 원리를 거의 사사받았던 것 같다. 몸의 원리인식, 몸이 주는 신비, 유연함, 몸 안에서 느껴지는 에너지의 흐름, 그 흐름이 연결되어 춤이 되는… 너무 신기했고, 황홀했다. 저절로 춰지는 춤 같았다. 마약처럼 난 이 몸의 신비에 빠져 들어갔다.








자키타파넬무용단 단원으로 들어가서 처음 했던 작품 〈Hors champs〉(주변에서), 몽펠리에 오페라 극장 ⓒMarc GINOT




나는 자키타파넬무용단의 새 작품에 들어갔다. 작품 제목은 〈Hors Champ〉(주변에서). 작품 초연은 1994년 몽펠리에무용페스티벌 오페라극장에서 했지만, 연습은 1993년부터 조금씩 시작하고 있었다. 안무자는 이 작품에 아주 많은 정성과 에너지를 쏟았고, 예산이 좀 투입되었다. 새 음악 창작 작곡부터, 파리에서 온 아주 유명한 트리오 연주자들의 라이브 연주, 새 무용수 입단, 연습도 하며 거의 1년 반에 걸쳐서 준비했었다. 그리고 연습 기간 중 일부는 외부에서 몸 인식 강사를 초청해 무용수들로 하여금 몸을 보호할 수 있도록, 그리고 스스로 고유한 움직임을 창작 할 수 있도록 여러 도움이 될 만한 몸 방법론 특강까지 제공해주었다.

덕분에 나는 그 당시 알렉산더 방법론, 펠덴크라이스 방법론, 바디마인드 센츄링, 소마 등등 몸의 인식 방법론들을 접했고, 무용단에서 작업하면서 연구, 실험할 수 있었다. 몸의 신비에 취하다 보면 하루하루가 너무 빨리 지나갔었다.

당시 자키타파넬무용단은 프랑스에서 공연 투어를 제일 많이 하는 무용단 가운데 한 단체였다. 1년에 공연 날짜만 45~60일이 되었다. 자키타파넬무용단 무용수들은 이 한 무용단에서만 일을 하고 있었다. 프랑스에서 무용수가 한 무용단에서만 일해서 프로무용수 자격을 지속하기는 쉽지 않다. 프랑스 프로무용수들은 거의 두 개 이상의 무용단과 작업하고 있었다.

자키타파넬무용단은 안무자를 비롯, 무용수들은 안무자의 남편을 포함한 남자 무용수 3명, 나를 포함한 여자 무용수 3명, 그리고 행정 및 기획 매니저 1명, 기술감독 1명으로 모두 9명이 있었다. 무용수들은 보통 같이 서로 작업한 기간이 이미 6~8 년 남짓이었다.

그전에 몽펠리에에서 자키타파넬무용단 레파토리 공연을 보러간 날, 난 이 무용단의 공연을 보면서, 무용수들의 고유한 자신들의 움직임과 또 하나처럼 일치되고 서로 부드럽게 연결되는 움직임들을 보면서, 이 무용수들이 늘 같이 보내고 먹고 자고 하는 줄 알았다. 그 후 무용단에 들어가 그들과 작업하면서 아니라는 것을 알았고, 이들은 연습이 끝나면 각자의 생활로 돌아갔었고, 연습하는 동안에는 아주 집중하며 작업에 임하는 진짜 프로들임을 알게 되었다. 나는 새 단원이라 새 작품을 하는 기간 말고는, 안무자가 워크숍을 제공할 때 보조무용수를 하는 것 외에 하는 일이 없어 무용단이 레퍼토리 순회공연 갈 때면 나는 저절로 휴가를 가졌다.

이 무용단의 시간표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오전 9시에 모여 1시간 반 동안 다 같이 트레이닝을 했다. 연습 첫날, 안무자 자키는 우리들 에게 트레이닝 동작들을 가르쳐 주었고, 그 동작들은 1년간 우리들의 오전 트레이닝 프로그램이 되었다. 트레이닝은 1년에 한번 변형되고, 추가되었다. 이 트레이닝은 또한 오픈도 되어 있어서 몽펠리에시의 다른 무용수들도 더러 와서 같이 하곤 했었다. 그 다음 12시 30분 전까지 즉흥을 비롯 여러 움직임 탐구들을 했었다.
12시 반부터 14시까지는 점심시간, 14시부터 18시까지 계속 연습, 하루 총 7시간 반을 연습하였다. 주 5일, 매일 7시간 반, 정말 프로무용단 생활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그때의 긴 연습 시간들은 나에게 몸을 탐구할 수 있는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자키타파넬무용단에서 새 작품 작업 준비 중에 일주일 간 있은 외부 특강 ' 알렉산더 방법론' 진행 모습. 강사는 질 레스트랑(Gille Estran, 트리샤브라운무용단 단원이었다가 몸 인식 강사로 전업) ⓒ남영호




그러나 좋은 일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새 작품 작업은 무용단이 3주 이상 레퍼토리 공연이 없을 때 했었다.

“당신의 춤을 춰 보세요.” 자키는 나에게 말하였다. 나는 춤을 추고 있는데, 계속 나 보고 같은 말을 반복했다. 뭐가 이상한 것인지, 그래서 어떡하라는 건지, 설명도 해 주지 않고…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답답하고 정신적으로 힘들어지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 이해 못하는 새 무용수의 춤을, 시간을 갖고 지켜봐 준 안무자의 인내심에 감탄한다. 그 당시 나는 몸이 자유롭지 못했던 것 같다. 이렇게 해야 한다, 잘 해야 한다 등등 어떤 기준을 두고, 많은 조바심이 있었고, 지시를 기다리는 학생처럼 몸이 긴장되어 있었다. 자율성이 부족했다. 거기에다 연습 중 여자 단원 무용수들은 연습이 잘 안 되면 무조건 내 탓을 했다. 분명 그건 내 잘못이 아닌데… 불어가 제대로 안 되니 변호할 수도 없었다.


자키는 그저 우리들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초보자인 내가 그들의 울타리에 툭 던져진 기분이었다. 자키가 야속했다. 두 여자 무용수들은 나를 못살게 굴었다. 그 순간 너무 괴로웠다.


집에 돌아와서 지친 몸으로 샤워하면서 매일 울었던 것 같다. 부모님 생각, 한국 생각이 났었다. 무용단을 그만둘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그럴 순 없었다. 다른 무용단에서도 같은 상황들이 안 생긴다는 법이 없을 것이었다. 어떻게든 적응해야 한다고 혼자 다짐했다.

나중에야 안 일이지만, 두 여자 무용수들은 그녀들 방식으로 나를 챙기는 거였다. 사랑의 잔소리? 거기에 보이지 않는 텃세도 함께 있었을 것이다. 초창기 무용단에서 내 별명은 ‘춤추는 기계’였다. 내가 자키와의 작업에 스트레스 받고 있을 때 무용수들은 나에게 말했다.

“너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좋은 날이나 슬픈 날이나 언제나 똑같이 춤을 잘 춘다. 마치 버튼을 누르면 항상 똑같이 추는 인형처럼, 인간이 아니다. 꼭 그렇게 항상 잘 안 해도 된다. 인간은 항상 잘 할 수 없다.”
“너에게는 춤만 있는 것 같다. 다른 인생의 자리가 없다.”
“너는 Yes 아니면 No로만 답한다.”
“혼자서 다 하려고 하지 마라. 다른 사람이 할 수 있는 자리도 남겨 둘 수 있어야 한다.” 등등 많은 조언들을 받았었다.

무용수들은 마치 그들의 아끼는 무용수를 가르치는 철학자 선생님들 같았다. 그러나 나는 고맙기보다 그 말들이 혼란스러웠다.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아무도 나에게 어떻게 하라고 답해주지도 않았다. 혼자서 찾아야 했다. 알 수 없었다. 난 단지, 너무나 원했던 프랑스 프로무용단에서 춤추면서 열심히 했고 잘하고 싶었고 잘 보이고 싶었다. 그러나, 나의 존재가 없었나 보다.

나의 춤이란 뭘까? 내 감정에서 시작하여 몸에서 스스로 우러나오는 고유한 움직임!

열린 정신, 자유로운 몸,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했다. 내 존재를 알아야 했다. 그때부터 난 나의 뿌리를 찾기 위해, 한국 문화, 문학(시), 사회, 역사, 철학, 인문학, 동양철학, 한국전통무용, 책들을 읽고, 찾기 시작했다. 읽고, 느끼면서, 생각하는 것이 관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몸으로 표출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지나고 이제 와서 보니, ‘나를 찾는 여행’이 이때 시작되었다.

남영호

현대무용가. 1991년 프랑스에 간 이래 남쪽의 몽펠리에 지역을 중심으로 현대춤 활동을 해왔다. 2015년부터는 한국문화를 프랑스에 소개하는 축제인 '꼬레디시'를 매년 가을 주최하는 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2021. 9.
사진제공_Marc GINOT, 남영호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