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춤의 도시 뉴욕, 무용 프로듀서로 10년 살기 1
코로나로 중단된 기획 작업, 찾아온 성찰의 시간
박신애_코리아댄스어브로드 대표

92Y 하크니스 댄스센터(92Y Harkness Dance Center)와의 인연은 2014년부터 시작되었다.
2014년 가을, 하크니스 댄스센터의 기획공연 프로그램의 하나인 ‘프라이데이즈 엣 눈’(Fridays at Noon)에서 ‘아시아 여성 안무가전’을 선보였는데, 어느 날 창무국제무용제 프로그래머로 활동할 때 알게 되었던 중국인 안무가 나이니 챈(Nin-Chan)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녀는 이번 ‘아시아 여성 안무가전’에 초청을 받았는데 한국 현대무용가를 포함하고 싶다고 한다며 소개를 부탁해 왔고, 그렇게 윤푸름의 〈애〉를 소개하게 되었다. 이 공연에서는 나이니와 윤푸름 그리고 일본인 안무가의 세 작품이 프로그램되었는데, 공연 후 하크니스 댄스센터의 큐레이터 캐서린 타린(Cathrine Tharin)은 특히 윤푸름의 작업에서 떨칠 수 없는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했고 또, 이로 인해 한국 안무가에 관심 가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하였다.




92Y 하크니스 댄스센터(92Y Harkness Dance Center) 외관 ⓒ코리아댄스어브로드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에게 캐서린의 첫인상이 그리 좋지는 않았는데 그 이유는 처음 극장에 갔을 때 일본, 중국 안무가에 비해 한인 안무가인 윤푸름에게 무시 아닌 ‘무시’를 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뉴욕에서는 종종 일본인이나 중국인처럼 국가의 힘이 큰 나라 출신들이 상대적으로 타 아시아인들보다 더 환영받는 경우를 경험하곤 하는데, 한국에서 뉴욕까지 공연을 위해 날아온 내 아티스트가 혹여나 그런 대접을 받게 될까 봐 날을 세우고 있던 터였다. 공연이 끝난 후, ‘관객과의 만남’의 자리가 있었는데 캐서린은 윤푸름에게 감사를 표하며 깊이 감동하였다는 말을 건넸고, 그녀의 급변한 목소리, 눈빛, 태도를 보았을 때의 내 마음속 쾌감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국력을 떠나 그야말로 작품력으로 인정을 받은 순간이기 때문이었다.




92Y 하크니스 댄스센터 공연_ 윤푸름 〈애〉 ⓒ코리아댄스어브로드




 윤푸름의 공연이 끝나고 얼마 후 캐서린에게서 개별적인 연락이 왔다. 자신이 92Y에서 기획하고 있는 여러 다른 프로그램들이 있는데 그중 한인 안무가를 포함하고 싶다며 미팅을 하자고 했다. 미팅은 순조롭게 이어져 갔다. 윤푸름에 대한 인상 덕분인지 콧대 높은 백인의 표본처럼 보이던 그녀는 나를 굉장히 달갑게 맞아주었고 한국 현대무용의 동향과 최근에 눈에 띄는 작가들은 누구인지, 한국 현대무용의 역사와 성장 과정 등 많은 이야기를 길게 나누었다.
 긴 미팅 끝에 그녀는 한국 특집을 해보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고, 만약 공연성과가 좋다면 매년 한국을 주빈국으로 하는 프로그램이나 아시아 연계 프로그램을 나에게 맡길 의향이 있다며 게스트 큐레이터의 포지션을 제안했다. 그 순간 내색할 순 없었지만, 속으로는 뛸 듯이 기뻤던 기억이 있다. 돌아오던 맨해튼 지하철 속에서 그동안 아무도 도움 줄 곳 없는 뉴욕 무용계에서 국제 프로듀서로 고군분투하며 고생했던 순간들이 생각나 눈물 한 방울을 흘렸던 순간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나는 안무가이자 무용수로 활동했던 경력을 접고 프로듀서의 삶을 살겠다고 결정한 2011~12년부터 한국의 민간 무용단체 및 무용가들을 뉴욕 현지에 소개하고자 많은 시간과 자본을 투자하며 노력을 쏟아왔다. ‘춤한류를 이끄는 현대무용가 시리즈’(2012~2015)를 기획하여 내 사비를 털어가며 해마다 새로운 춤 아티스트들을 소개하기도 했고, 지원금이 없어 자비로 뉴욕에 오는 많은 아티스트들의 무료가이드를 자처하기도 했다.
 다들 무엇을 위해 그렇게까지 하느냐고 의문을 던지기도 했지만, 이화여자대학에서 현대무용을 전공하고 뉴욕으로 와 활동했던 나로서는 현대무용이 긴 역사와 뿌리를 미국에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과의 교류를 너무 소홀히 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한국 현대무용계는 유럽과의 교류는 활발한 데 비해 미국 시장으로는 진입장벽이 높아 보였고 누군가는 미국 무용 시장에도 한국 춤을 알리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게 왜 나여야 한다고 생각했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범세계적으로 주목받는 뉴욕 무용시장을 한국에 제대로 소개하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었던 것 같다.




댄싱코리아 공연_ 고블린파티 〈아이고〉 ⓒ코리아댄스어브로드



댄싱코리아 공연_ 윤푸름 〈길 위의 여자〉 ⓒ코리아댄스어브로드




 그렇게 탄생한 것이 2015년 ‘댄싱코리아’(Dancing Korea)! 댄싱코리아는 92Y의 대표 주말 기획 프로그램인 ‘딕댄스’(DIG Dance)의 일환으로 ‘한국특별주간 - 한국인 예술가들로만 구성된 프로그램’을 선보였다. 국내외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한국 민간 무용단체 8개의 작품을 릴레이 형식으로 구성하였는데 ‘전통부터 현대까지’(Transcending traditional and modernity)라는 테마로 진행하였다. 이 프로그램에는 안은미, 김원, 윤푸름, 김주빈, 고블린파티, 최문석, 정석순이 참여하였고, 오프닝으로는 이문이 전통무용단이 승천무, 영돗말이 씻김굿, 살풀이(이매방류) 춤으로 구성된 〈해원〉을 선보였다.




딕댄스 시리즈 관객 모습 ⓒ코리아댄스어브로드



댄싱코리아 출연진과 함께 ⓒ코리아댄스어브로드



댄싱코리아 리셉션 단체 사진 ⓒ코리아댄스어브로드




 댄싱코리아를 필두로 2016년부터는 다양한 페스티벌에서 한국춤을 선보일 기회가 있었는데 그 중, 인상 깊었던 공연의 하나는 정석순의 프로젝트S가 ‘라마마 무브스!’(Lamama Moves!) 축제에 초청되어 단독 공연을 올린 것이다. 이 기획은 뉴욕 한국문화원의 ‘오픈스테이지’(Open Stage)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연계되었는데, 한인 안무가로는 정석순이 처음으로 라마마에 초청되었다고 한다. 라마마는 현지에서도 인지도 큰 실험극장으로 매년 다양한 국제적 프로그램을 선보인다. 돌이켜 보면 라마마 공연을 통해서 가장 크게 얻은 성과는 이 시점부터 한국 무용단들의 공연을 지속적으로 찾아오는 관객층이 뉴욕에 생겼다는 것이다. 아직도 이때의 관객으로 오셨던 분들이 내가 큐레이팅하는 공연을 잊지 않고 매년 찾아와 주는 걸 보면 나에게는 분명 큰 의미가 있는 공연이 되었던 것 같다.




  

라마마 무브스! 축제_ 정석순 공연 외벽광고, 공연 모습 ⓒ코리아댄스어브로드




 뉴욕은 무용이 생활화된 도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엄청나게 무용시장이 활성화되어 있다. 맨해튼에서 길을 걷다 보면 좀 과장된 표현으로 한 블럭 건너 하나씩 스타벅스 매장만큼이나 많은 댄스 스튜디오가 눈에 보이고 남녀노소 누구나 일상처럼 무용을 배우고, 즐기고, 찾아다닌다. 뉴욕을 대표하는 매체인 뉴욕타임스에서는 매주 주목해야 할 무용공연들을 포스팅하고, 대중적으로 많이 찾아보는 더뉴요커(The NewYorker)나 타임아웃(Time Out) 등에서도 심심치 않게 무용공연들이 소개된다. 그러다 보니 현지에서 활동하는 단체들은 물론 전 세계의 작품들이 뉴욕의 각종 페스티벌과 극장으로 몰려 과부하 현상 또한 일어나곤 하는데 이런 점에서 최근 한국 현대무용의 발전상을 현지의 전문가들을 비롯한 일반 관객들이 인지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굉장히 뿌듯함을 느끼곤 한다.




재팬 소사이어티 전경 ©wikipedia.org



재팬 소사이어티 내부 ©Richard P. Goodbody / japansociety.org




 재팬 소사이어티(Japan Society)에도 한인 안무가들을 소개할 기회가 있었다. 많은 사람이 재팬 소사이어티가 일본 문화원인 줄 오해하는데 실은 재팬 소사이어티는 엄연한 미국계 회사로 일본의 문화를 주제로 운영되는 민간기관이다. 재팬 소사이어티에서는 2년에 한번 ‘Japan+East Asia’라는 이름의 프로그램을 진행하는데, 예술감독인 요코 시오야(Yoko Shioya)의 요청으로 그동안 몇몇 단체들을 소개했고, 가장 최근에는 ‘최강프로젝트’가 초청되어 올해 초 공연할 예정에 있었으나, COVID-19로 인해 뉴욕 전역이 공연장을 열 수 없는 터라 현재는 내년 1월로 연기하여 준비 중이다. 이전에 재팬 소사이어티를 방문한 단체로는 제이제이브로(2017), 고블린파티(2019) 등이 있다.




팬아시아 페스티벌 포토월_ 박신애 프로듀서 ⓒ코리아댄스어브로드




 잊을 수 없는 극장도 있다. 바로 마사그레이엄 스튜디오 시어터(Martha Graham Studio Theater)인데 ‘웨스트페스트’(West Fest)라는 축제를 통해 접하게 된 장소이다. 맨해튼의 허드슨 강변을 따라 다운타운 웨스트사이드에 자리한 오래된 건물을 아티스트 레지던시로 바꾸어 많은 입주 작가가 현재 살거나 작업실, 연습실 등으로 다양하게 쓰고 있다. 마사그레이엄 스튜디오 시어터는 이 건물 꼭대기 층에 지어진 극장인데 뉴욕의 소극장 시설들이 굉장히 낙후한 것을 생각해보면 지리적 조건이나, 분위기, 장비 등이 굉장히 이상적으로 조화롭게 구성되어 있다. 무엇보다 이 극장에서 작품을 볼 때 집중력이 높아지는 극장, 공연을 볼 때마다 빠져드는 듯한 느낌이 드는 마법 같은 무대였다. 그동안 웨스트페스트에 소개된 한국 안무가로는 윤푸름(2015), 오영훈(2017), 이보경(2020) 등이 있다.

 이밖에도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많은 아티스트들을 뉴욕에 소개했다. '연희:사운드 오브 서울'을 통해 소개했던 연희집단 활(예술감독:장수미,최정호), SCF서울국제안무대회와의 파트너쉽으로 소개했던 이지희, 최재희, 김재승, 송진주 그리고 국은미, 최진한, 김현, 구은혜 등이 있다.

마지막으로 기억에 남는 기획은 아무래도 최근까지 몸담았던 92Y 하크니스 댄스센터에서 2020년 2월 코로나19가 뉴욕을 집어삼키기 직전에 올렸던 정재우의 무대가 아닐까 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나는 2014년부터 하크니스 댄스센터에서 매년 한해도 빠짐없이 코리아/아시아 릴레이티드 기획을 올릴 수 있었는데, 2020년 마침내 정재우가 하크니스 댄스 페스티벌(Harkness Dance Festival)에 한국인으로서는 처음, 그것도 개막작으로 초청된 것이다. 1994년 시작된 하크니스 댄스 페스티벌은 전설적 무용단들인 리몽 컴퍼니(The Limon Dance Company), 마사그레이엄 컴퍼니(MarthaGraham Company), 에릭호킨스 컴퍼니(The Erick Hawkins Dance Company) 등을 선보임은 물론 카일 아브라함(KyleAbraham, Abraham.In.Motion), 제시카 랭(Jessica Lang), 존 헤긴보텀(John Heginbotham) 등 미래 기대주 안무가들의 작품들도 다수 선보이며 세계적인 축제로 자리매김 해왔다. 뉴욕 무용계의 메인스트림이라 불릴 수 있는 축제에 드디어 젊은 한인 안무가가 서게 된 것이다. 현지의 주요매체인 더뉴요커(The New Yorker)에서는 정재우의 작품을 버스터 키튼(Buster Keaton)에 비유하며 인상적인 안무가로 주목했고, 뉴욕타임스 역시 금주에 주목해야 할 공연 중 하나로 지목하기도 하였다. 내가 뉴욕에 프로듀서로서 진출한 지 꼭 10년 만이었고, 참으로 행복했다. 정재우는 이번 Bettery Dance Festival 40주년에 초청되어 온라인 상영을 예정하고 있다.




하크니스 댄스 페스티벌에 초청된 정재우 ⓒ코리아댄스어브로드




이 공연이 마지막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작년 2월 아시아권에 코로나19가 강타하던 시점, 그때만 해도 서양권은 큰 타격을 입기 전이었다. 뉴욕 공연을 마치고 김경신, 정재우와 함께 떠난 시애틀 투어에서는 ‘한국이 위험하니 거기 더 있다가 귀국하는 게 좋겠다’는 지인들의 연락을 받기도 했으니 말이다. 뉴욕에서 지난 10년 노력이 결실을 맺어가는 상황에서 찾아온 팬데믹은 나를 더욱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뉴욕에서 친하게 지내던 대다수의 지인들이 코로나19에 감염되어 고생을 했다는 이야기가 들려오고, 또 여러 친구들이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 연락이 끊기기도 했다. 지난 10년을 통틀어 이렇게 긴 시간을 한국에 머물러 본 것이 처음이다. 곧 사그러들겠지라는 믿음으로 지내던 시간이 길어지고, 요즘은 국내에서 다양한 공연을 제작, 진행하며 지내고 있다. 코로나19 종식 후 끊어졌던 국제교류의 호흡을 심폐 소생하기 위해 다양한 기관들과 지속적인 관계 맺기에 노력하고 있지만, 변화될 포스트코로나의 국제유통시장을 생각하면 나에게도 변화가 필요한 시간이라는 생각을 하는 요즘이다.

박신애
민간무용단체의 해외진출을 돕는 비영리기관인 코리아댄스어브로드의 박신애 대표는 무용 국제교류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국제프로듀서이다. 2014년부터 최근까지 뉴욕92Y 하크니스 댄스센터에서 아시아/코리아 릴레이티드 프로그램의 게스트 큐레이터로 활동하였으며 현재 국제 솔로 페스티벌 모노탄츠서울의 예술감독, 프랑스 파리 SOUM 페스티벌의 큐레이터를 맡고 있다.

2021. 6.
사진제공_코리아댄스어브로드, wikipedia, Richard P. Goodbody / japansociety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