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내가 처음 뉴욕에 무용수로 활동하러 간 것은 2006년이었다. 세계적인 무용가가 되겠노라며 야심찬 꿈을 가지고 뉴욕에 입성, 그 유명하다는 앨빈 에일리 아메리칸 댄스 시어터(Alvin Ailey American Dance Theater·AAADT) 오디션부터(비록 1차 발레 오디션에서 똑하고 떨어졌지만) 이민자의 땅답게 다양한 인종의 안무가들이 이끄는 크고 작은 무용단에서 프로젝트로 몇 년간 활동했다.
그 시절 뉴욕에서 무용수로 활동을 하면서 가장 놀란 부분은 무엇보다 바로 ‘도네이션’ 문화였다. 미국의 문화시장에는 자율 기부형태가 굉장히 보편화되어 있는데 가령 티켓을 예매할 때 금액이 따로 정해 있지 않고 자율적인 금액을 기부하는 형태로 예매를 한다든지, 공연이 끝나고 본인이 받은 감동의 크기만큼 자유롭게 도네이션을 해달라는 문구를 내세우는 경우도 자주 접하곤 하였다.
당시 예고와 대학 무용과를 막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간 나에게 그런 도네이션 문화는 충격이 아닐 수 없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그때는 공공연하게 이뤄졌던 ‘강매 티켓!’을 울며 겨자 먹기로 사들고 어떠한 선택권도 없이 객석에 앉아 쥐어진 공연을 보면서 ‘시간아 흘러라 흘러! 내가 보고 싶은 공연을 나도 보고 싶다’를 외쳐왔던 다소 반항기 충만한 무용학도였던 나에게 이 도시에 너무도 당연하게 스며든 기부 관행은 너무 큰 충격으로 다가왔고 아주 큰 문화 차이로 느껴졌다.
뉴욕 JOYCE 극장의 도네이션 웹페이지 ⓒjoyce.org |
처음 도네이션 형태의 예매를 하고 나서 ‘공연을 보는데 마음대로 금액을 정한다고? 에이 그럼 누가 돈을 내! 오늘 공짜 공연 보는 셈 치지 뭐’라고 생각했고, 그런 내 예상을 깨고 결과는 더욱 충격적이었다. 정확한 프로젝트 이름이 기억이 나진 않지만 그리 유명하다고 할 수도 없는 작은 무용단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날 공연을 통해 이 단체는 내가 감히 생각지도 못하는 도네이션 금액을 모았고, 도네이션된 티켓 가격이 당시(2006-7년) 물가로는 쎄다고 할 수 있는 장당 100불 평균을 족히 넘겼다. 게다가 관객 중에는 무용 근처에도 안 가본 것 같은 일반인 관객이 더 많았고, 또 그중 어떤 이는 엄청난 목돈을 기부하기도 했으며 이런 문화가 나에게 작지 않은 충격을 안겨주었다.
뉴욕을 베이스로 하는 많은 무용 관련 단체들은 연말에 연례행사로 ‘펀드레이징 나이트’(fundraising night)를 연다. 말 그대로 다음 해에 쓰일 컴퍼니의 후원금을 모으기 위한 파티라고 생각하면 되는데 단체의 성격에 따라 공연을 한다거나 단체의 대표작을 발췌하여 갈라쇼를 하는 단체도 있고, 라이브 음악 밴드를 불러놓고 후원인들을 위한 저녁 식사를 하면서 그야말로 ‘연말 파티’를 하며 무용단이 그 일 년 동안 걸어온 발자취를 소개하는 예도 있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추운 겨울, 한국에서 온 무용단 공연을 마치고 관객이었던 재미교포 한 분이 따로 연락이 왔는데 너무 좋은 공연을 보여주어 감사하다며 후원금을 전달하고 싶다고 했다. 나는 안무가에게 이 소식을 전했고 함께 후원자를 만나러 나갔다. 봉투에 담긴 900불, 한화로 약 100만원이 조금 넘는 금액이 들어있었다.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 하는 안무가에게 나는 관객분이 작품을 너무 감명 깊게 보셨기에 개인적으로 후원을 하고 싶다고 하신 것이라고 전했고, 그때 안무가가 지었던 표정이 나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기쁜 것도 아닌 오묘한 표정으로 ‘아니, 왜?’하는 얼굴이었다. 한국에서 온 안무가에게 이 ‘기부 사건’(?)이 황당한 해프닝으로 여겨지는 게 당연했다. 후원자가 다음 제작될 프로덕션에 후원금으로 의상에 보태쓰시라 했다더라 했더니 “우리 의상이 너무 후져 보였나 봐요!”라고 했다는 후문도 이제는 추억거리다.
육완순 현대무용 50년 페스티벌 포스터 |
미국에서 처음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다. 한국 현대무용계의 대모인 육완순 선생님이 나를 불러 미국식 현대무용을 한국에 소개한 지 ‘50주년’이 되는 해라며 기념행사로 축제를 하고 싶다고 하셨고, 이제 막 기획을 시작한 나는 감당하기 힘든 너무 큰 규모의 행사를 맡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80편의 무용 작품과 89명의 안무자와 460명의 출연자를 포함한 이 행사를 준비하는 시점에 예산은 턱없이 부족했고, 다양한 방법으로 예산을 만들고자 고군분투했다. 나는 미국에서 활동하던 때의 기억을 더듬어 나름 새롭고 투명한 기부문화를 한국에 정착시켜 보겠노라 킥스타터(kickstarter) 형식의 크라우드펀딩을 개설하기도 했고, ‘후원인의 밤’을 만들어 갈라쇼와 함께 미술품 경매도 시도했다. 그런데 나는 이날의 치욕을 잊을 수 없다. 어렵게 ‘공아트스페이스’와 협업하여 귀한 미술품들을 도네이션 받았고, ‘육완순 현대무용 50주년 기념 자선경매’를 진행했는데 옥션이 시작된 후 한참이 지날 때까지 단 한 명도 손을 들지 않는 것이 아닌가. 미국에서 갈라 나잇에 턱시도를 입은 신사분들과 드레스를 입은 여성분들이 모여 앉아 아주 자연스럽고 매끄럽게 진행되던 옥션을 상상하며 자선경매를 준비했던 그 날, 첫 5분은 마치 50년 같이 느껴졌다. 미국에서 겪지 않은 컬쳐쇼크를 한국에서 거꾸로 느낀 순간이었다. 이날 자리에 참석했던 나의 아버지께서 얼굴이 달아오르셔 딸이 벌여놓은 자리를 어떻게라도 수습해보시겠노라 사주신 문봉선 화백의 <蘭> 그림이 아직도 부모님 댁 한켠에 걸려 있다.
좋은 기억도 있다. 감사하게도 한국 안무가들이 뉴욕에 공연을 올 때마다 많은 숨은 지지자들이 계셨다. 매번 안무가와 무용수들을 불러 맛있는 음식 대접을 해주신 분들도 있었고, 먹고 싶은 것 다 먹으라며 집문서 들고 나왔다고 하신 분도, 무용수들에게 필요할 것이라 영양제를 한 다발씩 사다가 안겨주시는 분들도 있었다. 안무가들의 반응은 매번 너무도 놀라워하셨지만, 그래도 그 후원자분들이 있으셨기에 나는 늘 힘을 낼 수 있었다.
언젠가는 한국에서 지원금이 없이 자비로 어렵게 공연을 온 무용단이 공연 뒤풀이(공연 후 식사)할 돈이 없어 그냥 숙소로 들어가겠다고 해 극구 아니라며 나라도 내겠다, ‘여기까지 와서 좋은 공연하시고 밥이라도 맛있게 먹어야죠‘ 하고 당당하게 무리를 이끌고 식당을 갔는데. 이게 웬일인지 카드 한도가 다 되어 결제를 못 하고 이를 어떻게 해야 하나 어쩔 줄 모르고 쩔쩔매고 있었다. 마침 관객으로 오셨던 한 분이 무려 천불이 넘는 단체의 뒤풀이 비용을 생색 한번 내지 않고 단박에 내주셔 정말 감사한 마음과 긴장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울었던 기억이다.
또 한번은, 92Y 극장에 정기적인 후원을 하시는 유태인 한 분이 우리 공연팀의 리셉션을 위해 대량의 고급샴페인을 박스째로 도네이션 해주셨는데 그날 공연자들과 관객들이 다 같이 즐길 만큼의 양이었다. 또 그 맛이 엄청났다. 엄청 고가의 샴페인이었던 건지 그날 이후 아직 까지 아무리 찾아도 그 샴페인을 찾을 수가 없다. 일면식도 없던 분이 한국에서 온 아티스트들을 응원하시는 거라 말씀하시고 이름도, 연락처도 남기지 않으셨다. 안무가들은 오지랖 넓은 ‘나’ 때문에 그분들이 도움을 주신다고 생각했을 수 있지만 적어도 내가 아는 한, 우리 작가들의 노고와 아름다운 작품 때문이었다는 걸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번 이야기하고 싶다.
많은 아티스트들이 뉴욕에 공연하러 오면서 또 하나 놀라는 부분이 관객들의 태도라고 한다. 나와 함께 공연하셨던 분 중에도 얼굴 한 번 본 적이 없는 관객들이 공연이 다 끝나고 나서도 돌아가지 않고 기다렸다가 안무가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는 점에 많이들 놀라신다. 다른 무엇보다 ‘수고했다’라는 게 아니라 ‘고맙다’라고 하는 워딩을 많이들 기억에 남아 하시는 것 같은데, 사실 나도 무용수로 활동했을 때 그게 사실 가장 인상 깊은 대목이었던 것 같다. 한국에서는 내가 춤을 추고 나서 감사하다는 말을 들었던 기억보다 주로 ‘수고했다’라거나 ‘잘했다’ ‘고생했다’라는 인사를 받았던 것 같다. 물론 표현을 과하게 하지 않고 내세우는 것을 싫어하는 우리의 문화가 반영된 것일 수도 있고, 요즘은 더러 그렇게 인사해 주시는 분들도 있는 것 같지만 어쨌거나 무대 위에서 ‘좋은 춤을 보여줘서 고맙다’는 인사는 그땐 정말 생소하면서도 황홀하게 느껴졌었던 것 같다.
위에 적은 글들을 읽다 보니 내가 마치 뉴욕문화를 찬양하는 사람처럼 비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사실 나는 ‘나는 미국이 싫다’라는 책을 열성을 다해 읽으며 자라왔고, 누구보다 한국의 춤 예술가들을 사랑한다. 이미 눈치챈 사람들도 있겠지만 오죽하면 회사 이름이 ‘코리아 댄스 어브로드 (Korea Dance Abroad)’이겠는가. 수년간 해외를 오가며 전 세계의 많은 작품을 넘치게 접했지만, 한국인들이 만들어 내는 작업에는 그 ‘무엇!’이 있다고 나는 믿는다.
미국식 현대무용이 한국에 정착한 지 2023년이면 60년이 된다.(미국의 마사 그레이엄 테크닉을 수입하여 이화여대에서 교육적으로 정착시킨 육완순 선생님의 1963년 귀국 공연에서 선보였던 〈Basic Movement〉를 기점으로.) 그 짧은 시간 속에 우리 무용계는 비약적인 발전을 일구어 왔고, 이제는 한국 작품에 대한 인지도가 국제적으로 많이 높아졌다고 느낀다. 이러한 배경에는 내 이전에 국제교류에 힘써왔던 1세대 기획자 선배님들의 숨은 노고가 있을 것이고, 또 그에 앞서 우리 춤 계의 선생님들, 선배님들의 끊임없는 예술적 고뇌와 투쟁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한국은 그 어느 문화보다 빠르게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 흡수하는 장점이 있다고 생각하는데(물론 그것이 너무도 빠른 유행과 단명하는 트랜드를 낳기도 하지만), 예술을 위한 자발적 기부, 개인 기부금 문화 등 역시 빠르게 확산될 수 있는 여지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기부에 대한 인식과 문화가 바뀌고, 마음이 움직이는 ‘도네이션’을 통해 우리의 예술시장이 한층 따듯해지는 날이 하루빨리 오기를 바라며 오늘 이 글을 써본다.
박신애
민간무용단체의 해외진출을 돕는 비영리기관인 코리아댄스어브로드의 박신애 대표는 무용 국제교류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국제프로듀서이다. 2014년부터 최근까지 뉴욕92Y 하크니스 댄스센터에서 아시아/코리아 릴레이티드 프로그램의 게스트 큐레이터로 활동하였으며 현재 국제 솔로 페스티벌 모노탄츠서울의 예술감독, 프랑스 파리 SOUM 페스티벌의 큐레이터를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