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내가 프랑스에 온 지 올해로 32년째이다. 5년 예정의 유학 생활로 시작된 것이 1992년 프랑스 무용단에 입단하게 되면서 지금까지 30년이 된다.
프랑스에서 나는 결과적으로 나의 정체성과 삶을 살아가는 가치를 터득하였다. 젊을 때 그렇게 고민했던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한 가지 길을 알게 해 준 나라가 프랑스였다. 마치 빅토르 위고가 한 말 “우리에게는 자기가 태어난 나라와 프랑스가 있다”고 한 말에 공감하는 것처럼... 프랑스에서의 여러 상황들, 생활, 특히 개인적으로 민감했던 무용 정책들이 신기했고 궁금했으며 새로웠고 때로는 감탄을 자아내었다. 그리하여 나는 이 나라에 대해 호기심을 품고 나름 탐구하고 분석해보는 계기를 가져보곤 하였다.
이번 봄, 한국행에서 〈춤웹진〉의 권유로 이곳 프랑스에서 느낀 것들(어쩜 프랑스에서 하는 나의 고백이라 할 수 있는 것들)을 나누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한국어로 글쓰기를 오랜만에 하다보니 서툴지 모르겠지만 진심이 통하기를 기대하면서 진솔하게 전하려고 한다.
1990년 9월 파리에 도착했을 때 다른 사람들처럼 나도 설레는 마음이었다. 프랑스를 비롯 유럽 선진국들을 경험해 보고 싶다는 커다란 포부도 있었다. 큰 언니가 파리에 오래 전부터 살고 있었다. 언니는 한국의 국비 유학생으로 프랑스에 와서 학위 취득 후 귀국하여 부산에서 일하던 중, 당시 부산에 교환교수로 왔던 프랑스인과 결혼해서, 귀국한 지 1년 만에 다시 프랑스로 가게 되어 파리에 거주하고 있었다.
파리에 도착해 처음 지하철을 타던 날, 낡은 지하철의 불결한 냄새, 사람들의 무표정한 얼굴 들, 게을러 보이는 지하철 청소 직원들, 끝날 시간이 10분이나 남았는데 문을 닫은 집 앞의 슈퍼, 계산대 앞에서 보내는 긴 시간들... 우리에게 알려져 있던 ‘예술의 도시 파리’ ‘패션의 도시 파리’ ‘로망의 도시 파리’처럼 화사할 것이라고 상상했던 파리는 그곳에 없었다. 당시 내 눈 앞의 파리는 결코 그런 파리가 아니었다. 프랑스에서 첫 생활은 이렇게 실망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아, 과연 이게 프랑스 파리야? 지금 생각하면, 그때 나는 좁고 1차원적인 시선으로 파리를 본 것 같다. 그 후 프랑스를 조금씩 알아 가면서, 그리고 무용단 생활을 하면서 여러 감정을 겪으며 프랑스가 더 궁금해졌고, 그러다 보니 벌써 30년이 흘렀다.
처음 파리에 도착해서 소르본대학에서 어학 공부를 할 동안, 무용은 거의 할 수가 없었다. 불어 어학 수업은 보통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있었고, 무용수업들도 거의 같은 시간 들에 있었다. 저녁에 무용수업을 하는 곳이 있었는데, 큰 언니는 내가 저녁에 혼자 무용수업 받으러 가는 것에 반대하였다. 파리만큼 안전한 데가 없고 파리에서 아무 문제없이 저녁에 수업을 받았다는 정보도 있었지만, 결국 나는 어학 수업을 다니던 6개월 동안 가끔씩 했던 주말 워크숍 외에는 거의 무용수업을 받지 못하였다.
어학 수업 6개월을 마치고 바로 무용단에 지원하고 싶었지만 프랑스에 있기 위해서는 체류증이 먼저 있어야 했다. 체류증을 가지려고 하면 어학공부 과정을 계속 더 다니든지 아니면 대학교에 들어가는 길을 택해야 하였다. 나는 “프랑스에 무용하러 왔지, 어학 하러 온 것이 아니야!”라고 용기를 내어 프랑스 대학 진학을 목표로 준비했다.
훗날 프랑스에서 나의 무용단을 만들어 출연했던 나의 솔로 모습 ⓒ남영호 |
파리 5대학 무용과에 지원했다. 난 한국에서 학사를 졸업했지만, 그것이 참작되지 않아서 다시 그곳 대학에서 학사부터 해야 하였다, 대학 입학시험은 먼저 실기 시험으로서 간단한 솔로 작품을 만들어 추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인터뷰였다. 실기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지만 불어로 해야 하는 인터뷰가 부담이 되어 며칠 동안 예상 질문들을 만들어서 큰 언니의 지도로 가족들 앞에서 퍽 자연스럽게 대답할 수 있도록 준비하였다. 인터뷰 날, 역시 준비했던 질문들이 나왔고, 난 준비했던 답들을 좀 자연스럽게 했던 것 같다. 그중 어느 질문은 “당신 실력이면 대학보다는 무용단에 지원해야 할 것 같은데, 왜 대학에 들어오려고 하느냐”였다. 나는 체류증 때문이라고 하면 안 될 것 같아서 급한 마음에 염치불고하고 “우리나라에서는 권위 있는 대학의 학위를 높이 평가한다”고 답하였다. 드디어 파리 5대학 무용과에 들어가게 되고, 당연히 학생 신분으로 체류증도 확보할 수 있었다.
1991년 9월부터 1992년 7월 초 사이, 1년 동안 파리 5 대학 무용과에서 받은 시간표는 나에겐 새로웠다. 1주일에 6시간 있는 실기 수업에는 프랑스 안무가들이 직접 학교 강의에 와서 각 4~6주 프로그램으로 자기들의 기본 동작들을 가르쳤다. 또 그들의 작업에 대해서도 함께 대화하는 수업을 병행하였다. 1년에 3명의 안무가에게 수업을 받았다.
무용과지만 그 외 이론수업들이 많았고, 그중 무용미학 수업 3시간은 어려워서 프랑스 학생들과 보조를 맞추기가 힘들었다. 동기생 한 사람에게 노트를 빌려서 저녁에 공부하였는데, 그 것이 힘겨워지면서 점차 대학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1년 기간이 끝날 때 마지막 이론시험은 통과하지 못하여 재수강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 후, 학과 교수께 무용단 입단을 고려하고 있어서 더 이상 대학교를 다니기 힘들다는 얘기를 하면서, 사실은 이론수업은 불어 때문에 이해하기가 아주 어려웠다고 고백하자 교수는 웃으며 인터뷰 때 불어로 아주 잘 얘기를 해서 이론수업에서 불어 문제가 있으리라곤 전혀 생각도 못했다는 답을 주었다.
1992년 여름방학 때 나는 무용단 오디션을 하기 위해서 무용 연습을 해야 했다. 한국에 있는 언니가 자기가 아는 어느 안무가가 여름에 몽펠리에라는 도시에서 큰 워크숍을 하는데 거기에 등록하라고 워크숍비를 보내줬다. 그러면서 한 마디 “어쩜, 그 안무가가 너의 춤 퀄리티를 좋아할 수도 있어”라고 덧붙였다. 나는 이 워크숍을 계기로 몸을 만들어 그 후 모든 오디션에 지원하리라 굳게 결심하면서 그 워크숍에 등록했었다.
설렘 반 기대 반,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혼자서 지방 도시 몽펠리에로 가는 기차에 올랐을 때, 점점 뜨거운 태양이 반기는 남쪽으로 향하는 기차 안 창문을 통해 본 그 풍경은 나에게 마치 새로운 인생을 예감하는 듯한 향기를 주었다.
1992년 자키 타파넬 워크숍에서(가운데 자기 아이를 안은 이가 자키 타파넬) ⓒ남영호 |
그 여름 워크숍은 3주간 일정으로 매일 7시간씩 하는 집중 워크숍이었다. 오전부터 온통 춤으로 시작하여 하루 종일 하고 그 후 저녁도 같이 먹으면서 같이 온 참가자들과 3주간을 춤 공동체를 이루며 보냈다. 워크숍 참가자들은 엄청 많았고, 나처럼 파리에서 온 사람들로부터 다른 지방, 다른 유럽 도시에서 온 무용수들까지. 후에 안 일이지만, 그 당시 그렇게 긴 시간과 긴 기간에 하는 워크숍이 프랑스는 물론 유럽에도 없어서 거의 독보적인 워크숍이었다.
워크숍은 이렇게 진행되었다. 수업은 오전에 몸의 원리를 인식하면서 몸풀이를 하는 움직임 수업이 3시간 있었다. 그리고 점심 식사. 오후 수업은 오전에 했던 동작의 한 부분을 더 세밀 하게 분석하면서 연구, 탐색하는 시간이 먼저 있었다. 그 후에 즉흥 수업이 이어졌다. 나는 오전 수업에 매료되었다. 몸의 신비가 느껴지면서 그때까지 한 번도 움직이면서 그런 원리를 생각하지 않았었다는 것이 새삼 놀라웠다. 이것은 후에 무용단에 들어가서 더욱 더 세밀하게 탐색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프랑스 무용수들은 오전 수업보다 즉흥이 있는 오후 수업을 더 좋아하는 걸 느꼈다. 나는 오히려 즉흥 수업에서 너무 부끄러워 표현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무엇을 어떻게 하라는 제시가 있을 경우에는 아주 당당히 할 수 있었는데, 즉흥 때는 알 수 없는 답답함, 당황스러움, 혼돈이 느껴졌다. 그 후 무용단에 들어갔을 때 그 점을 극복하기 위해 내가 했었던 탐색 작업에 대해선 다음 기회에 얘기하였으면 한다.
1992년 자키 타파넬 워크숍 참가자들과 함께 ⓒ남영호 |
나는 그때도 아직 불어에 익숙지 않아서 워크숍 도중에 하는 말들을 잘 이해할 수가 없었고, 같이 참여했던 한 프랑스 무용수가 아주 쉽게 친절히 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그 무용수는 몽펠리에에서 철학을 공부했고, 춤까지 추는 아주 매력적인 친구였다. 그다음에 몽펠리에에서 살게 되었을 때 친하게 지냈는데, 어느 순간에 그 친구는 더 이상 춤을 추지 않았고 결혼하면서 몽펠리에를 떠났다. 워크숍 시작 1주일이 지난 어느 날, 워크숍 안무자가 나에게 “ 관광으로 프랑스에 온 것이냐”고 물어서 “아니다. 무용단에서 춤추고 싶어서 몸 훈련으로 여기 워크숍에 참석한 거다”고 답하였다. 그러자 안무자는 바로 나에게 “내 무용단과 같이 작업하겠느냐”고 제안을 해왔다.
당시 그 안무가는 여자 무용수 한 명을 찾고 있었고, 이 3주간의 워크숍은 사실상 오디션 워크숍도 겸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여러 프로 무용수들도 이 워크숍에 참여하고 있었다. 난 기쁜 마음으로 당신네 무용단과 작업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하였다. 몽펠리에로 오는 기차 안에서 상상했던 예감이 현실화되는 순간이었다. 불어도 제대로 못하는 외국 무용수를 입단시킨 그 안무자 자키 타파넬에게 나는 지금도 고마운 마음이다.
남영호
현대무용가. 1991년 프랑스에 간 이래 남쪽의 몽펠리에 지역을 중심으로 현대춤 활동을 해왔다. 2015년부터는 한국문화를 프랑스에 소개하는 축제인 '꼬레디시'를 매년 가을 주최하는 활동을 병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