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2021년 새해 첫날 원로 무용가 육완순(한국현대무용진흥회 이사장)의 『내가 사랑하지 않은 적이 있던가: 육완순의 편지』가 발간되었다.
이 책은 한국 모던댄스의 선구자인 88세의 노장 육완순 선생이 자신의 꿈을 일궈가는 60여년의 여정 가운데 만난 무용가들과의 추억을 고스란히 담았다. 이 책의 발간 계기는 2013년 ‘육완순 현대무용 50년 페스티벌’에 참여한 무용가들이 각자 육완순 이사장과 얽힌 추억담을 모아 펴낸 기념집에서 발단되어, 저자가 이번에 무용가들에게 보내는 답신 형식으로 완성되었다.
육완순 『내가 사랑하지 않은 적이 있던가: 육완순의 편지』 |
책 속에는 저자와 돈독한 인연을 맺은 117명 한국의 무용가들과 나눈 회고와 격려의 글(제1부)이 주를 이루며, 2부에서는 1960년대 유학시절 사사한 마사 그레이엄을 비롯하여 2010년대까지 인연을 맺은 46명의 해외 무용인들과 함께 한 사진이 수록되었고, ‘육완순현대무용 예맥(藝脈)’이라는 나무 그림은 선생의 춤 인적 관계도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했다. 이 책은 육완순 선생과 무용가들이 서로를 기억하는 생생한 인상과 서로를 향한 애정과 존경의 글들로 가득하다. 더불어 한국 현대무용의 대모로 불리는 선생이 성취를 이뤄내며 기울인 노력이 자연스럽게 편지 속에 묻어 나온다.
1963년 이화여대에 처음으로 무용과가 생기고 저자는 미국의 현대무용을 도입하여 창작 교육의 기초를 놓는 역할을 하였다. 이후 대학 무용과가 확산되며 춤계는 춤교육의 체계를 이룰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다. 그 중심에서 저자는 이화여대에 근 30년 재직하며 무수한 제자들을 길러내었고 자신의 제자가 대학에 자리를 잡았을 때의 기쁨과 존경을 전한다.
“김복희는 내 제자 중 최초로 대학 전임 교수가 되었다. 제자 교수의 신호탄이었다. 김복희는 교육과 공연과 행정 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출중한 업적을 많이 세웠다.” (p.33)
제자들의 입신을 자기 일처럼 축하하고, 자신의 공로도 제자들의 공으로 돌리는 미덕의 글귀도 보게 된다.
“한국의 젊은 무용인들이 세계적인 무용인들과 호흡을 같이하며 성장할 수 있는 교육 페스티벌을 만드는 것이 꿈이었는데, 결국 이 원대한 꿈이 이루어지기까지 너의 헌신이 아니었다면 아마 불가능했을지도 모르겠다. 시작은 내가 했지만 완성은 너의 땀과 열정이 팔구할이었다고 감히 말하고 싶구나. 너는 나의 자신감이었어” (p.45)
육완순은 미국 유학시절인 1962년에 ADF(아메리칸 댄스 페스티벌)를 경험하며 받은 충격을 자신의 동경이자 꿈으로 간직하며 한국댄스페스티벌(KDF) 유치라는 성과를 이뤘다. 여기에 중심역을 한 김양근을 향한 감사와 고마움이 오롯이 전달된다. 1988년 서울올림픽이 한국이 세계화로 향하는 경로를 여는 역할을 했듯이, 1990년 ADF가 서울에서 개최되면서 춤교육 측면과 창작에 자극이 되는 국제적 소통과 활동을 이루는 계기를 저자는 마련하였다.
육완순 선생하면 떠오르는 작품으로는 무엇보다 1973년 창작된 〈수퍼스타 예수그리스도〉이다. 이 작품은 우리나라 춤 레퍼토리 중 최장수 공연으로 기록되며 여기에 참여한 수많은 댄서들의 활약상과 사사로운 캐스팅 과정도 책에서 엿볼 수 있다. 무엇보다 이 작품은 한국현대무용을 해외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고 특히 남자무용수들이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교두보 역할도 하였다. 이 작품에 관계한 많은 무용가들에게 감사와 함께 많은 추억을 공유하고 있다.
“1973년 초연 후 20년간 한 해도 빠뜨리지 않고 참여한 박명숙이 진정 슈퍼스타였다.” (p.33)
“1986년도 ‘슈퍼스타 예수그리스도’는 여성무용수로만 구성되었던 전례를 깨고 최초로 남성 무용수를 받아들인 해였다. 남성무용수 원년 멤버로 참여한... 박해준의 20년 장기집권을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p.105)
“2017년 10월 블라디보스톡 공연에서 보여준 박호빈의 절정의 연기는 객석의 긴 탄식과 신음소리를 자아내며 많은 고려 동포들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을 솟게 하는 감동의 연속이었다.” (p.107)
〈수퍼스타 예수그리스도〉는 “현대춤의 대중화와 대사회적 존재성을 알리는데 공헌하였고, 출연진은 공연을 통해 자극을 받고 현대춤꾼으로 성장과 명성을 얻을”(김태원) 수 있었다. 이어 선생이 1975년 창단한 한국컨템포러리무용단은 마사 그레이엄 춤의 정신과 기법으로 한국춤계에 새로운 사조를 만드는 시발점이 되었다.
“선생님께서는 1975년 한국컨템포러리무용단을 창단하시면서 장르의 구분없이 실력있는 무용인이면 누가나 참가할 수 있게 하셨는데, 이는 당시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가능할 수 없는 파격이었다.” (p.100)
“하정애와 함께 한 무용이 곧 한국 현대무용의 역사였고... 오케시스, 한국컨템포러리무용단, 한국현대무용협회, 사단법인 한국현대무용진흥회, 한국라인댄스협회의 활동에 이르기까지 하정애는 기도와 물질로 동역해 준 동지였다.” (p.255)
“1980년대의 진취적인 기획들의 씨앗이 대개 육완순에서 비롯되었음을 볼 때(협회창설, 소극장 운동, 현대 무용페스티벌 개최, 국제무용제전을 통한 국제화 도모 등) 춤의 새로운 운동 제1주자로 그를 위치시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김채현) 요즘처럼 국제교류가 활발할 수 없었던 시절에 미국 모던춤의 전도사 역할을 한 저자의 노력은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국제안무페스티벌 등 세계와의 교류를 향한 지속적인 노력을 하고 있으며 신진 발굴 등 여러 사업을 여전히 적극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이 책에서 더욱 인상적인 면은 교육자로서의 육완순 선생을 존경하는 제자들이 든든한 지지를 보내고 있는 부분이다.
“90년대 뉴욕에서 가난한 유학생 시절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직계제자도 아닌 발레 전공생인 나를 불러 따뜻한 격려와 밥을 사주신 적이 있었다... 너무 절실한 달러 봉투를 내 손에 쥐여 주셨고, 이때의 경험은 그 후 내가 교육자의 길을 걸으며 육교수님과 같은 마음을 품고 살아가게 한 계기도 되었다.” (p.34)
“항상 단정한 외모도 좋았지만, 여유로운 지도자상을 처음 본 놀라움과 감동을 잊을 수 없었다. 교과적 의무에는 매우 철저했지만, 그 선 안에서는 자유롭고 창의적이며 따듯한 교감이 가능했다. 예술가의 길을 가는데 필요한 도전정신의 뿌리는 육완순 교수님이 학부시절에 만들어주셨다.” (p.80)
“그래, 문영은 잘할거야... 뵐 때마다 손을 꼭 잡고 힘을 주시던 선생님,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건네주셨던 따스한 위로와 조언을 난 잊지 못한다.” (p.82)
“육순을 훌쩍 넘긴 지금도 나는 무대에 선다. 선생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열정과 근성으로 무용가 육완순의 제자인 것이 자랑스럽다.” (p.88)
“저는 선생님의 나눔과 배풂 속에서 성장하였습니다. 집안 사정으로 어려웠을 때 등록금을 대주시고 무용의 ‘끼’만 있었지 백지 같은 저를 발탁하여 부족한 점을 채워주시면서 무용가로 전진할 수 있게 항상 이끌어 주셨지요.” (p.128)
“어김없이 7시 정각에 시작되는 새벽 레슨... 하루라도 지각하면 족보에서 빼리라던 육선생님의 추상같은 엄명... 오늘도 우리 선생님은 호랑이보다도 무섭다... 늘 자신만의 춤을 추라는 독려는, 오늘도 외로운 작업의 길에 가장 든든한 버팀목으로 자리하며, 새로운 꿈을 꾸게 하는 원동력이 되고 있음에 또한, 감사드린다.” (p.182)
스승에게 드리는 제자들의 회고와 진솔한 마음이 아름답고 값지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여러 문장과 구절에서 전달되는 따스한 온기로 독자는 일반적인 책과는 다른 느낌을 갖게 될 것이다. 단정한 올림머리와 격을 갖춘 용모로 현장과 객석을 다니시는 육선생의 모습에서 저자의 춤에 대한 열정과 성실함을 보았다면, 이 책에서는 꽤나 오랜 시간을 할애하여 117명 각각의 무용가에게 손 편지를 전하는 듯한 선생의 정성과 마르지 않는 애정을 보며 인간적인 선생의 모습을 보게 된다.
팬데믹으로 디지털 기법들이 우리의 일상으로 침투한 이즈음에 육완순 선생의 제자들과 그와 인연을 맺은 무용가들에게 전하는 당부가 담긴 편지집에서 아날로그적 감성이 그윽하게 감지된다. 책 제목처럼, 내가 사랑하지 않은 적이 있던가, 이 순간도 내일도 춤을 향한 열정으로 사람과 인연을 귀하게 여기는 저자의 사랑은 멈추지 않을 것 같다.
“나는 이 책을 준비하는 수년 동안 사랑했던 이들을 더욱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리고 한 가지 확신에 도달했다. 내가 내 꿈을 포기한 적이 없었던 것처럼 나도 이들을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육완순)
김혜라
춤웹진 편집위원. 춤미학과 비평을 전공하였고 2012년 한국춤비평가협회를 통해 비평가로 등단했다. 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심의전문위원으로 할동하며, 〈춤웹진〉에 정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