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발레 입문, 펜싱 수련
이사도라 덩컨은 어머니 배속에서부터 춤을 추었다고 자서전에서 말했다.
사실 모든 사람은 어머니 배 속에서부터 춤을 추었다고 말할 수 있다.
태아가 자궁에서 조금씩 형태를 갖추어 나가는 과정에는 움직임이 뒤따른다. 이미 수많은 정자와의 경쟁에서 승리한 전력을 가지고 있는 이 생명체는 모태로부터 양분을 섭취하기 위하여 아마 필사적으로 움직였을 것이다. 몸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시장할 때 배가 고프다는 느낌은 태아 시절 배꼽과 연결된 식량공급의 기억을 은연중에 상기하는 것이다.
초등학교 시절의 성적통지표의 담임교사 의견란에 “주의가 산만하다”라고 적혀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어릴 적에는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가장 힘들었던 것 같다. 가만히 있지 못한다는 이 사실은 어쩌면 나에게 있어서 몸을 움직이는 것, 춤을 추는 것은 필연적이었다는 터무니없는 근거를 제공해 주었다.
초등학교 저학년일 것이다. 학교 강당의 조그만 무대에서 어느 날 우연히 무용공연을 보았다. 춤추는 여자의 긴 머리채가 움직임에 따라 흔들거렸다. 난생 처음 보는 짙은 화장과 화려한 옷을 걸친 여자. 태어나서 바로 헤어진 언니를 만난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음악은 기억나지 않는데 아마 집시 음악이면 좋았을 것이다. 몰래 훔쳐서 읽은 선정적인 연애소설 같은 달콤한 부끄러움. 그 후 틈만 나면 경대 앞에서 엄마의 한복 치마를 뒤집어쓰고 그 춤을 흉내 내곤 하였다.
ⓒ남정호 |
명절날에 친척들 앞에서 추던 춤 중에서 아직 기억에 남는 것은 도라지 춤이다. “그냥 부르기 쉬운 아리랑 노래에 맞추어 팔을 휘젓고 다니면서 예쁘게 한번 웃어주면 안돼?”라는 어른들의 기대를 배반할 수 있는 특권을 행사하며 흔해 빠지고 청승맞은 아리랑을 거부하였다. 집 근처에서 따온 들꽃들을 바구니에 넣고 와서 사람들에게 도라지 노래를 부르게 하고 박수치며 노래하는 사람들에게 그 꽃들을 나누어 준 것 같다. 진부하다고 생각했던 친척 어른들이 나에게 꽃을 받아들고 좋아하는 것을 보는 기분은 야릇했다. 그냥 들풀에 불과하잖아. 그 하찮은 들풀이 춤 속에서는 특별하게 변하죠. 보이지 않는 마음을 어떻게 줄 수 없잖아요. 이 들풀은 나의 마음을 대신하는 거랍니다. 선택된 당신에게 나의 마음을 드리는 거예요.
바뀌지 않았다.
흰머리 휘날리며, 아직도 나의 즉흥 춤판에서는 이런 해프닝이 계속 된다.
초등학교 5학년 운동회에서 매스게임을 준비하면서 어렴풋이 춤바람을 경험하였다. 마치 꽃잎처럼 겹겹이 원을 만들며 마지막 중심의 원으로 간택되는 희열, 같은 동작을 반복하면서 점점 나는 없어지고 움직임만 남게 되는 무아지경! 매스게임 연습이 있는 날은 아침부터 마음이 들뜨고 급기야는 지도강사를 사모하게도 되었던가.^^
ⓒ남정호 |
본격적으로 무용학원에서 발레를 배우면서 나의 재롱잔치는 끝났다. 민감한 사춘기의 이유 모를 치욕감이 나를 지배하였다. 발레는 결코 만만하지 않았다. 나는 좁은 어깨와 새가슴 그리고 두 무릎이 닿지 않는 오자형 다리를 가지고 있었다. 러시아에서는 이런 체형의 아이는 결코 발레를 할 수 없다! 자본주의국가에서 태어 난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수 있다. 아니 언감생심 발레는 내 인생에서 제외되고 다른 인생을 살았겠지.
타이츠를 입고 거울 앞에 서서 사진에서 보는 외국 발레리나의 자세를 해보면 내가 보기에도 너무 달랐다. 다시 태어난다 해도 이 땅이라면 그런 자태를 가지는 것은 불가능하리라. 열등감을 가슴에 품고도 매일 학원에 가서 수업을 받을 가치는 있었다. 나보다 먼저 시작한 아이들을 하나씩 따라잡는 쾌감이라니.
ⓒ남정호 |
학교 예술제에서 춤을 춘 이후 집안에서는 내가 무용을 하는 것을 기정사실로 인정한 것 같았다. 그러나 매달 내야만 하는 무용학원 교습비, 그리고 사고 싶은 예쁜 색깔과 세련된 디자인의 연습복, 부드럽게 발을 감싸주어 필요할 때는 미끌려주고 또 필요할 때는 바닥을 잡아주는 외제 슈즈. 이런 것들을 위하여는 돈이 필요했고 부모님으로부터 그 돈이 나오게 하기 위하여는 모범생의 가면을 쓰고 하기 싫은 공부를 하면서 억지 미소를 얼굴에 담고 있어야 했다. 그때부터 언제든 튀어나오려고 하는 위험한 집시여인을 교직과 가족 속에 꽁꽁 묶어 두었는데 그 가면이 몸에 달라붙은 살갗처럼 삶의 일부가 되어 벗겨지지 않는다.
선물도 있었다.
발레를 시작하기 전에 잠시 펜싱을 할 기회를 가진 것이다.
펜싱을 하면서 방과 후에 신체단련을 하는 맛을 알아버린 나의 몸은 펜싱을 그만두고도 그 시간이 되면 한동안 안절부절하였던 것 같고 따라서 정서적으로도 불안정해졌는데 다행스럽게 발레가 등장하였다.
시작하자마자 트로피도 땄으면서 왜 펜싱을 그만두었냐고? 학교 무용실에서 이루어지던 펜싱 레슨이 태권도 도장으로 옮겨지면서 함께 시작했던 무용반 아이들이 하나씩 빠지고 결국은 나만 남게 되었는데 내가 펜싱 수련하는 것을 보려고 동네 남자애들이 태권도도장으로 몰려왔고 그때는 동네 연예인.^^ 그 소식을 들은 아버지의 강력한 반대로 일년 반 정도 지속된 펜싱교습은 결국 중지된다.
지금도 기억한다. 나를 힐끔거리며 쳐다보던 시선들, 나이들은 어떤 아이들은 노골적으로, 내 또래 아이는 몸을 숨기고 그리고 코흘리개들은 서커스를 구경하듯이 바로 코밑에서 죽치고 앉아 있었지. 관장도, 사범도 아무런 제재하지 않고 오히려 개방수업하듯이 자랑스러워했고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이런 상황과 맞싸우며 움직이는 방도를 찾지 않으면 안되었어. 그 시선들을 마주하며 적대감에 불타서 나의 몸은 더 힘차게 뻗으려 했는지 몰라.
흠 흠 어쩌면 그 시선을 즐긴 거 아닌가? 잘 모르겠어. 오래된 망원경 렌즈가 너무 긁혀졌어. 어쨌든 항상 구설 수에 오르내렸고 속으로는 겁을 잔뜩 먹었지만 겉으로는 대범한 척했던 것 같아. 펜싱을 하면서 내가 상대방의 허점을 빨리 볼 수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건 그나마 감사한 일이야.
춤을 추는 것은 나를 모조리 보이는 것이다. 나에게 시선을 집중시키는 것, 그 순간 그들의 혼을 빼앗는 것이란다.
ⓒ남정호 |
나는 조숙자선생님께 처음으로 발레를 배웠다.
부산동보극장에서 있은 조예경(조숙자의 예명)무용발표회를 단체 관람하였다. 어릴 적 보았던 집시여인이 환생하여 나에게 손짓을 하였다. 언젠가 이 이야기를 했을 때 크게 기뻐하셨던 선생님. 지금은 요양원에서 하루종일 누군가를 기다리고 계신다.
만주에서 일본인 교사에게 발레를 배운 선생님은 매사 철저하셨다. 수업은 항상 정시에 시작되었고 검정타이츠를 입고 그위에 얇은 스커트를 걸친 복장으로 엄격하게 진행되었다. 지금 생각해도 체계적으로 잘 짜여진 수업이었다. 요즈음은 피아노 반주 강사에 의해서 하지만 당시에는 녹음 테이프를 통하여 플리에(plie)부터 그랑 바트망(grand battement)까지 항상 같은 음악이 나왔는데 한번도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발레수업의 강점은 매동작마다 박자와 템포를 달리하므로 오랫동안 수련하다보면 어떤 박자나 템포에도 적응하게 된다는 것이다. 주말이면 서울 임성남연구소에 수업을 받으러 가는 열정을 가진 분이었기에 학생들에게도 그런 맹목적인 정열을 전파시켰다.
조숙자선생님은 당시 나에게 세상에서 가장 멋지고 아름다운 것을 하는 자부심을 갖게 해 주셨다. 그리고 더 높은 고지를 점령하기 위하여 대가를 치를 수 있는 무모함과 인내심을 갖게 하여 주신 분이다.
No pain, no gain!
남정호
전 국립현대무용단 예술감독.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