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무용의 역사와 나의 무용 역사를 평행선으로 생각해보게 된다. 춤출 때만은 구질구질한 현실을 벗어나고 싶었다. 신데렐라가 되어 왕자를 만나 신분상승을 하여 멋진 성에서 하인들의 시중을 받으며 우아하게 사는 꿈을 꾸던 철부지 소녀에게 있어서 발레는 그 환상을 실현하는 데 가장 이상적인 도구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소녀가 홀홀 단신 집을 떠나 타 지역에서 독립체가 되면서 인형의 집을 나온 노라가 되는 것은 필연적이었을 것이다.
ⓒ남정호 |
부산이라는 지방에서 서울로 간 나에게 대학은 신세계였다.
커다란 캠퍼스는 고풍스러우면서 세련되었고 다양한 넓은 공간을 가지고 있었다. 나에게 배당 된 진관 기숙사는 꼭대기에 자리 잡은 아마 가장 오래된 건물 중 하나였다. 저녁이 되면 학교는 자기 공간에서 작업과 연구를 하는 일부 인원만 남아 고요해졌다. 마침내 학교는 마치 학교 사택에서 살았던 어린 시절에 경험했던 것처럼 모든 공간을 나에게 내어 주어 다른 이들 눈에 띄지 않게 그림자와 친구하며 춤을 출 수도 있는 여지를 제공하였다.
초기에는 또래의 타 전공생들이 당연한 것처럼 가지고 있는 정보, 지식, 상식은 나의 열등감을 불러일으켰는데 동시에 투지를 세우며 그것들을 흡입하면서 나를 신여성으로 개화시키는 데 한몫하였다. 학점을 잘 주는 과목보다는 대학 내의 훌륭한 강의를 택하게 된 데는 무엇보다도 기숙사에서 만난 타 전공 선배들의 영향이 컸다. 대학 내의 다른 전공교수들의 놀라운 강의들과 토플 시간에 만나는 저명강사들의 강의들 - 철학, 사회학, 교육학 그리고 여성학 등의 강의를 전율을 느끼며 접하게 되면서 이제까지 내가 맹목적으로 신봉해 온 발레에 대하여 객관적인 평가를 하는 시기가 아주 빨리 다가왔다. 서양적인 발레리나가 되기 위한 신체 만들기를 위한 맹목적인 수련법은 비인간적이었고 공주나 요정이 돌아다니는 내용은 가부장적이고 비현실적이었다.
ⓒ남정호 |
데모가 만연하던 시절이었다.
등록금 내고 개강하고 나면 데모로 학교는 문을 닫았고 기숙사도 덩달아 자주 폐쇄되었다.
유신체제에 반대하면서 격렬하게 데모하는 친구들이 바로 옆에 있었는데 나는 결정적일 때는 겁쟁이가 되어 도망쳤었다. 나보다 세상을 더 많이 아는 아이들, 나보다 세상을 더 걱정하는 아이들과 함께 하고는 싶었지만 막상 행동으로 옮기는 데는 체질적으로 다르다고 할까. 아니 비겁한 겁쟁이였다.
그 와중에도 프랑스문화원의 영화나 명동 오비스캐빈의 열띤 분위기는 나를 이단아로 만들기에 충분하였다. 가장 가까운 부모와 선생을 객관적 시선으로 보기 시작하면서 발레 또한 먼 문화의 사치스러운 취향을 만족시키는 사대주의의 산물로 간주하고 냉소적인 시각으로 보게 되었는데 때마침 접하게 된 이사도라 덩컨의 자서전 〈나의 생애〉가 도화선이 된 것은 확실하다. 이 책은 전염성이 강한 위험한 책이었다. 상상만으로라도 그녀의 생각을 행동으로 옮겨 볼 수도 없기에 더욱 더 유인력이 있었다. 아니 하나가 있지. 전공을 발레에서 현대무용으로 옮겼다!
현대무용이라는 분야가 있다는 것은 입학 후 강의시간표에서 처음 접하게 되었다.
당시 학년 지도교수였던 박외선 선생님의 현대무용 수업은 발레보다는 좀 쉬운, 다소 덜 체계적인 것 같은데 묘한 매력을 가진 실기 수업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선생님은 수업시간을 공연하듯이 운영하셨다. 같은 것을 반복하여 익혀 그 움직임을 완벽하게 해낼 수 있도록 몰아 붙이던 발레 수업과는 많이 달랐다. 전반부는 바를 잡고 발레의 바엑서사이즈를 단순화한 움직임을 수시로 순서와 속도를 바꾸면서 가르치셨고 그리고 센터에서는 그때 그 순간의 영감에 의해 일어난 움직임을 따라 하게 되는 것 같은 수업이었다. 본인이 시범을 보이시다가 어느새 빠져들어 짧은 춤 공연이 되는 경우가 많아 선생님의 동작을 배우기보다 감상을 하는 입장으로 바뀌게 되기도 했는데 일부 학생들은 이 틈을 타서 슬며시 빠져나가는 경우도 있었다.
박외선 선생님과 ⓒ남정호 |
나는 이유를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늘 홀린 것처럼 선생님의 수업에 임했던 것 같다. 근육을 사용하는 동작을 배우지 않아도 좋았다. 선생님의 움직임에는 눈 앞의 동작을 넘어서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영적인 아름다움이 있었다.
영혼의 춤!
결혼한 후에 무대에 서지 않겠다는 약속을 한 박외선 선생님은 아마 춤이 그리웠을 게다. 그래서 수업에서 시범할 때도 어쩔 수 없이 잠재된 무용수의 영혼과 호흡이 나올 수밖에.
고백하자면 매번 혼신을 다해 춤추시던 선생님의 모습이 지금까지 내가 무대에서 설 때마다 나를 받쳐주고 있다.
마산에서 초등학교를 나온 나에게는 선생님의 고향이 마산인 점도 특별하였다. 가톨릭 세례명이 엄마와 같은 세실리아란 점도 놀라운데 가장 감격적인 것은 내가 어린 시절에 가톨릭 소년 잡지에서 읽었던 ‘모래알 고금’과 ‘떡배 단배’의 작가인 마해송씨가 우리 선생님의 부군이라는 사실이었다.
그 친밀함을 무기로 당시에 장학금을 받기 위하여는 집안 형편이 어렵다는 것을 고지하여야 했는데 그 자랑스럽지 않은 사실을 선생님에게는 말씀드리는 것이 그나마 수월하였다. 덕분에 4년간 크고 작은 장학금을 받을 수 있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한지.
박외선 선생님과 ⓒ남정호 |
대학시절에 겪은 경제적인 어려움은 나를 강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나는 청렴하기로 이름난 교장 선생님의 여섯아이중의 둘째였다. 하늘을 나르는 새나 들에 핀 백합과 같이 가난한 삶을 받아들이는 환경에서 조금의 지혜로 멋을 부리는 법과 책에서 얻은 잡다한 정보로 주눅 들지 않고 대학생활을 하게 되었으나 항상 결핍감을 갖고 있었다. 가장 불만이었던 것은 무용을, 내가 택한 현대무용의 정체를 이론적으로 알고 싶다는 지적 욕구가 충족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전공강의는 데모, 축제 그리고 교수의 개인 공연 등의 이유로 거의 휴강이 되었고 학교 도서실 서가에 무수히 쌓여있는 책 중에도 무용 관계 서적은 빈약하기 짝이 없어 음악, 연극, 미술등의 서적을 통하여 무용을 유추하는 것에 흥미를 붙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에 미국문화원의 도서관에 무용에 관한 자료가 있는 사실을 알게 되어 그곳에서 현대무용에 관한 몇 개의 서적을 접할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빈약한 영어 수준으로 일단 목차를 훑고 그리고 사진들을 본다. 사진 밑에 있는 이름과 실물을 다시 확인하고 얼굴을 익힌다. 대부분 인물 사진보다는 춤추는 자태가 나와 있어 그 무용가의 성별이나 운이 좋으면 춤 스타일을 그려볼 수 있게도 된다. 그리고는 서문을 읽고 이름을 들었던 기억이 있는 흥미가 생기는 무용가부터 찾아 사전을 놓고 산만하게 이리저리 뒤적인다.
이 방법은 나의 독서법이다. 소설을 읽을 때도 처음부터 천천히 보다가 반 정도가 지나면 결말이 궁금하여 뒤를 봐버린다. 드디어 은퇴자가 되어 책을 저자나 편집자가 제시해 준 제 순서로 여유있게 읽을 수 있는 줄 알았는데 웬걸 여전히 뒤적거린다. 그나마 읽지 않은 부분을 나중에 찾아내어 읽는 것이 조금 바뀌었다고 할까.
나는 어릴 적부터 글 읽는 것을 좋아하였다.
동화책이 주는 따뜻하고 깨끗한 세계에서 시작하여 엄마의 여성잡지, 신문의 연재소설로 그리고 50권의 소년소녀세계문학전집이 나의 독서 베이스이다. 물론 그리스 로마 신화집도 뺄 수없고. 지금 살고 있는 곳의 마을회관이 식당과 도서관을 겸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면 내가 책을 찾는 것보다 책이 나를 쫒아다니고 있다고 할까.
이사도라 덩컨과 니진스키와도 책으로 만나게 되었다. 니진스키의 일기 〈고독한 영혼을 위하여〉는 이덕희씨가 러시아어에서 영문으로 번역된 것을 한국어로 멋지게 번역한 것이다. 왜 멋지냐고? 얼마 전에 일본의 댄스매거진에서 편집자며 평론가인 미우라 마사시와 인터뷰한 소위 니진스키의 전문가 스즈키 쇼(러시아 문학전공, 2023년 니진스키 연구로 요미우리 문학상 수상)에 의하면 일기에 쓰여진 니진스키의 언어 수준은 어린아이 수준이라고. 상관없다. 무용의 신이었던 그는 언어에 의존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어쨋든 두 번의 번역을 통해서 이 일기는 새롭게 탄생되었다고 할까. 나의 대학시절을 지탱해 준 책 중의 하나인 이 책을 바탕으로 나는 무용수 니진스키를 안무가로 탐색하는 석사논문을 쓸 수 있었고 그 과정에서 섭취한 지식들을 아직도 적당하게 우려먹고 있다.
탁월한 번역가 이덕희씨에게 진 빚을 갚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는 이미 늦어버렸다. 인터넷 정보에 의하면 2016년에 작고하셨다. 그녀를 통해 학교에서 배우지 못한 발레의 역사도 그리고 전혜린도 알게 되었는데 왠지 모를 죄책감과 회한을 품게 된다.
앞으로는 제발 이런 감정을 더 이상 맛보고 싶지 않구나.
남정호
전 국립현대무용단 예술감독.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