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남정호의 춤 산책 6
나의 춤을 기억한다(4)
귀국 공연 3편, 앞날들의 전주곡
남정호_안무가

Don’t look back, 뒤 돌아보지 마! 밥 딜란의 다큐 영화제목이다. 대중음악인인 밥 딜란이 2016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오랫동안 후렴만 흥얼거리며 따라 부르던 그의 음악들의 노랫말을 찾기 시작했다. 좀 부끄럽다. 이 ‘시보다 더 시’ 같은 내용들을 진작에 알았으면 좋았을 것이다. 아마 인생이 바뀌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다르게 보면 노랫말의 의미를 되새기다가 음악의 진가를 놓칠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그의 음악들은 응얼거리며 읊조리는 창법을 받쳐주는 리듬이 중독성이 있어 사실 구체적 내용을 몰라도 오히려 모르면^^ 충분히 오묘한 마력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원칙은 춤에도 적용된다. 무용이 뭔가의 메시지를 던지려할 때 대부분의 무용은 힘을 잃는다. 그러나 예외는 항상 존재하는데 그 중심에는 전쟁의 가장 큰 가해자이자 피해자인 독일과 일본에서 나온 표현주의와 부토가 있다. 춤으로 감히 철학을? 운이 좋게도 그 언저리에서 이 춤들을 보고(voir) 가지고(avoir) 이해하는(savoir) 짧은 순간들을 거칠 수 있었다.



  

ⓒ남정호



1982년 나는 프랑스에서 돌아와서 소위 귀국공연 같은 뉘앙스를 가지고 3솔로를 발표하였다. 장소는 김수근 건축가의 공간 소극장. 당시 쟁점이 된 내용[무엇을]과 형식[어떻게]을 오가며 하던 고민과 딜레마를 내포한 자기고발의 중간발표회였다고 생각된다.

첫 번째 작품 〈안녕하세요-bonjour〉에서는 내용이 중요하게 다루어졌다.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귀국 직전에 아비뇽페스티발서 본 Tanztheater(무용극)으로 불리우는 피나 바우쉬의 최면에서 채 깨어나지 않은 상태에서 만든 것이다. 〈Kontakthof-with Ladies and Gentleman〉의 20여명의 신사숙녀-남녀무용수가 드러내는 짝짓기 현장. 성인 남녀가 공개 미팅하는 가상의 사교장. 어쩐지 19금. 누군가는 좀 과격하게 ‘매음굴’로 번역했구나. 어쨌든 나는 너에게 빚진 것이 너무 많다.

이 작품을 나의 솔로로 재탄생시키기 위해서는 원작에서 업 스테이지에 수평으로 놓여진 의자들의 모노버전-하나의 의자가 필요하다. 의상은 부산의 패션디자이너 배용씨가 협찬해 주신 도시적이고 세련된 느낌의 원피스-피나의 여자 무용수들은 몸에 꽉 낀 노출이 심한 원피스를 착용했지. 그리고 하이 힐. 음악은 바하의 토카타와 푸가. 가톨릭 영향권에서 자라 온 나에게 이 파이프 오르간 음악은 고백성사용으로 안성맞춤이다.

내가 얼마나 이 사회에 그리고 당신의 상대로 적합한지를 증명하여야 한다. 걸어 나와서 정면으로 멈추어 서서 마치 신체검사 받는 병정 후보생처럼 나의 전신을 다 드러낸다. 그리고 90도씩 돌며 옆모습도 뒷모습도 다 전시한다. 이 사회에서 함께 살아가기 위하여 갖추어야 하는 가능한 모든 신체적 능력을 보여준다. 손가락도 자유자재로 접고 펼 수 있고 좌우 균형이 잘 잡힌 운동신경을 검사하는 몇 가지 테스트를 자발적으로 무표정으로 실시한다.

운동실조증에 걸린 엄마를 모시고 간 병원에서 의사가 지시한 검사 항목에서 배운 동작들이 차용되었다. 어쩔 수 없다. 작품에 필요하다고 간주되면 망설임없이 끌어 삼키는 이기심, 나중에는 오마쥬 심정으로 실연했지만 엄마의 병으로 인하여 얻게 된 이런 정보도 예술의 이름으로 주저 없이 차용하는 불경을 범한다. 그리고는 처음에 밟은 동선을 역으로 사용하면서 의자로 돌아가 의자에 앉는 대신 의자 뒤에 숨는 것으로 이 작품은 끝난다. 이 무미건조한 일상동작들이 무대에서 가지는 힘을, 학교에서 수 년을 걸쳐서도 배우지 못한 것을 단 하나의 공연을 보면서 깨달았다.

제목으로 사용한 ‘안녕’이라는 단어가 내포하는 기대와 질문과 축복에 의문을 던지고 싶었다.

춤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춤을 통하여 나의 생각을 전달하고 싶었다. 겉으로 자신만만하던 사람의 내면에 있는 불안과 두려움을 공유하고 싶었다. 이건 나만의 문제가 아니잖아. 초인종 소리가 나면 문을 열기 전에 조그만 렌즈구멍을 통하여 상대를 확인하는 서양 사회에서 받은 당혹함. 아버지는 밤에도 대문을 잠그지 않으셨다. 우리 집에는 가져갈 것이 없잖아. 주님께서 우리 가족을 돌보아 주실거야. 그랬지, 그 시절 그 많던 도둑도 강도도 우리 집을 피해갔다! 대략 8분 정도 소요된 이 작품을 본 관객에게 내가 의도한 것이 다 이해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시인이면서 무용평론을 한 고 김영태님은 ‘우아해지기 위하여 태어나기’라는 기대하지 않은 표현을 하셨다. 그는 내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보다 나의 자태에 주목하였던 것 같다.



ⓒ남정호



두 번째 솔로는 〈대각선〉. 첫 번째 작품과는 완전히 다르게 형식을 고민한 작품이다. 내가 공부하던 시절 프랑스의 무용계는 뉴욕의 포스트모던댄스의 주자들이 들락거리며 지금까지 해 온 것에 관한 반감을 부추겼고 그런 이들의 작업을 보고 나면 통쾌함과 용기가 솟아올랐다. 프랑스는 미국의 무용가 M머스 커닝햄의 진가도 본토보다 더 빨리 알아차린 풍토를 가지고 있다. 물론 이 역사는 Ballet Russ(발레뤼스)로 거슬러 갈 수도 있지만.

처음에 무대 상수 뒤쪽에서 가부좌 자세로 있다가 일어나서 하수 앞까지 걸어 나오는 것을 반복한다. 이 단순한 동작을 처음에는 아주 느리게, 두 번째는 아주 빠르게, 세 번째는 왈츠 리듬으로 춤추듯이, 네 번째는 스타카토 기법으로 끊으면서 그리고 마지막으로 평상시 호흡으로 실연한다. 매공연마다 다르지만 대략 20분가량이 소요된다. 첫 번째 하는 느리게에서 어떤 호흡을 잡느냐가 중요하다. 느린 춤, 느리게 움직이는 것이 제일 어렵다.

솔본느 디플롬 시험에서 발표하여 괘 괜찮은 평가를 받았다. 어느 동작도 무용이 될 수 있고 어떤 동작이라도 시간성과 정서를 첨가하여 다르게 변모시킬 수 있다는 믿음으로 만들고 춘 것인데 당시 미개한이었던 나에게는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만큼 신발견이었으니 의기 양양할 수 밖에^^

의상은 검정색 튜닉연습복, 음악은 없다. 침묵은 금^^ 도와주는 소리가 없으니 조그만 실수도 낱낱이 드러난다. 세 번째 버전에서 왈츠 리듬으로 할 때는 내가 흥얼거리며 박자 세는 소리가 들릴 것이다. 현대무용사에서 마리 뷔그만이 무음악을 시도한 지 거의 한세기가 지났지만 아직도 무음악은 나체로 춤추는 것 만큼이나 무모하여서 이런 시도를 대부분 꺼린다. 허풍쟁이이고 모험심이 강한 톰 소여가 되어 타부를 부수고 싶어했던 시절이었다.



ⓒ남정호



마지막으로 한 세 번째 솔로는 〈계속〉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다. 무대에 5개의 점을 찍는다. 오방! 뛰기, 돌기, 균형잡기, 쓰러지기, 일상제스쳐를 각 지점에 가서 시행한다. 그리고 다음 번에 다시 각 지점으로 돌아가서 그 주제에 맞는 또 다른 움직임을 첨가한다, 이 반복의 회수가 많아지면서 처음의 점은 선이 되고 그리고 면이 된다. 이번에는 5번 반복에서 끝났지만 이 공식은 끝없이 계속 나아갈 수 있는 여지를 가지고 있다. 내용은 없다. 형식만이 존재하는 춤, ‘움직임이 곧 주제’이다.

한참 후에 알아 차렸지만 트리샤 브라운이 1971년도에 발표한 솔로 〈Accumulation〉(축적)도 이 공식을 가지고 있다. 트리샤 브라운은 무대 중앙 앞 한자리에 서서 Uncle Jone’s Band의 〈Grateful Dead〉 음악에 맞추어 느긋하게 움직인 반면에 나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 30여분을 부산스럽게 무대를 돌아다녔지. 그래도 작곡가 고 강석희씨가 공식을 알아차려 주어 반가왔다.

이렇게 완전히 다른 양식을 가진 세 개의 솔로로 구성된 첫 공연은 애석하게도 영상물로 기록되지 못했고 변변한 사진도 없다. 부디 그 현장에 있었던 이들의 뇌리에는 오랫동안 기록이 되었기를. 그로부터 40여 년이 더 지났는데 그동안 발표한 작품들을 보니 고 김영태님의 예언이 적중한 것 같다. “남정호의 귀국 공연 세 작품은 자기 개성이 돋보이는, 그가 앞으로 제시할 춤 성격의 전주곡에 해당된다”.

돈도 빽도 없는 신세였는데 많은 이들이 보러 와 주었다. 그 인연으로 맺어진 분들과 어떤 과잉이나 지나침 없이 지금까지의 여정을 함께 하려 노력해왔다. 필요한 것만 들고 떠나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는데 나는 아직도 비밀스러운 경험으로 엉켜있는 향수병을 치료하지 못했다.

남정호

전 국립현대무용단 예술감독.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명예교수​ ​​​

2024. 5.
사진제공_남정호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