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1982년 봄 대학 고참 선배들로부터 지도교수로 모실만한 분을 추천받았다. 사학과 하현강 교수였다. 삼고초려할 생각하고 일단 연구실로 찾아갔다. 후덕한 아저씨처럼 인상이 좋은 분이었다. 마음이 좀 놓였다. 서클(동아리) 등록이 취소된 경위를 설명하고, 재등록을 하지 못하면 이번 가을로 예정된 공연도 무산되는 절박한 상황이라고 하소연을 했다.
“근데, 탈반이 탈춤은 안 추고 왜 데모를 했나?”
“저희는 그날 탈춤 공연을 한 것뿐입니다. 그런데 전국에서 엄청나게 몰린 관객들이 공연 끝나고 교문을 빠져나가면서 백양로에서 구호를 외친 겁니다. 저희가 어떻게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흠…… 그래?”
“그 바람에 회장도 강제 징집되었습니다. 저희는 공연을 하고 싶습니다.”
탈춤의 역사적 의미에 대해서 사학과 교수로서 몇 마디를 더 질문하고 수업이 있다며 다음에 다시 찾아오라 했다. 나는 나오자마자 동기인 주애를 붙들고 다짜고짜 부탁했다.
“주애야, 글 하나 써라. 다음 주 연세춘추에 싣자.”
“다음 주에?” 난감해하면서도 이유를 아는지라 한번 써보기는 해보께, 하며 도서관으로 갔다. 며칠 후 초고를 내미는데, 읽어보니 훌륭했고 무엇보다 충분했다. 지도교수가 흡족할 만한 수준의 내용이었다. 우리가 데모만 하는 서클이 아니고, 또 춤만 추는 데에 그치지 않고 학술적 연구도 게을리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야 했다. 하현강 교수를 다시 찾았다. 지난번과는 많이 다르게 반겨주셨다. 그리고 책상에 놓여있는 연세춘추를 집어 들어 탁자에 올려놓고, 기고문이 게재된 면을 찾아서 펼쳤다.
“자네 경영학과라고 했나? 그런데 우리 전통탈춤에 대한 이해가 깊구만.”
“아닙니다. 많이 부족합니다. 앞으로 후배들과 연구를 더 깊게 해보려고 합니다. 많이 지도해 주십시오.”
“알겠네, 내 자네들 믿고 지도교수 맡아주겠네.”
서클 등록 문제가 의외로 쉽게 풀렸다. 한 시름 놓을 수 있게 되었다.
*
당시 총학생회는 학생운동권이 조직적으로 지원해서 당선된 학생회장이 이끌고 있었다. 학회가 과별로 만들어지고 그를 기초로 단과대학 학생회가 구성되는 흐름이었기 때문에 총학생회는 학생운동의 중요한 공간이었다. 그래서 탈반에 대해서도 우호적인 정도를 넘어 아주 적극적인 성원을 했다. 공연 예산도 당시로는 충분한 지원을 해주기로 약속을 했다.
“이거, 학생회장님 지시로 특별히 지원하는 겁니다.”
덩치가 산만한 총무부장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면서, 굳이 한마디를 달고서야 봉투를 내밀었다. 더욱이 그는 경영학과 79학번 나의 과 선배이기도 했다. 나 역시 티꺼운 티를 감추지는 못했지만 고맙다는 인사는 잊지 않았다.
“이번 공연은 제대로 잘 준비될 거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나오면서 봉투를 열어보았다. 수표였다. 모두 10만 원짜리로 빳빳한 수표가 무려 50장이나 들어있었다. 한 학기 등록금이 4~50만원 정도였으니, 큰돈이었다. 사실 공연 준비하는 데에 이렇게까지 큰돈이 들어갈 일은 없었다. 밤늦게까지 연습하느라 밥값과 술값에 당일 고사상 차리는 비용 정도가 다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악기와 의상을 마련하는 데에는 꽤 큰 목돈이 필요했다. 매번 공연할 때마다 선배 누나들이 헤진 의상을 손수 수선하고, 탈도 신문지며 한지 찢어 풀에 녹여서 석고로 된 탈틀에 붙여서 직접 만들었다. 부족한 악기는 다른 학교 탈반에서 빌려서 해결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그래서 이참에 아예 악기와 의상을 일체 마련하는 데에 돈을 쓰기로 작정을 했다. 또 일반 학생들 중에서도 농악을 배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제법 있어서, 이번 공연에 농악대 규모를 아주 크게 늘려 잡아 그들을 참가시킬 요량이었다. 덕분에 늘어난 농악대들에게도 민복을 제대로 입히고 사물 악기도 너끈히 마련할 수 있었다.
1970년대 어느 날 저녁 대학가 탈춤공연 행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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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 대강당에서 정문까지 길놀이를 다 돌고 마침내 노천극장에 올랐다. 마당에 들어서면서 깜짝 놀랐다. 사람이 많을 거라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노천극장 계단무대는 물론이고 계단 아래 춤마당에까지 사람들이 밀려 내려와 어깨를 비비며 빼곡이 껴 앉아 있었다. 뒷패를 맡아준 선배들이 공연마당 안쪽으로 자꾸 좁혀 파고드는 관객들을 막고 마당판의 공간을 확보하느라 진땀을 흘렸다. 고개를 들어보니 계단무대 꼭대기까지 사람들이 빈틈없이 꽉 차 있었다. 어느덧 해가 붉은 노을 속으로 스러지고 어스름이 스물스물 노천에 들어차고 있었다. 드디어 판굿 신촌농악을 시작했다. 관객들도 농악대들과 혼연일체가 되어 함께 들썩거리자 마당판은 뜨거운 열기로 후끈 달아올랐다.
노천극장은 120도 부채꼴 모양이다. 중심 쪽은 평지로 지대가 낮고, 밖으로 펼쳐지면서 오르막이고, 다랭이논 마냥 계단으로 되어있다. 계단은 흙으로 되어있고 잔디가 깔려있다. 하지만 잔디가 성하게 남아있을 겨를은 없고, 간혹 사람들 발길이 덜 타는 곳은 제법 수북하게 자라있기도 했다. 계단의 경사는 가파르지도 펑퍼짐하지도 않아, 오르내리기 어렵지 않으면서도 아래 무대가 잘 내려다보였다. 콜로세움 원형 경기장처럼 관객들을 모두 아래의 춤마당으로 집중시킬 수 있는 구조였다. 계단 꼭대기 너머는 나무들이 들어차 있는데 수령이 꽤 되는 것들로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어서, 노천극장을 아늑하게 감싸 안고 있는 모양새였다. 극장 전체가 흙으로 덮여 있어 아래 마당판에서 나는 소리를 바로 튕겨내지 않고 적당히 멤돌게 했다. 그러면서도 소리가 노천극장 밖으로 나가게 두지도 않고 잘 품어 공명을 만들어 풍요롭게 울리도록 해주었다.
‘이제 갈까?’ 쇠를 살짝 치켜들며 장구를 잡은 후배에게 눈으로 물었다. 고개를 끄덕였다.
“젠젠~ 젠~젠 젠~제젠 젠~젠”
“덩끼닥 덩 다라라라 덩끼닥 쿵딱”
굿거리 장단으로 본공연이 시작되었다. 대학 현실을 빗댄 신입생과장에서는 어용총장을 풍자하고, ‘국풍81’을 신랄하게 까댔다. 군바리와 짭새 역의 도깨비들이 나오는 학생과장에서는 교내에 상주하는 형사들과 안기부 보안사 요원들의 비밀사찰을 무겁지 않게 다소 코믹하게 풀어냈다. 관객들도 야유를 퍼붓다, 고개가 젖혀지도록 웃다가 하면서 춤판에 빠져들었다. 어느새 마당의 탈박들과 관객들은 하나로 녹아 엉겨 붙었다. 마당에는 더 진한 어둠이 내려앉고,횃불은 불똥을 뚝뚝 떨구며 더욱 강렬하게 이글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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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 땅. 땅. 침울한 외마디 쇠 장단에 허름한 차림의 사람들이 마당 안으로 들어선다. 10여명이 다 들어서자, 활기가 넘치고 힘찬 군무를 춘다. 모를 내고, 김을 매며, 추수하는 춤 동작에 이르러서는 모두 힘이 빠져간다. 고통스런 몸짓으로 비명을 지르거나 한탄하고 포기하는 모습으로 하나 둘 쓰러져 간다. 그래도 안간힘을 써 일어나더니 축 쳐진 발걸음을 옮긴다. 마당판의 원을 따라 한참을 걸어 도시로 이농(離農)을 한다. 그 때 자지러지는 난타 장단이 이들을 몰아 부친다. 쫓기며 뿔뿔이 흩어지는가 싶더니, 어느새 재빠른 동작으로 두 줄 대오로 마주선다. 그러자 매우 단조롭고 딱딱한 장단이 나온다. 선 채로 모두가 일제히 기계적인 동작을 똑같이 반복한다. “덩덩쿵딱쿵딱 덩기닥딱쿵따쿵” 빠른 8박의 장단을 놓칠 새라 바짝 경직된 동작으로 한참을 그렇게 움직이더니, 소름이 끼치도록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무겁게 내려앉은 밤하늘을 찢는다. 비명소리와 동시에 장단도 멈추고, 기계가 되어 함께 춤을 추던 이들도 하고 있던 동작 그 상태로 꼼짝을 않고 멈춘다. 한 사람이 마당에 쓰러져 있다.
일제 식민지와 전쟁을 겪고 피폐해진 농민들이 박정희의 근대화 정책을 타고 살길을 찾아 이농하여, 도시노동자가 되어갔다. 노동자들은 고된 노동과 저임금 착취로 산재와 생존의 위기 속에서 노동조합을 통한 협력과 연대의 한줄기 희망을 보지만, 군대와 경찰의 폭력에 무참히 무너져버렸다. 마지막 폭력에 맞서 함께 싸우는 장면은 ‘취발이와 노장’의 대립으로 상징된 지배-피지배의 투쟁보다는 훨씬 현시대의 구체적인 인물로 대체한 구성이었다.
몇몇 관객들이 ‘파쇼타도’를 외치기 시작했다. 그 구호는 점차 들불처럼 번지더니 노천극장이 들썩일 만큼 커졌다. 언제나처럼 막 데모로 넘어가려는 순간이었다. 그때 하얀 두루마기를 입은 내가 마이크를 잡고 섰다. 한바탕 데모로 치달을 찰라에 딱 막아서듯 자르고 나선 형국이라 관객들은 어? 뭐지? 하며 술렁거렸다. 뭔 소리를 하려나, 이내 소란했던 노천극장이 조용해졌다.
1980년대 대학가 탈춤공연 행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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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공연도 시위로 가면 탈반은 등록이 또 취소될 테고, 그럼 영영 회생이 어렵다.”
“그렇다고 5천명 이상 모이는 다시없는 기회를 놓칠 수도 없는 것 아닌가.”
공연을 일주일 앞두고 운동권 지도부 회의에서 갑론을박이 있었다. 공연 후 시위를 어떻게 할지를 결정해야 했다. 두 의견 모두 옳은 말이었다. 나 역시 비밀경찰들이 캠퍼스에 상주하며 학생들을 감시하는 마당에 공연만큼 합법적이고 효과적인 시위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이번 경우는 탈반 서클의 존립을 좌우하는 상황이었다.
“그럼, 짜복이가 공연 끝에 탈반의 사정 이야기를 하고, 우리는 짜복이를 야유하면서 시위로 넘어가는 것으로 하면 어떨까?” (짜복은 필자의 당시 별명이었다.)
탈반 회장으로서, 관객들에게 시위를 하지 말아 달라는 의사표시를 공개적으로 해서 책임에서 완전 빠져나갈 수 있게 하자는 것이었다. 어차피 그 다음 시위 상황은 탈반이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탈반도 살리고 시위도 계획대로 할 수 있는 묘책 같았다. 다들 괜찮은 방법이라고 여겼고 나도 동의했다.
“작년 봄 정기공연이 시위로 이어지게 되면서 회장은 군대에 끌려가고, 서클은 등록이 취소되었습니다. 그 후 천신만고의 노력 끝에 재등록이 되어, 오늘의 공연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도 작년과 같이 시위로 이어지게 되면 탈반은 다시 등록취소가 불가피합니다.”
나는 서클의 입장을 간단히 언급하는 것으로 발언을 서둘러 마치고 바로 마당을 빠져나왔다. 나머지 탈박들은 공연 마치자마자 서둘러 악기를 들고 철수해 있었다. 그러자 이곳저곳에서 야유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집어 쳐라.” “신파 하냐.” 그런데 웬일인지 반응이 영 시원치 않았다. 관중들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게 아닌데 하며 “파쇼 타도” 등 구호가 터져 나오기는 했지만 호응이 여의치 않았다. 계획대로 바람을 잡았지만 도무지 불이 옮겨붙지 않았던 거였다. 수천 명의 관객들이 노천극장을 떠나 백양로를 가득 메우며 교문을 향해 강물처럼 흘러갔다. 행렬 곳곳에서 구호를 외치고 운동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사람들도 구호도 함께 외치고 노래도 함께 불렀지만, 거기까지였다. ‘오늘은 여기까지’ 다 함께 이심전심 작정이라도 한 듯 시위로 넘어가지 않았다. 어느덧 사람 물결의 선두가 교문에 다달았지만 분위기는 차분한 채 그대로였다.
커다란 시위가 벌어질 것이라 판단하고 대규모로 동원되어 대기하던 전경들과 교문 근처에 깔린 사복형사들도 “이게 무슨 상황이지?” 하며 어리둥절해 했다. 끝내 시위 조짐이 보이지 않자 안도한 듯, 경찰들은 오히려 안전관리하러 나온 사람들인 것처럼 횡단보도와 지하도로 이동하여 인파의 안전한 귀가를 지원했다. 그날, 5천명이 훌쩍 넘는 역대 최대 인파가 구호와 노래만 부르고 흩어졌다.
“짜복이가 연기를 너무 실감나게 했어.”
내 연기가 너무 간곡해서 관객들이 공감을 하는 바람에, 야유가 먹히질 않아 바람이 잡히지 않았다는 거였다. 처음에 마이크 앞에 섰을 때는, 하려던 요지의 말만 아주 건조하게 하고 말아야지 했다. 그런데 그 많은 관객 앞에서 막상 말문이 열리고 나니까, 지난 1년이 휘리릭 지나가며 감회가 밀어닥치면서, 그만 내 속에 든 마음이 나도 모르게 흘러나와버린 모양이었다.
“수고했다 짜복아, 그동안 고생 많았다.”
그날 공연, 아니 무산된 시위계획에 대한 평가를 하던 지도부 모임에서 동료들은 시위 기회를 놓쳐서 아쉽기는 하지만 누굴 탓할 일은 아니라며, 하나같이 진심으로 나와 탈반에게 위로와 격려를 해주었다.
유창복
성공회대 사회적경제대학원 겸임교수, 전 성미산마을극장 극장장, 전 서울시마을공동체종합지원센터 센터장